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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92화 (492/1,064)

492화

베이고르군이 텔라그라드에서 집결했다는 소식에 군터는 그곳이 실질적인 이번 전쟁의 마지막 전장이 될 것이라 짐작, 아니 확신했다.

전장을 택한 것은 베이고르지만,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집결한 베이고르군을 무시하고 다른 곳을 공략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단 적의 전력이 한 곳에 뭉친 데다, 무엇보다도 왕이 그곳에 있다. 되도록 빠르게 이번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텔라그라드에 있는 적은 놓치기 아까운 먹이와 같았다.

"텔라그라드에서 3군이 집결하겠군요."

베이고르 서부를 평정하다시피 한 테라냐드군과 남부에서 올라오고 있는 울타마란 소레딜의 군대. 그리고 동부에서 서진을 거듭하고 있는 군터의 군대까지. 이번 전쟁에 참여한 주요 군세가 모두 집결하는 셈이었다. 베이고르가 전력을 집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 역시 힘을 모으는 것이다.

"타라냐드군을 이끄는 이는 델라모리라는 자라 합니다. 듣기로는 평민이라던데, 사실인지 모르겠군요."

"능력이 있다면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장군의 지위를 평민에게 내려주는 것이 쉽지 않고, 드문 일이라지만 당장 군터 역시 평민이었다. 더구나 그는 무위장도 아니다. 물론 그를 기용한 이가 7황자이며, 그조차도 많은 신하들의 우려와 반대에 부딪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평민의 신분으로 위장의 지위에 오른 군터로서는 델라모리라는 자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장군께서 보시기에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델라모리라는 자도 특별한 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특별한지 어떤지, 보면 알겠지."

군터가 그의 군대는 시기적절하게 텔라그라드에 도착했다. 시기가 적절했다는 것은 다른 두 군대와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무명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군터 장군."

기껏해야 30대 초, 중반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젊은 장수가 군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바로 타라냐드군을 이끄는 델라모리였다.

그에 대한 군터의 첫인상은, 꽤나 쾌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터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그가 어떻게 파비우스 리에론을 참살했는지 알고 있었다.

"반갑소. 나 역시 그대의 활약상을 들어왔지."

똑같이 일군을 이끌고 있다 해도 둘 사이의 지위 차이는 분명했다. 델라모리는 장군이라 하나 한 주의 무위장에 불과했고, 군터는 비록 정식으로 황제에게 서임을 받은 것은 아니라지만 어찌 되었든 적포 장군이었다. 그러니 델라모리가 그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했다.

"다시 뵙습니다 장군."

"그렇군."

카운티그 소레딜이 군터에게 깍듯이 군례를 취했다. 울타마란 소레딜의 아들인 그가 부친 대신 군대를 이끌고 왔다. W타마란 소레딜은 후방의 위협을 진압하기 위해 남는다 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이유일 뿐이라는 것은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대전을 앞두었다지만, 사실 제국군은 이 전투에서 지기가 힘들다. 그들은 객관적인 전력에서부터 이미 베이고르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장에, 울타마란 소레딜은 직접 나서는 대신 그의 아들을 내보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들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몰아주는 것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군터는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그가 후방에 남으면서 이번 전투를 그가 지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공을 세운다면 제1공은 그의 몫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울타마란 소레딜이 그에게 양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래인 셈인가.'

주장의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부탁한다. 군터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의 입장에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카운티그 소레딜이 첫만남에서부터 묘하게 날을 세웠던 것을 기억하기에, 혹 그가 전장에서도 불퉁하게 나올까 그것이 조금 신경 쓰일 뿐.

그러나 부친에게 무슨 말을 들기라도 한 것인지, 다시 만난 카운티그 소레딜의 태도는 제법 공손했다.

"적은 구릉 너머에 포진했습니다. 유인을 하지 않는 이상, 전장은 울퉁불퉁한 고지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델라모리가 전장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군터는 그의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직접 가서 보겠다."

"음. 뭐, 그러시지요."

직접 전장을 살피겠다는 말에 델라모리가 슬쩍 눈을 빛냈다.

군터는 휘하 지휘관들과 함께 말을 타고 구릉을 올랐다. 어찌나 지형이 험한지, 오르막과 내리막의 구분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좀 올라간다 싶으면 다시 내리막이었고, 그렇게 좀 갔다 싶으면 어느새 다시 경사를 올라야 했다.

"험하군."

"기병이 힘을 쓰기는 어려운 지형이지요."

카운티그 소레딜의 말에 군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이런 지형에서는 기병이 활약할 수가 없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정예라 해도 말이다.

'시야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아. 어지간하면 혼전이 벌어지겠군.'

적은 어째서 이런 곳을 전장으로 택했는가, 대충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이런 곳에서 맞붙는다면 필시 지저분한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게 적이 원하는 바겠지요."

델라모리의 말대로였다. 이런 지형에서는 전투 중에 전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기만 해도 지휘체계가 반쯤은 마비가 될 것이고, 병사들은 지휘관의 통제에 따르기보다는 눈 앞의 적과 맞서 싸우는 데만 정신이 팔리게 될 거다. 그리 되면 난전이다. 그리고 그렇게 난전이 벌어졌을 때는, 정예보다는 군기가 덜 잡힌 쪽이 더 이득을 보기가 쉽다.

"적들은 이미 수 없이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배운 것이 있겠지요."

베이고르가 던진 마지막 승부수라고 봐야 했다. 이 테라그라드는 베이고르의 중북부와 북부를 잇는 길목과 같은 곳. 무시하고 우회하여 북부를 곧장 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북부를 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적은 이미 전력을 집중하고 있으니 제국군이 우회하여 움직인다면 그대로 곧장 남진을 하거나,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굳이 어렵게 싸울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시어문드가 말했다.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제구군의 가장 큰 적은 베이고르도 뭣도 아닌 시간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만 충분했다면 굳이 적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 굳이 부딪쳐 싸울 필요 없이 그저 대치를 유지하면서 버티기만 해도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적이 알아서 먼저 물러나거나 무너지거나 했을 테니.

그러나 여건을 한탄하여 무엇 하겠는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대한 역량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특별히 고려한 계책이라도 있나?"

그보다 조금 더 먼저 도착한 두 사람에 묻는 말이었다.

군터의 물음에 카운티그 소레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사들을 동원하여 지형을 평평하게 바꾸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이 모든 지형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주요 전력을 집중시킨 곳에 손을 댄다면 어느 정도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괜찮은 생각이지만…시기와 장소를 맞추기가 애매해지지 않겠소? 우리가 적의 포진을 손바닥 보듯 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리 한다 해도 전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요."

"허면 장군께서는 뭔가 다른 생각 있으신 모양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반박을 당한 것이 불쾌했는지, 대꾸하는 카운티그 소레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미숙하군.'

젊어서 그런지 카운티그 소레딜은 감정 조절이 미숙한 듯했다. 이런 가벼운 자리에서조차도 저렇게 날을 세우다니. 부친에 비하면 한참이나 떨어진다.

"시간에 쫓긴다 해서 다급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에 델라모리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고, 나이까지 어린 카운티그 소레딜이 은근슬쩍 불경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지형을 보면 병사들이 기동력을 발휘하기는 힘들지만, 매복이라든지…은밀한 작전들을 시도하기에는 꽤나 괜찮습니다."

"작전이라면?"

"제 휘하에 몸이 날랜 병사들이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파비우스 리에론을 쳤던 것도 그들이지요. 허락하신다면 그들을 한 번 활용해보고자 합니다."

"몸이 날랜 병사들이라면 내 휘하에도 적지 않네만."

"물론 그러시겠지만, 제 휘하의 병사들은 그들과도 다를 것입니다. 장담하지요. 혹 믿음이 안 가신다면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도 좋겠군요."

"그러지."

군터는 델라모리의 말대로 그가 말한 '몸이 날랜 병사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군."

직접 확인한 델라모리의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라는 말조차 부족했다. 간단히 시연한 그들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군터는 루반다이를 떠올렸다.

일찍이 그가 상대했던 적들 중 가장 까다로웠던 적. 평범한 병사, 아니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 그들은 술법으로 강화된 특수한 병사들이었다. 군주 룬차이의 이름과 함께 전설이라고까지 불렸던, 강병 중의 강병.

물론 델라모리의 병사들이 루반다이들과 동급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 비하면 적어도 두, 세 단계는 처지는 것이 확실했다. 허나 그렇다 한들, 델라모리의 병사들이 특별하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비슷한 느낌이다.'

루반다이들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병사들. 군터는 어쩌면 예민한 부분일 수도 있는 것을 대놓고 물었다.

"병사들 하나하나에게 각인을 한 건가?"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총독 각하께서 직접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병사들이지요."

"놀랍군. 보는 순간 루반다이들이 떠올랐다."

"…그렇습니까?"

군터의 그 말에는 델라모리도 놀랐는지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장군께서는 일전에 루반다이들과 겨루셨었지요."

굳이 룬차이의 이름을 피해 루반다이와 겨뤘다 하는 것은 제국의 군인이자 무인으로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군터는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굳이 그의 말을 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 세우지 않았다.

"그래. 그들에 비하면 부족한 것 같지만, 그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네."

"맞습니다. 실은 총독 각하께서도 그 루반다이들을 염두에 두고 저들을 양성하셨지요. 장군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완전히 그들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직스럽군."

"허면."

"뜻대로 하라."

군터는 델라모리에게 이틀을 주었다.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델라모리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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