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화
"역시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군."
타라냐드군의 지휘관, 델라모리는 울타마란 소레딜의 서신을 읽고서 조소를 머금었다.
이쪽의 피해를 강요하는 울타마란 소레딜의 속내는 눈에 뻔히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노골적이라 화가 나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자신의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뭐, 좋아. 원하는 대로 놀아드리지.'
이 전쟁에 이렇게 끼어들게 되었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다. 어찌 보면 그간 쌓아온 불신에 대한 대가를 받는 셈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어찌 되었든 공을 세울 기회가 아닌가.'
불신이 있든 없든, 드러나는 전공을 세우면 7황자든 울타마란 소레딜이든 모른 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이 어디로 갔다 했지?"
"자신의 영지로 향했습니다. 리에론의 잔당들을 제법 규합한 모양이더군요."
"영지. 영지라……."
영지니 영주니 하는 것들은 날 때부터 제국인이었던 델라모리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솔직히 그는 이런 코딱지만한 땅을 수십 조각으로 갈라놓고서 제 땅이네 하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그 놈. 제법이었단 말이지."
파비우스 리에론을 급습하여 처리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는 그 뒤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초장부터 머리를 쳐냈으니 그 밑에 놈들은 알아서 무너져 내릴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속 편한 낙관이었다. 머리를 쳐내자마자 이름도 몰랐던 놈이 두각을 보이며 그리도 성가시게 굴 줄이야.
반드레온 모렌스. 이제는 그 이름을 안다.
우군이라 생각했을 이들에게 주인을 잃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사태에도 그는 냉정하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동요하는 리에론의 군대를 통제하고 타라냐드군에 맞서 싸웠다. 비록 이미 전세가 기운 상태였기에 그것을 뒤집지 못하고 패퇴하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그 기세는 델라모리에게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성가시겠군."
잔당들이라고는 하지만 리에론의 군대까지 일부 규합했다 하니, 다시 마주하게 될 때는 전과 달리 군기가 잡혀 있을 터. 거기에 전장 역시 놈의 세력권 내가 될 테니, 전보다 한층 더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한들, 주인 잃은 개새끼일 뿐이지.'
얕보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다.
"싸우라면 싸워주지. 그러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델라모리는 휴식을 취한 그의 군대에게 진군을 명했다. 테라냐드군이 북서쪽으로 진군해가니, 잠시 멈춰 있던 전장의 수레바퀴도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
"전하! 급보이옵니다! 배나시드가……."
주앙 칼 고르는 뒷말을 듣기도 전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리 몸을 피한 것이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으로서 수도가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전하. 마음을 굳게 다잡으십시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그의 든든한 조언자, 란도흐 바라누엔 후작의 말에 주앙 칼 고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래. 그대의 말대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왕인 그가 살아있으며, 휘하의 충성스러운 군대 역시 건재하다. 또한 그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올 영주들 역시 적잖이 남아있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 군대의 소집을 마치고 출정만을 남겨두고 있다 합니다."
"좋아. 카디시아렌 공작 쪽은? 아직도 답이 없는가?"
"예. 그쪽은 아직……."
란도흐 바라누엔 후작이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니 주앙 칼 고르는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과오로다."
칸디시아렌 공작을 비롯하여 북부의 영주들이 이전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는 궤멸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 피해가 아직까지 복구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큰데, 그보다 더한 문제는 북부의 영주들이 중앙 조정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전쟁에서 소극적으로 임한 중앙 조정에 깊은 실망과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전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랬지. 허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겠는가."
"전하."
"다시 사자를 보내라. 내 친서를 내릴 것이니, 그것을 칸디시아렌 공작에게 전하라."
"전하. 그러실 필요까지는……."
"더 말하지 말게 후작. 할 수만 있다면 더한 것이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
왕의 친서를 든 사자가 브라노스로 떠났다. 그러는 사이, 곳곳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대개, 아니 거의 전부가 절망적인 것들이었다.
"모렌스 자작이 제국군과 이틀 간의 교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퇴하였다 합니다. 적들은 기세를 몰아 곧장 영지로 진격하였으며, 모렌스 자작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도주하였다고……."
"동부의 제국군이 세인제르 영지를 점령했다 합니다."
"휴던이……."
"일로모가……."
패퇴. 함락. 점령.
계속해서 이어지는 비슷한 보고들을 찌푸린 얼굴로 듣고 있던 주앙 칼 고르는 끝내 옥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전하!"
"전하!"
내관들을 비롯하여 신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주앙 칼 고르는 그들을 힘겨운 손짓으로 제지하고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일어선 베이고르가…다시 한 번 지독한 시련을 겪는구나."
군데군데 흰 머리가 땀에 젖어 흘러내렸다. 그것을 쓸어 올리던 주앙 칼 고르는 문득 자신의 주름진 손을 보고 멈칫했다.
"마르고 주름졌군. 대체 언제 이리 되었단 말이냐."
일생을 단 하나의 목표에 두었다. 왕가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옥좌에 오르고 싶다는, 단순한 야심 때문이 아니었다.
왕좌를 잃은 왕가의 운명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저주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쫓겨야 하며, 숨어살려 해도 그럴 수 없다. 망국의 옛 귀족들은 왕실의 핏줄을 깃발로 걸고 다시 일어서기를 갈망하나, 깃발로 쓰이는 왕족에게는 일망의 진정도 보이지 않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비극적인 운명의 연쇄. 주앙 칼 고르는 그 저주를 깨고 싶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베이고르의 깃발을 들어올렸던 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 저주받은 운명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대에서 일으킨 나라가…내 대에서 다시 무너진단 말인가.'
이 왕국은 그가 이뤄낸 일생의 성취. 그렇기에 베이고르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의 일생이 부정된다는 것과 같다. 그것을 주앙 칼 고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친정에 나서겠다."
"옛?"
"전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본래 주앙 칼 고르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거의 모든 조정의 중대 사안에서도 사안의 당사자보다는 중재자를 자처하곤 했었다. 그것은 재건 초기의 권력 구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택한 통치 방식이기도 했지만, 그의 성향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주로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주도하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이득만을 취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렇기에 중앙 조정에서 그의 영향력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조정의 양대 축이었던 칸디시아렌 공작이 몰락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정계에서 발을 뺀 뒤로는 어쩔 수 없이 리에론 공작에 맞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친정이라니요. 부디 재고를……."
일국의 군주가 친정에 나서는 것은 드문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 자칫 눈 먼 화살이라도 맞게 되면 나라 자체가 흔들릴 테니까 말이다.
허나 신하들이 그를 만류하는 것은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주앙 칼 고르는 일찍이 몇 차례 친정에 나선 적이 있었다. 재건 전쟁 당시에도 그러했고, 타칸 연합과의 대전 당시에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었다.
"전하. 아직 병환도 다 낫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신 와중에 친정이라니요!"
1년 하고도 수 개월 전부터 그를 괴롭힌 병. 왕국의 솜씨 좋은 의사와 사제들이 수 없이 달라붙었어도 끝내 치료하지 못하고 약간의 증세 완화 정도만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의 노력 덕에 최대한 악화를 막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몸은 조금씩 쇠약해져 갔다.
그것을 신하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병자의 몸으로 전장에 나가겠다는 왕을 어떻게든 만류하고자 했다.
"어차피 여기서 더 밀려나면 끝장이다. 나라가 없는 왕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앙 칼 고르의 마음은 굳건했다. 그는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단호한 말로 못을 박은 후 내관에게 일러 그의 갑옷과 투구를 가져오게 했다.
"왕가의 깃발을 걸어라."
왕가의 깃발. 왕의 깃발을 든 기수들이 군대의 전열에 섰다. 단순히 깃발 하나가 더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의미는 장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왕이 일전을 결의했다. 그 소식은 아직까지 베이고르의 깃발이 걸린 땅들에 아름아름 퍼져나갔다.
왕의 깃발을 향해, 각지에서 군세가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주앙 칼 고르가 목을 빼고 기다리던 북부의 군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물론, 칸디시아렌 공작 역시 북부 영주들의 군세를 규합하여 이끌고 왔다.
주앙 칼 고르는 직접 그를 마중 나갔다. 왕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전하. 강녕하신 모습을 다시 뵙게 되니 기분이 좋습니다."
"나 또한 그렇군. 오랜만이네 공작."
무장을 한 왕과 공작이 서로를 마주보며 옅게 웃었다.
"전황이 좋지 않네 공작."
"옛 생각이 나는군요. 이 땅을 점거하고 있던 제국에 맞서 베이고르의 깃발을 처음 들어올리던 때가 말입니다. 그때는 정말 불안했었지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어찌 보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거병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신이 보기에,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려운 싸움이지만, 아국이 하나가 되어 창칼을 든다면 그 어떤 대적이라 한들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허면 공작.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대의 활약을 기대해봐도 되겠는가."
칸디시아렌 공작이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겠나이다."
*
"적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왕…아니, 주앙 칼 고르가 친정을 선포했다더군요. 그의 깃발 아래로 영주들은 물론, 자발적으로 일어선 민병들이 몰려들고 있다 합니다."
세인제르를 점령한 후. 군터는 군을 재정비하면서 각지에서 날아드는 보고들을 들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겠지요."
"마지막 발악입니다."
최후의 대전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유로운 이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베이고르의 전력이 집결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국에는 크고 작은 승전보가 끊이지 않고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표정이 굳은 자들도 소수이지만 있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영주들이 군대를 이끌고 왕에게 갔다는 건, 본인들의 영지를 포기했다 봐도 무방한 것이지요."
"각오를 다졌다는 건가."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입니다. 그들과 일전을 벌인다면, 그 저항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할 것입니다. 어중간하게 상대했다가는 자칫 크게 낭패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군터였고, 시어문드였으며, 모레인이었다. 특히 시어문드 같은 경우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군중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같은 생각이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허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 역시 사실."
군터는 그의 휘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지만, 앞으로가 지금까지보다 더 중함은 모두가 다 알 거라고 생각한다. 긴장을 풀지 마라. 흐트러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알겠나."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