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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90화 (490/1,064)

490화

"방도가 있겠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가설이 맞다 한들 그것이 장군께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옳은 말이다. 모페이브의 말처럼, 군터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인지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꺼림칙하다는 느낌만이 전부였다.

"무지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허니 먼저 장군과 같은 경우가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해주(解呪)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해야겠지요. 다행히 장군께서 심신에 문제를 느끼지 못하신다 하니, 장군께 작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장 장군께 해가 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마지막 말은 추측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그것을 군터도 알았으나 모른 척 넘겼다.

"그럼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고생을 시켜 미안하군."

"어인 말씀이십니까.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알고 있겠지만 이 일은 자네 혼자만 알고 있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홀로 끙끙 앓던 고민을 모페이브에게 일임하다시피 하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다 할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군터는 자신이 끙끙 앓는다 해서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모페이브가 오기 전까지 실컷 끙끙거려보았으나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지 않은가.

"장군.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으로부터으 전갈입니다."

막 마음의 짐을 치워낸 와중에 남부에서부터 서신이 당도했다.

그 즈음에는 군터도 남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들은 후였다. 타라냐드군과 접촉한 리에론 공작이 사망하고 그의 영지가 타라냐드군에 의해 반쯤 초토화 되었다던가.

'허망하게 갔군.'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허망했다. 리에론 공작. 파비우스 리에론은 군터도 몇 번이나 얼굴을 본 자였다. 주로 그의 옛 주인인 막시밀리언과 관련된 것이기는 했지만, 지저분하게 얽힌 사이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호감 따위야 조금도 없었지만, 한때 그렇게 위세를 떨치던 자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반드레온 모렌스 자작이 리에론의 잔당들을 이끌고 그의 영지로 도주했다 합니다."

"반드레온 모렌스……."

익숙한 이름이 또 하나 나왔다. 반드레온 모렌스. 한때 코누다이안의 바로 옆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자로, 역시 면식이 있는 자였다.

"리에론의 영내에서 그 자의 영향력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지."

리에론은 베이고르의 공작이다. 왕을 제외하면, 아니 사실상 왕에 버금가는 최고 권력자였다. 그런 그의 밑에는 당연히 고위 귀족이며 영주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그런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리에론의 잔당들이 자작에 불과한 반드레온 모렌스를 따랐다면 그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잔당들을 제법 규합한 모양이라 앞으로 벌어질 서부에서의 전투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듯싶습니다."

그런 소식들을 듣고 앞으로의 전세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과 구상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울타마란 소레딜이 보낸 전령이 그의 친서를 가지고 당도했다.

"장군. 뭐라 쓰여있습니까?"

군터는 울타마란 소레딜의 친서를 두어 번 반복해서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으나, 그 간단한 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터는 서신을 다 읽고서도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출진해달라는군."

"예상했던 바로군요. 하긴, 꽤 오래 쉬었으니까 말입니다."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반응이다. 다 읽은 서신을 그대로 건네주어 읽게 했음에도 이런 반응이다. 물론 그가 할렌에게 딱히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보이는 대로만 반응하는 그를 보니 테리브란으로 보낸 살라스가 벌써부터 조금 그리워졌다.

"…그런데, 꽤나 의미심장하군요."

기대하던 반응이 나온 것은 모레인에 이르러서였다. 건네 받은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레인이 군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서신에 쓰인 것만 보면,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서진을 개시하여 적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당초 계획했던 대로 속도전을 벌인다면 이런 방식보다는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예를 들면?"

"곧장 주앙 칼 고르를 잡으러 움직이는 것이지요. 어차피 남부의 적이 무너졌고, 살마드가 목전입니다. 적이 살마드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다면, 우리가 측면에서 주앙 칼 고르를 한 번 노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을 잡는다. 전쟁을 끝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일단 머리를 쳐 없애면 구심점을 잃은 적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산발적인 저항 정도가 전부일 테니까. 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자랑하던 리에론 공작도 죽은 마당이니, 여기서 왕까지 잃는다면 베이고르는 회생할 길이 없어진다.

그러나 울타마란 소레딜은 그런 빠른 길을 내버려두고 느릿한 압박을 택했다. 그런 방식은 안정적이지만 느리다. 애당초 이 전쟁이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울타마란 소레딜의 선택은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었다.

모레인은 그 점을 지적했다. 군터가 서신을 보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을.

'괜찮군.'

살라스가 부상을 다스리기 위해 떠났기에 머리를 맞대고 논할 수하가 없던 참이다. 그런 와중에 모레인이 재기를 보이니 군터는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까지 본 거지?'

문득 궁금해졌다. 모레인이 어디까지 보고 있을까. 자신과 같은 정도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그 이상을 보고 있을까.

"네 말이 옳다. 허나 우리가 한 생각을 그가 하지 못했을 리 없지. 허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소관이 감히 추측하자면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은 아마도…타라냐드군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생각도 너와 같다."

군터의 입가에 아주 짧은 순간,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군터는 모레인에게 눈짓했다. 대신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반드레온 모렌스라는 자가 리에론의 잔당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군은 적의 수도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반군의 수괴 주앙 칼 고르는 벌써 북쪽으로 몸을 피했다고 합니다."

모레인이 지도에 세 개의 점을 찍었다.

"이어서 현 시점, 아군의 위치를 살피자면…이렇게 되지요."

다시 한 번 세 개 의 점이 찍혔다. 타라냐드군과 울타마란 소레딜이 군대. 그리고 코누다이안에 주둔하고 있는 군터의 군대까지.

"모양새를 보면 아군이 3면에서 적을 포위하고 있는 형세입니다. 그 중 가장 앞서 있는 것은 타라냐드의 군대지요. 만약 여기서 아군이 서진을 시작하여 적을 압박한다면, 자연히 적은 북서부의 어딘가에서 집결하게 될 겁니다."

모레인이 한 점을 짚었다. 그리고 거기서 손가락을 그어 내리니, 그곳에는 방금 전 그가 찍었던 하나의 점이 위치해 있었다.

"타라냐드군이 지금 있는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방관만 할 것이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그들은 집결한 적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아, 물론 그들이 조금 더 앞서서 움직인다면 적이 집결하기 전에 일부를 상대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움직인 손가락이 반드레온 모렌스와 리에론의 잔당들을 의미하는 점을 가리켰다.

"아마도 그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 머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지요."

압박이다. 움직이라는 압박이며, 진의와 충성을 증명하라는 압박. 타라냐드군의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겠지만, 그들은 선택을, 답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까…말하자면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은 우리 대신 타라냐드군이 피를 흘리길 원한다는 거군요. 맞습니까?"

"나는 그리 생각한다."

군터가 모레인 대신 답했다.

"우리로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지. 타라냐드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전까지 그들이 보였던 행태를 떠올려보면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의 뜻대로 움직여줄 것이다."

휘하 무관들 중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어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리라. 사실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다. 적을 천천히 압박해 들어간다면 아무래도 제대로 된 교전은 드물 것이고, 전공을 세울 기회 역시 드물 것이다. 그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군인이 전공을 탐하는 것은 흠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군터 역시 전공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다 큰 것을 봐야 했다.

일찍이 군터는 7황자와 앞으로의 대전략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황자는 타라냐드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골치 아프다는 기색을 내비쳤었다.

'베이고르 하나만을 보는 전쟁이 아니다.'

당장 창칼을 부딪치는 것은 베이고르지만, 사실 이 전쟁은 북쪽이 아닌 서쪽을 염두에 둔 전쟁이었다. 베이고르를 무너뜨리는 것은 타라냐드를 압박하기 위함이며, 타라냐드를 압박하는 것은 서쪽에 웅크린 강력한 경쟁자를 노리기 위함이다.

'전력을 최대한 온존하면서 타라냐드를 압박한다.'

더 큰 앞을 내다보며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다. 어쩌면 울타마란 소레딜이 우직하게 남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던 것도 이런 전개를 예상하고, 밀어붙이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척에 노골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그가 있으니 타라냐드군도 어설픈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터.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쟁은 울타마란 소레딜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노련하군.'

군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출진을 준비했다. 그리고 준비가 다 끝났을 때, 직접 오천 군대를 거느리고 서진을 개시했다.

"장군.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나 또한 그렇다."

서쪽으로 움직이기를 사흘째. 군터는 아힌키우스에 주둔해 있던 시어문드의 군대와 합류했다. 전장에서 꽤 시간을 보낸 탓인지 시어문드의 얼굴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확연히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에서 발하는 특유의 총기는 조금도 흐려짐이 없었다. 군터는 그것이 썩 만족스러웠다.

"활약을 기대해도 되겠나?"

"과한 기대는 부담스럽습니다. 소관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습니다."

여전한 넉살에 군터가 피식 웃었다. 자신감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발을 빼는 시어문드였지만, 그런 그가 그 어떤 목소리 큰 이들보다도 더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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