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베이고르와 7황자 세력 간의 전투가 한창이던 와중. 베이고르의 남서쪽에서 일단의 군대가 국경을 넘었다. 그 군대는 제국기를 높이 들고 있었으며, 또한 멕시스 가문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멕시스 가문. 3대에 걸쳐 타라냐드를 지배해온 일족으로, 현 타라냐드 총독 자이드라 멕시스의 가문이기도 했다.
멕시스의 깃발을 든 군대가 베이고르의 국경을 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타라냐드가 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한 것이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누군가는 당황했고,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전자는 왕과 함께 움직이는 베이고르의 신료들이었고, 후자는 미리 언질을 받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리에론 공작이었다.
리에론 공작은 타라냐드의 군대를 직접 나가 맞이했다.
"반갑소 리에론 장군. 델라모리라 하오."
"……."
성도 없는 일개 무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놓는다. 그 오만한 태도가 심히 거슬리는 그였지만 애써 노기를 가라앉혔다. 이 정도 굴욕쯤, 얼마든지 감수하겠다고 마음 먹지 않았던가.
'가문을 위해서다.'
성이 없는 평민이라 하나, 일군을 이끄는 장수. 그렇다면 이 델라모리라는 자는 필시 자이드라 멕시스의 심복일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자에게 1만이나 되는 군세를 맡기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리에론 공작은 다시 입을 떼었다.
"기다리고 있기는 했으나, 생각보다는 빨리 왔군."
약속이 이행되었으니 안도가 되기는 했지만, 병력을 투입한 시점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베이고르와 7황자의 피해가 충분히 커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그 시점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리에론 공작의 생각이었다.
펠모르가가 함락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수도까지 뚫린 것도 아니며 제대로 된 회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베이고르의 기세는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하고, 베이고르 역시 마지막 발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렇습니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델라모리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투. 리에론 공작은 거기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멕시스 총독의 전언이라도 가지고 왔소?"
"물론이오."
델라모리가 품에서 서신으로 보이는 것을 꺼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부관 한 명이 그것을 건네 받고 말에서 내려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리에론 공작이 휘하 무관에게 눈짓으로 명해 그것을 받아오게 했다.
"리에론 장군. 총독 각하의 전언이오."
서신을 전하기도 전에 델라모리가 입을 열었다. 리에론 공작이 의아해 하며 그를 보았을 때, 델라모리는 웃는 것도 찌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총독 각하께서 이르시길,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라 하셨소."
"그게 무슨……."
서신을 들고 다가오던 무관이 갑작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가 스쳐 지나갈 때까지 마주 걸어오던 리에론 공작 휘하의 무관이 반응을 못할 정도였다.
"한때는 바크렌의 최고 무장이라고까지 불렸던 자가, 어찌 이리도 초라해졌단 말인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대가 한 선택의 결과일지도 모르겠군."
델라모리의 비아냥 섞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리에론 공작은 다급히 허리춤의 검을 뽑았으나, 한 줄기 회색 선이 그보다 빠르게 그의 목 어림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피가 울컥 쏟아지는 목을 부여잡으며, 리에론 공작은 말의 뒷목에 쓰러지듯 기댔다.
"빨리 왔다고 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아. 지금이야말로 딱 적절한 시기지."
타라냐드의 병사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마중을 나왔던 리에론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갔다.
"이제부터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그대는 그것을 보지 못하겠지만."
끝내 낙마하여 떨어진 리에론 공작의 몸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델라모리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점점 눈에 빛을 잃어가는 그에게 다가온 것은 델라모리가 아닌, 수급을 취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든 병사들이었다.
*
"파비우스 리에론은 자신이 자이드라 멕시스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 했겠지만…어리석은 착각이지."
타라냐드의 군대가 막 베이고르의 국경을 넘었을 무렵. 울타마란 소레딜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그 자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겁니까?"
카운티그 소레딜이 부친에게 물었다. 여기서 말 하는 '그 자'란 당연히 타라냐드 총독, 자이드라 멕시스를 뜻했다.
"글쎄. 모를 일이지만…나는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전하를 택할 작정이었던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그 자를 믿지 않고 있다. 그 자는 여우처럼 기민하고 교활한 자라, 언제든 예상을 뛰어넘어 움직일 수 있다. 그 자가 홀로 전하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한, 나는 자이드라 멕시스에게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타라냐드 군과 접촉한 리에론 공작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그 영지인 리에스가 처참하게 짓밟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엿새가 지난 후였다.
"그 자가 계획대로 움직여주었군요."
"그래. 일단은 그렇구나."
리에론에게 손을 내미는 척을 하며 베이고르의 분열을 유도하고, 리에론을 함정에 빠뜨려 그가 이끄는 남부의 군대까지 단번에 무너뜨린다.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파비우스 리에론이 어리석었던 탓일까, 자이드라 멕시스의 수완이 좋았던 탓일까.
무엇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일이 쉽게 풀림으로 인해 전세가 이 이상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숱한 전투와 적지 않은 전쟁을 경험한 노장의 눈에는 벌써부터 베이고르의 멸망과 7황자의 승리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아버님. 그럼 이제 북진을……."
파비우스 리에론을 묶어두기 위해 지금껏 남부에 가만히 머물고 있었다. 허나 이제 파비우스 리에론이 죽고 그의 군대가 와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베이고르의 잔당들을 섬멸하기 위해 북진을 해야 할 터.
"물론 그래야겠지만…내가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타라냐드군을 먼저 움직이게 하실 참입니까?"
"물론.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여전히 자이드라 멕시스를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등을 보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단호하게 답한 울타마란 소레딜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코누다이안으로 전령을 보내라."
*
군터의 부름을 받은 모페이브는 테리브란에서부터 위글로우까지 부지런히 말을 달렸다.
"고생했다."
위글로우에 도착한 모페이브를 곧장 만난 군터는 일단 그 말부터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눈에 띄게 홀쭉해지고 피폐해진 모페이브의 얼굴이, 그가 원행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급한 일이라 하여 밤낮으로 말을 달려 왔습니다."
"급한 일이라…급하다면 급한 일이지."
군터는 눈 밑에 짙게 그늘이 진 모페이브에게 우선 가서 쉬라 하였으나, 모페이브는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장군께서 먼 곳에 있는 소인을 찾으셨을 때는, 그만큼 소인을 급하게 필요로 하셨다는 뜻이겠지요. 소인의 노곤함은 그에 비하면 작은 것에 불과하니, 괜찮으시다면 장군께서 소인을 찾으신 연유부터 알고 싶습니다."
"미안하군."
"별 말씀을."
군터는 모페이브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주로 회색 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이었고, 끄트머리에 호닝거가 했던 말과 그에게 속을 다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물론 황자와 얽힌 이야기도 다 꺼내놓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숨김 없이 전부 이야기한 것이다. 이는 군터가 그만큼 모페이브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페이브와 그는 함께 한 세월도 세월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숱한 고락을 함께 한 사이였다. 군터를 모페이브를 살라스와 할렌 만큼이나 깊이 신뢰했다.
"으음."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모페이브는 침음을 흘렸다. 그는 군터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갖가지 이해 못할 행동들을 했다. 군터에게 다가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고, 품에서 자그마한 법구 같은 것들을 꺼내 무언가를 하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이 끝난 뒤. 그는 군터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먼저 불경한 행동들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괜찮다. 허나 그게 다 무엇이었는지는 궁금하군."
"부끄럽습니다만, 소인의 안목으로는 장군의 변화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장군께 일어난 변화를 들여다보고자 하였습니다만…도무지 소인의 눈에는 그 변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다만, 장군께서 말씀해주신 이야기들을 토대로 어느 정도 추측을 한 바는 있습니다."
"뭐지?"
"옛적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영적인 존재의 사멸에 대한 것이지요. 정확히는, 사멸의 순간에 대한 것입니다."
술사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의 술법적 역량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 호닝거와 그의 수하 술사들이 이쪽에 속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술법적 역량, 즉 술력보다는 왕성한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 술법의 체득보다는 이론의 탐구에 매진하는 이들이다. 모페이브가 바로 이쪽에 속했다.
때문에 모페이브는 술사로서의 술법 실력은 그리 대단하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여러 술법적 지식에 대해서만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는 군터가 그의 연구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아낌없이 투자를 해준 덕이기도 했다.
"장군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인간이 죽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인간은 죽는 순간 원념과 사기를 뿜어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거의 모든 생명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존재.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초월적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초월적 존재들은 사멸하는 순간. 종종 기적, 혹은 재앙이라 할 수 있는 현상들을 일으킵니다."
알고 있다. 어찌 모르겠는가. 군터는 사기를 다룰 수 있었으며, 미약하지만 사령술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모페이브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회색 나무를 요정들의 왕이라 말했고, 신이라 말했다고 하셨지요.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사실 하나만은 명확해 보입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그런 존재를 직접 사멸시키셨지요. 그 최후의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소인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심상치 않은 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음."
"감히 추측하자면, 장군께 그 초월적 존재의 원념이 달라붙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주…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