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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88화 (488/1,064)

488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군터가 시간을 신경 썼던 것은 은신처에 들어오고 처음 이틀 정도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해가 뜨든 달이 뜨든 개의치 않았다. 그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때는 수하들이 식사를 내올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 식사마저도 하루에 한 번이었다. 숨어있는 처지에 풍족하게 식사를 할 처지도 아니었고, 군터는 최소한의 식사만으로도 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를 그의 능력 중 하나였다.

"장군. 조금 더 드시지요."

"괜찮다."

그의 수하들은 군터가 허기진 병사들과 함께하기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군터는 그들의 착각을 굳이 나서서 바로잡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군터는 동굴 깊숙한 곳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보일지, 안 보일지 알 수 없는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 그러면서도 최대한의 집중력을 유지해야 했다.

이전에 한 번 해본 적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도 훨씬 더 어려웠다. 육신에 기운이 넘쳐서였다. 시체처럼 늘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 그의 몸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강건했다. 그렇기에 그의 의식은 육신에 붙들렸고, 마음처럼 내면으로 가라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군터는 그런 어려움에도 기어이 해냈다. 일찍이 한 번, 죽음을 겪은 후에 시체처럼 누워있으면서 끝없이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의 감각을 되살려 영과 육신을 분리시켜 그 자신의 본질을 살폈다.

'떨쳐낼 수 없다.'

그러나 그리했을 때, 군터가 느낀 것은 오직 혼란과 암담함이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음에도, 차분히 관조하여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알 수 없는 것들이 그의 영에 달라붙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치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스며들고 있다는 것.

본질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거부할 수 있다면 거부하고 싶었고, 떨쳐낼 수 있다면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문득 7황자가 했던 충고, 혹은 경고가 떠올랐다. 늘 관조하며, 경계하라던.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으니 이해하는 것은 없이 의심만이 점점 몸집을 키웠다.

"장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심적으로 점점 몰려가던 와중이었기에, 모레인이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는 군터도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모레인. 전황은 어떤가."

"아군이 펠모르가까지 진군했습니다. 덕분에 적은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펠모르가가 함락당하면 놈들의 수도까지는 금방이니까 말입니다. 듣자 하니 주앙 칼 고르가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고도 하더군요."

"끝난 거나 마찬가지군."

"아직은 조금 이를 수도 있겠습니다만…대세는 기울었다고 봐야겠지요."

닥치는 대로 징병하여 급조한 병력은 힘 한 번 못 써보고 대패를 거듭하여 지금은 완전히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결국 울타마란 소레딜이 했던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이다.

"이제 어찌 하시겠습니까. 군대는 코누다이안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돌아가겠다. 부상병들도 그렇고, 재정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예. 모시겠습니다."

군터는 모레인이 이끌고 온 병사들과 함께 코누다이안으로 향했다. 이미 인근 지역까지 제국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터라 그의 귀환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장군."

위글로우에 닿기도 전에 수하들이 그를 마중 나왔다. 군터는 그들과 짤막하게 해후를 나누고 위글로우로 입성했다.

위글로우의 거리는 이제 전투의 흔적을 그럭저럭 지워낸 모습이었다. 시민들의 모습은 여전히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망가진 집들이라든지 그을리고 부서진 성벽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보수가 되어 있었다.

"위글로우는 현재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 출발하는 대부분의 보급대는 위글로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군."

처음부터 그리 될 예정이었다. 동부의 다섯 영지를 점령하고 그를 기점 삼아 바크렌 전역을 탈환한다는 것은 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짜놓은 대전략이었으니.

"따로 하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호닝거와 술사들의 상태에 대해 보고해라. 또, 테리브란으로 사람을 보내 모페이브를 불러와라."

"테리브란…에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할렌에게 명을 내린 군터는 본래 영주 관저였던 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말이 휴식이지, 하는 일은 은신처에 숨어 지내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하는 것.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에 어떻게든 의지를 투영하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일과의 대부분이었으며, 간간이 직접 살펴보아야 할 군무를 보는 정도가 예외라면 예외였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부릴 수 있는 여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특별한 임무를 고생 끝에 성공시켰으며, 위글로우에 돌아오기 전까지 야지에서 숨어 지낸 것 등이 있었기에 모든 이들이 군터의 휴식을 이해했다. 심지어 남부 전선 쪽에 나가 있는 울타마란 소레딜조차 사람을 보내 군터의 공을 치하하고 휴식을 권할 정도였다.

"호닝거 공이 깨어났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호닝거가 마침내 의식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의식을 찾고 잃기를 반복한 호닝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다른 듯, 소식을 전하는 수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불러와라. 아니. 내가 가지."

군터가 찾아갔을 때. 호닝거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였다. 아무래도 그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터라 잔뜩 허기가 졌던지, 식사를 마쳤음에도 여전히 허기가 져 보였다.

"장군."

"몸은 좀 괜찮은가."

"염려해주신 덕에…이제는 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 외관상 크게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자네를 비롯해서 다른 술사들 역시 모두 비슷한 증상을 앓았음을 알고 있나?"

"예. 그렇겠지요."

"짐작하고 있는 바라도 있나."

"그 전에…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호닝거가 군터를 보며 물었다.

"장군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쓰러진 것은 자네와 자네의 수하들 뿐이었네."

무슨 의미로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군터는 자연스럽게 호닝거에게 거짓을 말했다. 그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닝거는 울타마란 소레딜이 붙여준 사람이었으나, 사실 황자의 사람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을 경우, 그 이야기는 필시 황자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리 되어서는 안 되지.'

황자를 섬기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황자는 언제든 그의 목을 노릴 수 있는 자였다.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비인(非人), 특히 신에게 품고 있는 증오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군터의 앞에서도 그가 신에게 먹힌다면 죽여버리겠노라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그것을 빤히 아는데 그에게 의심을 살 구실을 줄 수는 없다. 아직 뭐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장군께서 '그것'에 창을 날리신 순간. 신살(神殺)의 여파로 기가 폭주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를 비롯한 술사들은 기감이 민감하게 발달했기에 그 여파에 보다 강하게 노출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그런가."

짐작했던 바 중 하나였으나, 군터가 바라는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닝거는 그 이상 말할 의향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더 묻기 위해서는 그 역시 더 많은 것을 털어놓아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황자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상, 호닝거에게 그 이상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 임무에서 자네의 공이 컸다. 잊지 않고 전하께 아뢰도록 하지."

"과찬이십니다. 장군과 장군 휘하의 장졸들의 힘이 아니었던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의식을 찾았다지만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는 않았을 터. 편히 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호닝거를 보고 나서는 길. 군터는 그의 뒤를 따르던 할렌에게 넌지시 말했다.

"호닝거를 비롯하여…그 휘하의 술사들을 은밀히 감시해라."

"예? 아…알겠습니다."

할렌은 살짝 당황한 듯했으나 별달리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

군터가 위글로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도 전황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남부는 잠잠하다지만 북부와 서부의 전선에서는 하루 건너 하루 꼴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고, 특히 서부 쪽으로 나아간 군대는 펠모르가를 점령하기 위해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다.

"펠모르가를 점령했다 합니다."

공격을 개시했다는 보고를 받고서 며칠 지나지 않아 낭보가 날아들었다. 펠모르가를 지키던 적장을 참살하고 수비군을 궤멸시켰다는 소식이었다.

"펠모르가를 손에 넣었으니…이제 정말 배나시드까지는 금방이겠군요."

배나시드라 부르는 이도 있고, 살마드라 부르는 이도 있었으나 그 의미는 같았다.

베이고르의 수도. 적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증원이 필요하겠군."

"아마도 그렇겠지요."

펠모르가까지는 손쉽게 손에 넣었다지만, 거기서 배나시드까지 나아가려면 아무래도 힘이 조금 부족할 것이다. 왕은 이미 다른 곳을 빠져나갔다고 해도 수도의 의미가 있으니 적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필사적으로 맞설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곧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도 증원병을 요청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군터가 이끄는 군대는 여전히 코누다이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거점을 지킨다는 명목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군터가 이끌고 온 파헨델의 군대가 그의 직속 군대였기에 군터의 명 없이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울타마란 소레딜의 입장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진작 코누다이안에 주둔한 군대를 전선에 투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실 참인지."

"요청이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 허나, 거부할 명분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군터는 그리 답했으나, 예상과 달리 울타마란 소레딜은 증원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전령을 보내 은밀히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

군터는 전령이 전한 울타마란 소레딜의 친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담담하던 그의 눈이 이채를 띤 것은, 서신의 본론을 읽기 시작함과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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