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하이윈즈 백작. 그대 정도 되는 이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군."
"놀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야지요."
정계에서 행사하는 유력 인사치고는 젊은 나이라지만, 하이윈즈 백작의 말솜씨나 속내는 노회한 정객들 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독심이 있는 자.'
리에론 공작은 그에 대해 그리 평가했다. 그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십 년이 넘는 세월에 묻어 내던질 수 있는 자는 결코 흔치 않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그렇기에 리에론 공작은 방심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적의 군세가 펠모르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펠모르가가 뚫리면 왕도로의 길이 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음."
"허나 현재 북동부의 전선에서는 따로 병력을 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하여 각하께서 펠모르가로 원군을 파병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전하의 뜻이십니다."
명이 아닌 뜻이라고 말했다. 최대한 이쪽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어휘 선택이다. 뭐, 그래 봐야 껍데기만 다를 뿐이지 내용물은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쪽의 사정도 여의치가 않네. 적이 펠모르가를 노리고 움직인다면 일, 이천 정도를 보내서는 의미도 없을 터."
"남부 전선의 전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 들었습니다만."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북부에서 동부까지의 전선에 비해 남부는 비교적 잠잠한 소강상태였다. 이렇다 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지 벌써 엿새째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불안하지. 이제껏 잠잠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또한 잊고 있는 모양이네만, 울타마란 소레딜은 남부에 주둔해 있네."
"각하께서 고충을 안고 계심은 알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청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십시오. 펠모르가가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왕도까지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왕도를 잃게 되면 그 상징적인 의미를 제하더라도 아국은 심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국의 전역에 적의 발길이 닿게 될 겁니다."
"물론 알고 있네. 허나 난 이것이 적의 노림수라는 생각이 든다네."
"……."
"적의 총대장은 남쪽에 주둔해 있네. 대병력을 이끌고서 언제든 진격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고 있지. 본군이 남쪽에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펠모르가로 향하는 군세는 어쩌면 미끼일 수도 있어. 내가 펠모르가를 구원하기 위해 파병을 한다면, 울타마란 소레딜이 움직였을 때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 자는 폴사도를 급습한 이후로 줄곧 쉬지 않고 움직여왔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이동과 전투를 반복하였으니 그 자도, 그 자의 군세도 모두 지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 한들 이미 엿새를 쉬었지.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더더욱 군사를 돌릴 수가 없네."
"정녕…전하의 뜻을 저버리시겠다는 것입니까?"
평온했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리에론 공작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는가. 허나 나는 전방에 나온 장수로서 전황을 살피지 않을 수 없네. 자네가 지금 내가 한 말을 전하께 전해 올린다면 전하께서도 이 사람의 뜻을 헤아려주실 것이야."
"전하께서는 펠모르가를 구원할 원군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이곳의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하셨을 때 하신 말씀이지. 이제 자네가 돌아가 전하께 지금 나눈 대화를 전해 올린다면 전하께서도 생각을 바꾸실 것이네."
"신하 된 자로서, 어찌 군주의 뜻을 편한 대로 바꾸어 보십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그것이야말로 자네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전선의 상황은 전선에 선 장수가 가장 잘 아는 법. 난 내가 보고 겪은 것을 토대로 판단할 뿐이다. 이 나라와 전하를 위해서. 그 마음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으니, 그런 내가 자네에게 핀잔을 들을 이유는 없다."
"…후회하실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지금으로서는 한 점 후회도 없네. 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있으니."
"전국을 보는 이가 각하 한 분 뿐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내가 아는 것은, 적장이 나흘 거리에 주둔해 있다는 것과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의 상황이 펠모르가보다 더 위급해진다는 것이네."
"알겠습니다. 각하의 뜻, 전하께 전해 올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시세로 하이윈즈 백작이 물러가고 얼마 후. 리에론 공작은 또 한 사람과 독대했다. 그는 인자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는데, 제국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원군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현명하십니다."
"이것으로 그대의 주인은 만족하겠군."
"제 주인뿐 아니라 황자 전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그러길 바라지."
"7황자와 베이고르가 실컷 싸우도록 두십시오. 그러면서 장군께서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시는 겁니다. 적절한 시기에 제 주인께서 군사를 보내시면 그들과 함께 7황자를 몰아내십시오. 그리고 이 땅을 바라눔 전하께 바치시는 겁니다. 그리 하시면 전하께서는 장군의 과오를 깔끔하게 잊어주실 겁니다."
"장군이라."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아국은 영주니 작위니 하는 잡스러운 것들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혹 장군께서 지금 누리시고 있는 것들에 미련을 두고 계신다면…하루 빨리 버리시기 바랍니다."
리에론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만하군."
"오만 보다는…자신감이라고 봐주십시오."
"필요에 의해 잡은 손일 뿐이다."
"살기 위해 잡은 손이지요.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
"제 주인께서 약속하신 것은 장군과 장군 일가의 목숨. 그리고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어떻게 거머쥐고, 무엇을 더 얻느냐는 전적으로 장군에게 달려있습니다."
리에론 공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찌푸린 표정이었으나 뭐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7황자의 군대가 국경을 넘었을 때부터 비극적인 결말은 반쯤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나머지 반까지 확실해진 것은 회색 산에 불길이 올랐을 때였다. 회색 산이 불타고 그곳의 요정들이 자취를 감췄을 때. 리에론 공작은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끝까지 발악하며 싸워봐야 맞닥뜨리게 될 것은 처절한 몰락뿐이다. 7황자에게 항복한다 해도 남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면 7황자가 저토록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왔을 리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일찍이 제국의 장군이었다가 베이고르로 줄을 바꿔 잡은 전력이 있었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배신자에 간적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금 제국에 항복한다면? 무슨 좋은 취급을 받을 수 있겠는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 그를 찾아온 이 중년인은 한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제국의 27황자 바라눔 엘 트라소프.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는 황좌의 전쟁. 그 속에서 제국 서부를 일통하고 막강한 세력을 일궈낸 제국의 황자.
중년인은 그 이름을 꺼냈다. 그러나 그가 27황자의 신하인 것은 또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타라냐드에 속한 자였다.
'자이드라 멕시스.'
그에게 제안을 건넨 자이자, 중년인의 주인. 그는 타라냐드를 손에 쥔 거물이며, 두 황자 사이에서 용감하게 줄타기를 벌이고 있는 야심가였다. 황좌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두 황자가 그의 선택을 기다리며 목을 매고 있다는 소식은 리에론 공작도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결국 바라눔인가.'
두 황자의 세력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을 택해도 이상하지 않으나, 27황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다더니 결국 그 쪽으로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아.'
자이드라 멕시스는 7황자의 전쟁을 망치기를 원했다. 그것을 위해 리에론 공작 자신에게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마치 이 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모든 것을 내다본 것 같은, 치밀하고도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뭐,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제안 자체가, 리에론 공작의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냉정했으며, 강압적이었다. 일개 사자에 불과한 자가 이렇게 대놓고 협박을 해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허나 우습게도, 오히려 그런 거칠 것 없는 태도가 리에론 공작을 안도케 했다.
좋은 말로 구슬리려는 시도도 없다.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투다. 배려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그 고압적인 태도에서 강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그가 나를 속일 이유가 없다.'
속이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아쉬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에론 공작은 확신할 수 있었고, 사자로부터 굴욕적인 말을 들어도 참아 넘길 수 있었다.
"좋아. 난 그대의 말대로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허나 울타마란 소레딜이 움직인다면 어찌 하지?"
"피하십시오. 허나 어차피 장군과 그가 싸우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펠모르가를 손에 넣고 나면 그 다음은 당연히 수도를 노릴 테고, 나아가 주앙 칼 고르를 잡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 본거지에 틀어박혀 얌전히 있는다면 견제는 할지언정, 먼저 나서서 공격을 가하지는 않을 겁니다."
리에론 공작이 고소를 머금었다.
"세상이 나를 비웃겠군. 겁쟁이라고 말이야."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중년인이 마주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그렇다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장군을 욕하는 자들은 용감히 맞서 싸우다 죽을 테고, 숨어서 비웃는 자들은 감히 장군의 앞에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이 전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고 나면 장군은 제국의 장수로서, 명문가 리에론의 가주로서 행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장군이 하시기에 따라, 어쩌면 그 이상을 얻으실 수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세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실 필요 없습니다. 본래 가진 것 없고 할 것 없는 자들이 입으로만 떠드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별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위로를 하려고 한 말도 아니었겠지만.
'처량한 신세로군.'
살기 위해서, 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시키면서도, 리에론 공작은 어쩔 수 없이 차오르는 자괴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반드레온을 불러라."
"예."
사자가 물러가고, 그는 반드레온 모렌스 자작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