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86화 (486/1,064)

486화

"괜찮으냐."

"버틸만합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짐짓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은 하지만, 살라스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잘려나간 왼 팔에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지만, 그럼에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여전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팔은…돌아가는 대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마."

"괜찮습니다. 어차피 검을 쥐는 손은 멀쩡하니까 말입니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검을 팔 하나만으로 휘두르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외팔이가 된다는 것은 삶 전체에 있어 크나큰 장애다. 그것을 살라스가 모를 리 없다. 아무리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해도 군터는 그가 상심에 젖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해가 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살라스도 살라스지만, 병사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 멀쩡한 병사들은 수십에 불과하고, 생명이 위태롭거나 거동이 불편한 부상자들까지 다 합쳐도 백 명이 조금 넘는다. 임무는 성공했지만, 오백 정예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고, 자책하지도 않았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간밤에 아홉이 더 숨을 거뒀습니다."

할렌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그 역시 살라스만큼은 아니어도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장교임에도 병사들보다 앞장 서서 싸운 대가로 크고 작은 부상을 적잖이 입은 탓이었다.

"아홉……."

이곳에 있는 동안, 돌아가는 동안 얼마나 더 많은 부상병들이 숨을 거두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병사들이 아니라 장교들 가운데에서 사망자가 더 나올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냐."

"버틸만합니다. 살라스님께서도 꿋꿋하신데, 소관이 약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할렌이 입은 부상도 살라스에 못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어도 은근히 풍기는 피 냄새가 그를 증명한다.

"쉬어라. 어차피 당분간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테니, 특별히 할 일은 없다."

"예."

군터는 동굴 안쪽에 그를 위해 마련된 조약한 천막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그의 옆에는 검은 창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군.'

회색 산에서 일전을 벌인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럼에도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하려 하면 그때 들었던 괴성이 선명하게 그의 심령을 뒤흔들었다.

상처를 입었다. 몸에 난 상처는 고통을 참으면 그만이지만 영육에 난 상처는 그렇게 해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가볍게 휩쓸렸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니.'

그의 창은 두 존재를 꿰뚫었다. 하나가 아닌 둘. 그것을 군터는 괴성을 듣고, 거친 흐름에 휩쓸리던 순간에야 깨달았다.

회색 나무처럼 보였던 것. 요정들이 왕이라 불렀던 그것은 또 다른 하나를 끌어 안고, 아니 억제하고 있었다.

'죽은 신.'

요정들의 대장이 했던 경고대로라면 아마 그것이 죽은 신이었을 것이다.

요정의 왕과 죽은 신. 그들은 둘이었으며, 또한 하나였다. 불완전한 하나라고 해야 할까.

'뭐가 되었든, 이제는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하나든 둘이든, 왕이든 신이든 상관 없다. 모두 그의 창에 찔려 사라졌으니.

하지만 그들이 낸 상처가 남았다. 이런 상처는 처음 입어보는 것이었기에, 군터는 생소한 괴로움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이게 뭐지?'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혹 하나가 달라붙은 것처럼, 그에게 달라붙은 정체 모를 것은 점점 더 그에게 눌러 붙고 있었다.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지만, 그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기괴한 감각을 모른 척 하거나, 보다 더 생생히 집중하여 느끼는 것뿐이었다.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호닝거와 술사들이 모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산에서 마지막 순간. 그 '괴성'에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약간의 현기증 정도만을 느낀 병사들과는 달리, 술사들은 예외 없이 전부 의식을 잃었다. 오래지 않아 의식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에 이르러 그들은 마치 폐인처럼 변해버렸다. 그 몰골이 얼마나 초라한지, 여태 죽은 자가 없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의아할 정도였다호닝거가 몸을 회복한다면 그에게 이 상황에 대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그가 언제쯤 회복할 수 있을지, 회복은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돌아가야 한다.'

더 많은 병사들이 숨을 거두기 전에, 정체 모를 것이 그의 안에서 더 들러붙기 전에.

허나 그러려고 해도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경솔하게 움직였다가 적의 추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테니.

"적에게 발각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여 움직여라."

군터는 상태가 괜찮은 병사 몇을 추려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게끔 했다. 물론 그래 봐야 그들이 은신해 있는 주변과 회색 산 인근을 정찰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 그들의 상황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정찰을 보낸 병사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꽤나 괜찮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인근에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회색 산 주변으로는 병력이 조금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제대로 된 놈들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본 느낌이었습니다."

"수고했다."

정찰병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러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정찰병들이 돌아오고 다시 사흘이 지났을 때는 본군으로 보냈던 전령이 돌아왔다.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 진군을 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래 걸리지 않겠군."

여유만만했던 노장이 입만 산 얼간이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아군이 베이고르를 밀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베이고르군이 얼마나 오합지졸인지는 회색 산까지 잠입하며 충분히 확인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군터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제국군은 폴사도를 점령하고서 곧이어 베이고르의 4만 대군을 단 한 번의 전투로 크게 패퇴시켰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서진을 거듭하여 세 개 영지를 추가로 점령했다. 그 동안 베이고르군은 단 한 차례의 작은 승리도 거두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리기만을 반복했다.

"듣자 하니 적은 두 무리로 나뉜 모양입니다."

국왕 주앙 칼 고르를 위시한 세력과 리에론 공작을 필두로 한 세력. 베이고르의 힘은 그 둘로 나뉘었고, 각자 전선을 형성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울타마란 소레딜은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순수하게 그들을 비웃었다. 아무래도 저 얼간이들은 아직까지도 착각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지독한 오만이던가.

"어찌 보면 영주라는 족속들을 둔 대가일지도 모르겠군."

영주라는 이들이 하나하나가 작은 왕과 같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익에 민감하여, 합당한 대가를 약속하지 않는다면 왕에게도 등을 돌린다. 그렇게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탐욕의 덩어리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서 세력을 형성하니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되었음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이쪽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왕을 따르는 세력도, 리에론 공작이라는 자를 따르는 세력도 자기들의 입장에서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곳에 포진했다. 지엽적인 시야다. 전국을 보고 움직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장군!"

"무슨 일인가."

"전선으로 향하던 보급대가 습격을 받았다 합니다. 아마도……."

전선으로 움직이던 보급대라 하면 초기에 점령한 다섯 영지의 징발 물자를 나르는 병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습격을 받았다? 보고를 듣자마자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저항군인가. 차라리 놈들이 정규군보다 더 용맹하군 그래."

"어찌 할까요."

"잡음은 용납할 수 없다. 뿌리까지 뽑아라. 찾을 수 없다면 모두 없애버려. 어차피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후방의 안전과 서북의 진격로 뿐이다."

반군 놈들에다가 초원의 야만인까지 뒤섞였다. 이제 와서는 바크렌이라고 하기도 애매해진 것이다. 제국의 백성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감히 고개도 들 수 없도록 짓밟아버리는 것이 낫다.

"차라리 잘 되었어. 이 참에 제대로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좋겠지."

울타마란 소레딜은 병사 천 명을 보내어 보급대의 습격이 일어난 인근 지역을 모두 뒤엎었다. 일곱 개 마을이 통째로 불타올랐다. 잔혹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점령지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동시에 저항군의 활동 역시 소극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일단은 잠잠해졌지만…이것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필시 아군에게 반감을 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반감은 피를 보기 전부터 충분히 품고 있었을 것이야. 그러니 선동에 넘어가 창을 쥐었던 게지."

"괜찮겠습니까?"

몇몇 무관들이 우려를 표했다. 전쟁이 계속 이어지고 점령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직접 병력을 주둔시키며 관리할 수 있는 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즉, 통제력이 약해진다는 소리다. 그때가 되어 지금 억눌러놓은 반감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마을 몇 개를 불태우는 정도로는 제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나 울타마란 소레딜은 수하들의 우려를 여유로운 웃음으로 일축했다. 그에 수하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공포는 최고의 통치 수단이니까. 무기라고도 볼 수 있지. 그 어떤 인간이든지 공포 앞에서는 납작 엎드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민병들에 의해 패퇴한 정복군의 사례가 많지 않습니까."

"충분한 공포를 강요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충분한 힘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야기야. 저 야지에서 살아가는 짐승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자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강한 힘을 가졌을 때는 감히 사자의 주변에 잡스러운 것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지. 허나 그 힘이 쇠하여 전과 같지 않아지면 전에는 냄새만 맡고도 도망치던 것들이 용감하게 덤벼든다."

"장군의 말씀은……."

"아군이 반군 놈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하는 한, 점령지의 불온한 것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몇몇 겁을 상실한 것들이 깃발을 들어올린다 해도 백성들이 그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야. 그들은 제국을, 아군을 두려워할 것이다. 맞서면 처참히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여유로우며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