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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85화 (485/1,064)

485화

회색 석상이 크게 들썩였다. 땅이 뒤집히면서 지면 아래에 박혀있던 부분이 일부 드러났다.

'뿌리?'

그것은 나무의 뿌리와 닮아 있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색이 빛 바랜 회색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우득! 우드득!

석상, 어쩌면 나무일지도 모르는 그것이 꿈틀거렸다. 뿌리가 드러나면서 기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군터는 그것이 움직였다고 확신했다.

[안 돼.]

요정들이 눈앞의 적들까지 내버려두고 석상, 나무. 혹은 '왕'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기세가 제법 흉흉하여, 군터는 한 발자국 물러나 휘하 병사들을 살폈다.

오백이었던 병사들 중 지금도 두 발로 서 있는 이들은 고작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그마저도 부상을 입은 자들이 태반 이상은 되어 보였다.

'처참하군.'

방심하지 않았고, 상대를 얕보지도 않았다. 다만 적의 전력이 예상했던 것을 크게 상회했을 뿐.

"장군."

"호닝거."

기진맥진한 호닝거가 힘겹게 다가왔다.

"자네의 활약이 크다. 돌아가게 되면 크게 치하하도록 하지."

"돌아간다면, 말이지요."

"그래."

전황은 조금 전에 비해 상당히 희망적이었다. 요정들은 기운 나무 앞에 모여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덕분에 벼랑 끝까지 몰렸던 아군은 숨 돌릴 틈을 얻었다.

"왜 저렇게 요란이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저 석…아니, 나무는 이 땅의 심장입니다."

"심장인지는 모르겠으나, 놈들이 저 나무를 왕이라 부르긴 하더군."

"왕? 아니, 그보다 저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이십니까?"

"언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아무튼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나무는 여전히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모양새가 마치 애벌레, 혹은 뱀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게 뭐라고 생각하나."

"요정들이 저것을 왕이라 했다면 왕이 맞을 것입니다."

"내가 아는 왕과 저것들이 말하는 왕이 다른가보군."

"저 역시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뭔가 이상하기는 하군요. 저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난잡한 느낌입니다. 무언가 뒤섞인 듯한……."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호닝거의 말을 듣고 나니 기괴하게만 느껴지던 회색 나무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뒤섞였다라.'

그 말을 듣고서 집중하여 기감을 돋우니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느껴졌다. 호닝거의 말처럼, 회색 나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상당히 복잡했다. 하나의 존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콰드득! 우득!

이제 거대한 나무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통이 이리저리 뒤틀렸고, 요정들은 그런 나무 주변을 에워싸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물러가라.]

군터와 그의 병사들이 숨을 돌리면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요정들의 동요를 지켜보고 있는데, 군터와 수 차례 부딪쳤던 요정들의 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베이고르와 제국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다. 그러니 물러가라.]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설득력이 없지.]

그의 제안에 군터는 단호히 거절했다. 말한 것처럼 이미 피를 너무 많이 보기도 했거니와, 적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황이 썩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

느껴지는 기세부터가 조금 전과는 달랐다. 나무를 둘러싸다시피 하고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께서 통제권을 잃으신다면 죽은 신이 풀려난다. 그리 되면 이 땅에 재앙이 일어난다. 너희 제국 역시 그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신? 재앙?'

자칫 잘못하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듯하다. 확실히, 회색 나무가 더 크게 꿈틀댈수록 뭔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점점 더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군터는 요정 대장의 다급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재앙이든 뭐든, 이 자리에서 모두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신을 잃은 대지에 미래는 없다.]

군터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이곳에 와서 들은 소리들 중 가장 재미없고 한심한 헛소리였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신에게 기댄 적은 없다.]

군터가 창을 들었다. 한껏 뒤로 젖혔던 팔을 힘차게 끌어당겼다.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검은 창이 화살보다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한 줄기 가느다란 선이 되어 날아간 창은 요정들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회색 나무에 박혀 들어갔다.

오오오오-!

비명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떨쳐지는 거친 울림을, 군터는 그렇게 들었다.

거대한 나무가 이리저리 비틀리더니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요정들이 절규했고, 병사들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오직 군터만이 창을 던진 자세 그대로 변화해가는 회색 나무를 끝까지 응시했다.

*

다섯 영지를 집어삼키고 전선을 구축한 제국군은 그들 기준으로 서쪽과 남쪽 두 곳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나날이 늘어난 베이고르의 병력은 이제 십만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는데, 제국군은 병력의 규모에서 간신히 그 전반에 달했다.

그러나 배 이상의 적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울타마란 소레딜은 여유로웠다. 전황과는 상관 없이, 그의 너무 과한 것 같은 여유 때문에 휘하의 제장들이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

"아무리 머릿수가 많다 한들 어차피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아군이 본격적으로 들이치면 놈들은 단번에 무너져 내릴 것이야."

"허면 장군께서는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휘하 무관들의 물음에 그는 짤막하게 답했다.

"승전보."

그의 뜻을 이해한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도 머지 않아 저절로 '승전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역시…해냈군."

"병력의 피해가 막심하여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때문에 현재 장군께서는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곳에 병사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이해한다. 무리하여 돌아오려다가 적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안 되지. 곧 전선을 밀기 시작할 터이니 귀환 시기는 기회를 보아 결정하라 해라."

"예."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고생을 한 것 같은 전령을 쉬게 하고, 울타마란 소레딜은 간만에 모든 무관들을 소집했다. 이미 소식을 들은 자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이 지휘관 회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눈치채고 있었다.

"오래들 기다렸다."

그 한 마디로 5만의 대 병력이 침묵을 깨고 움직였다. 아힌키우스를 기점으로 한 서쪽의 전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해 남쪽의 강을 건너 폴사도를 급습했다. 야음을 틈탄 기습이었다. 강 건너에 진지까지 갖추고 경계를 서던 베이고르의 군대는 강을 건너 기습을 가해온 제국군을 상대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무료한 대치가 계속 되면서 긴장이 풀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머릿수라는 것은 최면과도 같지. 약해빠진 것들도 일단 자기들의 머릿수가 좀 된다 싶으면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기거든."

더군다나 자신들의 머릿수는 나날이 늘어가는데, 쳐들어왔다는 제국군은 꼼짝도 안 하고 강 건너에 박혀서 침묵만 하고 있으니 없던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모두 멍청한 착각에 지나지 않지만.

"정보를 흘려라. 아군이 3만의 병사로 강을 건넜다고 말이다."

울타마란 소레딜은 서쪽의 적군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제국군이 도하하여 폴사도를 급습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단지 그 수를 세 배 불렸을 뿐이다.

제국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베이고르군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폴사도데 대한 지원에 나서는 대신 대규모 병력이 빠져나간 제국군의 본진을 치기 위해 움직였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3만은 제국군 전력의 반 이상이었으니, 그만한 병력이 빠져나갔다면 그만큼 본진의 방비가 허술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울타마란 소레딜의 계산 안이었다.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베이고르의 5만 군세는 미리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던 제국군의 거센 공세에 맞닥뜨렸고, 상당한 피해를 입은 채 발길을 멈춰야 했다.

"추격은 절대 금물이다. 적의 섬멸은 우리의 몫이 아니야. 발을 묶는 정도면 충분해."

시어문드는 불에 그슬려 검게 변한 베이고르의 국기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얼마 전까지 그는 이 깃발 아래서 싸웠었다. 비록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으나, 그래도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 하기는 했다.

"추격을 만류하신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공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수급을 좀 더 챙긴다고 해서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어차피 진짜 싸움은 이곳과는 상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욕심만 앞서서 괜한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다."

의욕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지만 보다 힘 있게 나설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에 휩쓸려서는 곤란하다. 의욕이 과해지면 욕심이 되고, 욕심은 때때로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리 되면 이성은 흐려지고, 실수를 할 위험이 늘어난다.

"큰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실수를 하지 않으면 패할 위험이 적어지거든."

전승보다는 불패. 시어문드가 무장으로서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전장에 있는 한 공은 언제든 세울 수 있다. 비록 대공을 세울 수 없을지는 몰라도, 작은 공이 계속 쌓이다 보면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기 마련.

그러니 그는 여유로웠으며, 그의 눈은 눈 앞의 전장이 아니라 전국을 통찰했다.

'회색 산이 불탔다고.'

울타마란 소레딜이 움직인 것으로 보아 군터가 맡은 임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것이 분명하다. 허나 회색 산에서 불길이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벌써 보름이 넘게 지났는데도 군터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의문이었다.

'돌아올 만한 상황이 되지 않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회색 산에서 탈출했다고 해도 그들이 있는 곳은 베이고르의 영토다.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나오는 것도 쉽지는 않을 터.

'설마하니…장군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다. 개인적이 친분도 친분이지만, 이번 전쟁에서 제국으로 귀의한 시어문드의 입장에서 군터는 그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줄이었다.

'괜찮겠지.'

이제껏 본 모든 이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 닥쳤다 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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