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빌어먹을 새끼!"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 아드리안은 또 다시 바위로 스며들려던 적을 끝까지 따라가 기어이 그 목을 잘라냈다. 하반신은 바위 속으로 스며들고, 상반신마저도 반쯤 바위와 하나가 된 요정의 목이 싹둑 잘려나가니 상아색 피부 위로 옅은 녹색 피가 흘렀다.
"봐라! 해괴하기는 하지만, 놈들도 피를 흘린다! 목을 잘리면 죽는단 말이다! 이놈들은 절대 무슨 유령 같은 것이 아니야!"
아드리안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면서 표정 없는 머리통을 보란 듯 흔들었다.
목이 잘린 것은 그의 손에 들린 머리일 터인데, 일그러진 것은 오히려 그 머리를 쥔 아드리안이었다. 그의 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갑옷은 군데군데가 깨지거나 뜯어졌고, 선 자세는 왠지 모르게 엉거주춤 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아직까지 두 발로 서 있는 병사들 중 상당수가 그와 별 다르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움직여! 발을 멈추지 마!"
이미 전투는 난전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처음에 갖췄던 진형은 다 무너졌다. 적에게 밀려 무너진 것이 아니라 제국군 스스로가 먼저 포기했다. 그들이 구사하는 진형이나 대열 같은 것이 요정들을 상대로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였다.
"탁 트인 곳으로 가라! 나무, 바위 같은 것들은 무조건 피해!"
얼마나 피를 흘렸을까. 이제는 그들도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적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조금씩 체득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두 배에 가까웠던 수의 우위를 상실한 뒤였다. 전세는 이미 굳어졌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장교들의 목소리에도 점점 힘이 사라져갔다.
서걱!
돌을 대충 부수거나, 거기서 좀 더 깎아 만든 것 같은 석검. 갑옷은 물론이고, 맨 살이라도 제대로 벨 수 있을까 싶은 투박한 검이 갑옷과 그 안의 살과 뼈까지 깔끔하게 베어냈다. 꽉 쥔 주먹이 땅에 떨어지고, 동시에 쭉 뻗은 칼 끝이 앞으로 기운 요정의 목을 찔렀다.
푸욱!
세 명째. 마지막까지 숨통을 조여왔던 적이 드디어 쓰러졌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으음."
살라스는 목을 찌른 검을 회수하자마자 땅을 찍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잘려나간 손목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피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감각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허억…허억……."
한 순간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졌다면. 혹은 중간에 부딪친 칼이 운 좋게 옆으로 튀지 않았다면, 그래서 측면에서 달려들던 적에게 반응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어졌다면 지금 쓰러져 있는 것은 그였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더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군.'
쓰러지지 않았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의 싸움은 여기까지였다. 억지로 서 있는 것도 한계였으니.
털썩!
검에 기댄 채로, 살라스의 몸이 힘 없이 균형을 잃었다.
*
"호닝거!"
할렌의 붉은 얼굴에 광기가 돌았다. 또 한 명. 아끼던 수하가 창인지 꼬챙이인지 모를 것에 몸이 통째로 꿰이자 그는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불을! 아까보다 더 큰 불을 지르시오! 이 개 같은 산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거요!"
호닝거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말은 쉽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일 것 같은가. 아무리 술법에 대해 무지하다 해도 그렇지, 저런 말을 어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을까.
'그만큼 답답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모운의 불'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옅어졌던 안개가 다시금 짙어져 가고, 요정들의 움직임은 눈으로조차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쾌속해졌다. 전투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체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땅이 우리를 거부하고 있다.'
회색 산의 의지가 속박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호닝거 자신이 기감이 극도로 발달한 술사였기 때문에 그 거대한 압박감에 더욱 숨이 막혀왔다.
'축은…저 석상이다.'
불규칙하게 흐르는 흐름 자체가 아닌 이상, 모든 것에는 중심이 있다. 따라서 이 산을 가득 채운 숨 막히는 기운에도 중심은 있으며, 그 중심축은 틀림없이 저 기괴한 형태의 석상이었다.
'저것을 없애야 해.'
아마도 저 석상은 산의 심장이며 동시에 요정들을 지탱하는 힘의 근원일 터.
'군터 장군도 그것을 알고 있다.'
석상의 바로 앞에서는 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군터를 둘러싼 요정들의 수가 십여 명에 달했고, 그와 비슷한 수의 요정들이 이미 쓰러져 있는 상황.
군터는 석상에 다가가려 했고, 요정들을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으려 들었다.
'이쪽의 상황과는 정반대로군.'
버티기에 급급한 병사들과 달리, 군터는 홀로 십여 명의 요정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터 쪽의 상황이 낙관적인 것은 또 아니었다. 밀어붙이고는 있으나, 그 역시 석상 쪽으로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정들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고, 그들의 치열한 저항은 군터로서도 쉬이 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저곳에 힘을 보태야 한다.'
살 길은, 승리할 길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가 빠진다면 가뜩이나 밀리고 있는 병사들은 더 빠르게 무너질 테지만, 어차피 이대로 계속 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병사들은 점점 지치고 상처 입어 쓰러질 테고, 요정들은 석상 앞쪽으로 점점 더 지원을 갈 것이다.
'그리 되면 다 끝장이다.'
호닝거는 연구실에 박혀 술법만 주구장창 연마한 책상머리 술사가 아니었다. 그는 정적인 연구보다는 오히려 실전을 통해 술법을 연마한, 그야말로 전투 술사라는 말에 더 어울릴 수 없을 정도의 실전파였다. 술법만이 아니라 무술까지, 그것도 상당한 수준까지 연마한 그는 이제껏 열 번이 넘는 실제 전투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 같이 쉽지 않은 전투들뿐이었으니, 그는 전세를 파악하는 데 있어 여느 무관들 못지 않았다.
"아드리안 공!"
"말하시오!"
"병사들을 이끌고 나를 지켜주시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설마하니 이 마당에 자기 한 목숨 살려달라고 그런 요청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비록 함께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아드리안은 호닝거에 대해 그 정도의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한심한 술사 나부랭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내라는 것은 그와 단 며칠만 함께 해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뭔가 수가 있는 거겠지.'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그저 악착같이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도도 없는 상황. 뭐라도 하겠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편이 낫다. 하지만 문제는, 호닝거가 뭔가를 하는 동안 그를 지키기 위한 손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병사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각자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그런 그들을 통제하기란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할렌!"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아드리안이 할렌과 병사 몇을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뭐냐!"
"호닝거가 뭔가 해볼 모양이다! 그를 지켜야 해!"
아드리안과 할렌. 두 사람은 평소 사사건건 으르렁대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긴밀하게 보조를 맞췄다. 그들은 호닝거와 서너 명의 술사들을 중심으로 뭉쳐 사방에서 덤벼드는 요정들을 상대해 나갔다. 부상도 부상이고, 체력도 온전치 않은 상태였지만 마지막 한 줌 남은 힘까지 다 짜낸다는 각오로 전력을 다하니 요정들의 맹공에도 그들은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오!"
"알고 있소! 잠시만, 잠시면 되오!"
호닝거가 왼쪽 팔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가죽으로 둘둘 감싼 팔이 드러났는데, 그는 팔뚝을 감은 가죽을 뜯어내다시피 거칠게 풀어내 펼쳤다.
거뭇한 가죽에는 희끄무레한 선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얼핏 보면 낙서 같고, 조금 더 신경 써서 보면 그림 같기도 한 그것은 사실 무엇도 아닌 글자였다. 그것도 대충 끄적거린 것이 아니라 호닝거가 직접 비밀스러운 염료를 써서 공들여 쓴 '힘의 문자'였다.
"인바카의 발굽."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뾰족한 쐐기를 꺼내 쥐고, 그것으로 가죽을 찔렀다. 찌르고 또 찔렀다.
"복수의 상흔."
가죽은 금방 너덜너덜해졌다. 더 이상은 찌를 곳도 없어 보일 즈음, 호닝거는 쐐기를 힘껏 쥐었다. 그러자 단단해 보였던 쐐기가 모래처럼 변해 손아귀 사이로 흘렀다. 흘러내린 쐐기 가루는 찢긴 가죽 위로 쌓였다.
"호닝거! 아직인가!"
"거의 다 됐소!"
눈 먼 화살 한 대가 무릎 옆을 스쳤다. 호닝거는 이를 악 물고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됐어! 모두 물러나시오!"
쐐기 가루가 가죽 위에 쌓이고, 가죽마저 가늘게 바스러져 형태를 잃었다. 모래더미처럼 변한 가죽과 쐐기는 땅을 짚은 호닝거의 두 손을 뒤덮었다.
"모두 물러나!"
호닝거가 악을 썼다. 그만큼 거칠고 다급한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드리안과 할렌을 비롯하여 병사들은 어떤 상황 설명도 듣지 못했으나 그의 지시에 즉각 몸을 피했다.
"장군! 피하십시오!"
얼굴에 잔뜩 핏대가 선 채 외친 호닝거.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요정들에 둘러싸여 창을 휘두르던 군터가 순간 움찔했다.
콰드드드!
호닝거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고, 그의 두 팔이 꿈틀거렸다. 그는 힘껏 손을 들었으나 땅을 파고 든 손은 그 속에서 작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이 작게 움직였을 때, 그가 바라보던 땅은 거칠게 균열을 일으켰다.
[안 돼.]
호닝거가 무언가를 할 거라는 것은 알았어도, 그게 정확히 무엇일지는 감도 잡지 못하던 군터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땅이 흔들리고, 시종일관 차분하던 요정들의 대장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기 힘든 호기임을 알아차렸다.
[막아라.]
그를 견제하던 요정들이 일제히 발을 뺐다. 군터는 곧바로 그들을 따라붙었다.
콰지직!
호닝거에게서 이어진 땅의 균열이 빠르게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접근해왔다. 요정들은 저마다 무기를 땅에 박아 넣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그들의 시도는 군터가 곧장 그들을 따라붙으며 창을 휘둘러대는 통에 성공하지 못했다.
[왕을 지켜라.]
'왕이라고.'
요정들의 대장이 그의 동족들에게 전하는 의성은 군터에게도 들렸다. 때문에 군터는 그들이 저 석상을 가리켜 '왕'이라 칭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술 수 있는 건가.'
요정들이 호닝거의 술법에 심대한 위협을 느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땅이 조금 파이고 흔들리는 것만으로 저 거대한 석상을 박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석상이 발하는 존재감은 그만큼 거대했다. 호닝거의 술법이 발하는 기운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하지만 어찌 되었든, 군터는 최선을 다해 요정들을 방해했다. 요정들의 대장이 기어이 그의 석검을 땅에 박았으나, 코앞까지 다가온 균열은 조금 주춤했을 뿐 뻗어나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쿠웅!
기어이 균열은 석상에까지 가 닿았다. 거대한 회색 형체가 순간 균형을 잃었다.
쾅!
무언가 부서지기라도 했을까. 흙먼지가 피어 오르고, 지축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