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여기저기 불이 붙었음에도 거뭇한 연기 한 줄기 피어 오르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지도,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도 않았다. 들러붙은 그 자리가 자신들의 자리라도 되는 양, 그저 처음 붙은 그곳에서 불그스름하게 타올랐다.
"장군! 적이 도망칩니다!"
"쫓지 마라."
안개가 걷히고 모습이 훤히 드러난 요정들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를 보며 휘하 장교들이 다급히 외쳤지만 군터는 단호하게 추격을 금지시켰다.
"호닝거. 계속 가겠다. 문제 없겠지?"
"물론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말씀 드렸듯, 불이 타오를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저기 들러붙은 불들이 호닝거와 술사들의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땅에서 땅으로, 몇몇은 아무것도 태울 것 없는 허공에 덩그러니 떠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길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동한다!"
불들의 호위를 받으며, 군터와 병사들은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누구도 그들에게 어디로 가야 한다 알려주지 않았지만 군터는 능숙하게 길을 잡았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쪽인 것 같습니다."
"알고 있다."
호닝거의 조언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회색 산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묵직하게 뛰고 있는 이 산의, 이 땅의 심장 소리를.
"이제 곧 당도한다!"
불빛에 안개가 걷혔다. 한참 동안 이어진 오르막길이 끝나고 조금은 아래로 내려갔을까. 분지 지형의 탁 트인 땅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저게 뭐지……?"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군터조차도 그 거대한 형상에 잠시 눈길을 빼앗겨, 그 주변에 뭉쳐 있는 요정들은 뒤늦게 보았을 정도였다.
거대한 석상. 아니면 나무. 그러나 나무라고 하기에는 돌덩이 같은 회색이 너무나 이질적이며, 나무와 같은 몸통 사이로 보이는 또 다른 형체가 다른 의심을 품게 했다. 그러나.
'저것이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그가 이 산에서 느꼈던 하나의 울림이었다. 저것이야말로 이 산의, 이 땅의 심장이다. 또한.
'신.'
어째서 낯선 형태의 기괴한 것에서 익숙한 느낌이 묻어나는가. 짐작도 하기 힘들지만, 어찌 되었든 저것을 없애야 한다. '저것' 주변을 지키고 있는 요정들만 봐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쉬이 알 수 있다.
"그래서…그 요정왕이라는 놈은 어떤 놈입니까?"
"아마도……."
호닝거가 회색 나무, 아니면 거대한 돌덩이를 가리켰다.
"저것인 듯합니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저것은 전혀 요정, 아니 생명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눈을 믿지 마십시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제한적입니다."
할렌을 비롯한 무관들이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호닝거가 가리킨 거대한 회색 형체를 보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적들을 해치우고, 저 나무인지 뭔지 모를 것을 불태우든 깨부수든 하면 된다."
군터가 혼란스러워 하는 병사들을 담담한 말로 다잡았다.
'틀림없이, 저것은 신이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겉으로 뱉은 말처럼 간단하지도, 담담하지도 않았다.
그는 '저것'의 외형과는 상관없이, '저것'이 신이거나 그와 비슷한 존재임을 확신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닝거의 말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꽤나 제한적이기에 그는 눈보다 자신의 감각을 더 신뢰했다.
"방심하지 마라. 눈을 믿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지는 마라.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군터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적들을 향해 걸어나갔다. 진형을 갖춘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거대한 회색 형체 앞에 집결하다시피 한 요정들은 군터와 그의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자여. 우리에게 무슨 용무지?]
성큼성큼 이어지던 군터의 걸음이 멈췄다. 가라앉은 그의 눈이 요정들을 훑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 큰 키의 요정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더 툭 튀어나온 하나를 눈에 담았다.
[나를 말함인가?]
[그렇다.]
[나에 대해 무엇을 알지?]
[보이는 만큼은 알고 있다. 이제 그대가 답할 차례인 것 같군.]
그와 의성으로 대화를 나눌수록 그가 범상치 않은 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 별로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군터는 느긋하게 그를 관찰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제국의 군인이다. 제국은 베이고르와 전쟁 중이며, 따라서 베이고르의 우군인 너희가 전쟁에 참전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인가?]
[너희는 제국에 있어 위험요소이며, 너희를 쳐 없애는 것이야말로 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지.]
[그렇군. 너희는 또 다시 우리의 터전을 짓밟으려 하는군.]
한탄하는 듯한 내용이었으나 전해져 오는 마음에 감정은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질되었으나, 네가 이 땅의 기둥에서 뻗어난 편린임을 알아볼 수 있다. 어쩌면 이 또한 대지의 섭리일지도 모르지.]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느끼지 못하는가. 그토록 변질 되었다면 그 또한 섭리의 일부이다.]
대화를 나누던 요정이 손을 폈다. 회색 손바닥 위로 꽃 한 송이가 피어 오르듯 가느다란 돌이 생겨났다. 외관은 돌이었으나, 어쩌면 나무나 식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커졌을 때 그것은 투박한 석검(石劍)의 형태였다.
[섭리가 어느 쪽으로 흐르는가, 확인해보겠다.]
뭉쳐 있던 요정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그들 중 일부는 땅으로 녹아들 듯 모습을 감췄고, 일부는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정면에서 덤벼들었다.
"자리를 지켜! 튀어나가지 마라!"
한 번의 기습을 통해 요정들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가하는 대신에 진형을 유지하며 버티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버티는 데만 전념하려 해도 여의치가 않았다. 군터가 이끌고 온 병사들은 모두 경험 많은 최정예였으나 그들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로 쌓인 것. 땅에 스며들고 허공에 녹아 드는 등,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싸우는 요정들을 상대로는 그들의 경험도 별 쓸모가 없었다.
"아악!"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석검이 병사의 복부를 찔렀다. 틈 없이 유지되던 진형에 구멍이 뚫리고, 상아색 선이 구멍 사이로 파고 들었다.
"물러서라!"
버럭 외친 호닝거가 틈새를 파고드는 요정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푸르스름한 빛에 감싸인 손을 땅에 박았다.
쿵!
그의 손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흙이며 돌 조각 같은 것들이 거칠게 일어나 비산했다. 유령처럼 은밀하게 밀려오던 요정들이 곧바로 뒤로 몸을 뺐다. 그렇게 호닝거가 잠깐 시간을 번 사이에 흐트러졌던 병사들이 진형을 재정비했다.
"놈들이 당신을 노릴 거요. 내 옆에 붙어 있으시오."
살라스가 말했다. 호닝거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났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 한 몸 정도는 건사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대의 칼보다는 술법 한 번이 아군에게 더 유용하니 앞으로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시오."
"…그러리다."
제국 병사들이 생소한 방식의 전투에 적응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리면서도 끝끝내 무너지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호닝거를 비롯한 술사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진형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술사들은 전투의 흐름이 기울려 할 때마다 한 번씩 앞으로 나와 술법으로 요정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커윽!"
그러나 그것도 언제까지고 계속 되지는 못했다. 몇 번이고 술법의 힘에 밀려 물러나기를 반복하던 요정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반격을 개시했다. 나뭇가지를 엉성하게 깎아 만든 것 같은 화살이 한 술사의 목을 꿰뚫은 것이 시작이었다.
"방패병! 술사들을 지켜라! 두 명씩 붙어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살라스가 말을 멈췄다. 어느새 세 명이나 되는 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무 앞으로 나섰는가.'
병사들이 너무 흔들리다 보니 그것을 제어하려는 마음이 앞섰다.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셋이나 되는 적이 에워쌀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마치 암살자처럼…아니, 그보다 더하다.'
병사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아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정들의 움직임은 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고 은밀했다.
"대장님!"
"자리를 지켜라!"
살라스는 자신을 도우러 오려는 수하들을 제지했다. 안 그래도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전세였다. 단 열 명이라도 자리를 이탈하는 순간, 아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어차피 승기의 향방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살라스는 자신을 둘러싼 채 다가오는 적들을 바삐 살피며 칼을 고쳐 쥐었다.
*
쾅!
무언가 터져나가는 것만 같은 굉음. 그의 일격을 받은 요정이 크게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군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가볍다.'
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강하게 창을 휘두른들 그 힘이 삼분의 일도 제대로 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상대하는 적들을 이리저리 날려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 목을 베거나, 심장을 찌르지는 못했다.
'발이 묶인 건가.'
요정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놈을 포함해 다섯. 고작 다섯에게 붙들려서 시간만 죽이고 있다. 그가 이렇게 발이 묶인 사이 전황은 상당히 좋지 않게 흐르고 있었고.
"흐읍!"
몸을 낮추고 달려드는 적에게 창을 도끼처럼 내리 찍었다. 그러나 그의 창이 적의 머리에 닿기도 전에, 적의 몸은 물기를 머금은 흙처럼 변하더니 달리던 자세 그대로 땅에 녹아 들었다. 덕분에 힘껏 휘두른 창은 애꿎은 땅만 갈라놓고 말았다.
'또.'
참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온갖 것들을 상대해 본 군터였지만 이런 황당한 싸움은 처음이었다. 어찌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흙이며 돌 같은 것으로 변한단 말인가.
'이 또한 강체술인가?'
아니. 다르다. 신체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강체술은 피륙을 더 강하게 바꾸는 술법이다. 지금처럼 몸뚱이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카앙!
뒤통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석검을 창대 끝으로 튕겨냈다. 언제 뒤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적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것을 쫓아가려는데 발 밑에서 창이 불쑥 솟아올랐다. 군터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솟아오른 창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잡아당겨 반대로 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