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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82화 (482/1,064)

482화

산에 접근하기 전까지는 적과 빈번하게 조우했으나, 막상 가시거리까지 다가가니 베이고르의 병사들은 씻은 듯 자취를 감췄다. 허나 군터는 이런 변화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은 모두 군터와 같은 반응이었다.

"심상치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호닝거와 몇몇 술사들은 잔뜩 긴장하여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회색 산을 바라보았다.

"주시하는 눈길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그들이 눈치 챘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도망칠 것 같은가."

"그럴 리 없습니다. 보아하니 그들은 이미 저 산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요정이란 족속들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나무와 같습니다. 장군께서는 한 번 뿌리를 내린 나무가 뿌리를 거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다행일지…어떨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호닝거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아드리안이 못마땅하게 눈짓했다.

"너무 바짝 굳어있는 거 아니오? 여차하면 산에다 불을 질러버리면 그만인 것을. 놈들이 나무와 같다면 불 한 번 크게 질러주면 알아서 잘 타 죽을 게 아니겠소?"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 될 리가 없다는 것은 아드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호닝거를 비롯한 술사들이 필요 이상으로 굳어 있다고 생각해 반발심이 든 것뿐.

"아니 그렇습니까 장군?"

침묵하는 호닝거에게서 눈을 떼고 동의를 구하듯 군터를 바라보았지만, 군터는 그가 바라듯 시원시원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여차하면 네가 말한 것처럼 해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일단은 계획대로 움직인다."

회색 산은 고작 오백 병력으로 둘러쌀 수 있을 만큼 작지 않았다. 때문에 산을 포위하고 좁혀가는 것은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다.

"놈들의 군락으로 가 왕의 목을 친다."

요정들은 신비로운 존재들이나, 그렇다고 아예 전설 같은 존재들도 아니었다. 제국의 영토에도 요정들이 존재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정복전쟁 과정에서 섬멸 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정들의 습성이라고 해야 할지, 대략적인 정보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요정의 뿌리는 정령입니다. 본디 정령은 의지가 없는 자연 현상과도 같으나, 그런 정령들이 어떤 이유에서 의지와 육신을 갖게 된 것이 요정들이지요."

육신과 의지를 갖게 되었다 함은 생명이 되었다는 것인데, 요정이라는 족속들은 그런 주제에 재미있게도 생명처럼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대개 생기가 충만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군락을 이루지요. 그리고 단 한 명의 지도자에게 복종합니다. 사실 그들의 왕은 우리가 말하는 왕과는 다릅니다. 그들에게 있어 왕이란 부모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정왕의 피가 다른 요정들에게 흐르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만…아무튼 요정들은 그들의 왕에게 무섭도록 헌신적이지요."

말인즉, 왕을 치려 한다면 모든 요정들이 목숨을 걸고 막아 설 것이라는 뜻이다.

"수고를 덜어 좋은 일이 아닌가."

패기 넘치는 무관들이 그리 말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술사들의 표정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자욱해지는 안개를 불안한 눈으로 주시했다.

"장군. 슬슬 불을 피우겠습니다."

"아직 이르지 않은가?"

"그들이 어찌 나올지 모릅니다. 위험부담은 최대한 덜어두고 싶습니다."

"그렇다면야……."

군터의 허락을 얻은 호닝거가 품에서 작은 돌, 혹은 구슬 같은 물체를 꺼냈다.

"지금 내가 지피는 이 불은 여명의 온기이니……."

주먹보다 자그마한 구슬이 녹아 내리는가 싶더니 곧 붉은 불꽃이 되어 호닝거의 손으로 옮겨 붙었다. 호닝거의 손 자체가 불덩이가 된 듯 활활 타오르며 빛을 뿌렸다. 그의 손에서 발한 불빛은 점점 짙어져 가던 안개를 빠르게 걷어냈다. 그를 중심으로 뭉친 오백 병사들의 시야가 한 순간에 탁 트였다.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호닝거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하지만 초조함도 함께였다.

산을 뒤덮은 짙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았다. 호닝거의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여전히 자욱했고, 불빛의 경계에서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느껴지십니까 장군. 그들이 안개 속에 숨어 있습니다."

"아니. 난 느끼지 못한다. 안개 너머로는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산에 들어선 이후로는 군터의 초인적인 감각도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그는 이제 산속의 적막 너머를 엿들을 수 없었고, 짙게 깔린 안개를 꿰뚫어 볼 수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평범한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독하군."

호닝거의 불이 아니었더라면 눈 뜬 장님이요 귀 뚫린 귀머거리가 될 뻔했다.

"이 산을 휘감은 안개 자체가 거대한 힘입니다. 가호라고 해야 할까요."

"가호?"

"요정들의 뿌리가 정령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요정들은 그들의 터전에서 정령들의 가호를 받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산 전체가 우리의 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그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무뎌졌던 감각이 다시금 날카롭게 곤두섰다. 발에 닿는 물렁한 흙이 신경 쓰이고, 피부를 젖게 하는 습기 가득한 공기가 거슬렸다. 어느새 익숙함에 물들었던 감각이, 마음이 긴장감을 머금으니 시야를 가리는 안개도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

"기름."

"예? 아, 옛."

화살 한 대를 꺼내 기름 주머니에 넣었다. 기름 묻힌 화살에 호닝거의 불을 붙이고, 시위에 걸어 힘껏 잡아당겼다.

피잉-!

불타는 화살이 짙은 안개를 헤집고 들어갔다. 불빛은 그리 멀리 뻗지 못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꿈틀거리던 무언가를 일순 멈칫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움직이는군.'

아주 잠깐이었지만, 불빛이 안개 속을 가로지른 만큼 군터의 감각 역시 그 속까지 뻗어나갔다. 호닝거가 말한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온다."

두서 없는 짤막한 말의 의미를 모두가 다 알았다. 술사들이 저마다의 준비에 돌입했고, 병사들은 어깨를 맞대고 서서 진형을 굳건하게 했다.

"……."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숨소리 외에 달리 흐르는 소리는 없었다. 입을 벌리는 순간 벌린 입으로 칼날이 박히기라도 할 것처럼, 무겁게 침묵을 지키며 조금씩 경사진 땅을 올랐다.

"……!"

그러던 한 순간. 가장 앞서서 산을 오르던 군터가 대뜸 인상을 구기며 창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린 칼이 검은 창과 부딪쳤다. 그야말로 허공에서, 안개를 가로지르며 떨어져 내린 인형(人形)은 유령처럼 안개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적이다!"

군터의 외침은 충돌과 동시였으나, 그럼에도 늦은 감이 있었다. 군터의 앞에 나타났던 적이 그랬던 것처럼, 흐릿한 형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엄습해왔다. 허공에서, 바로 앞과 옆에서, 심지어는 땅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기도 했다.

"흩어지지 마라!"

살라스가 버럭 외치며 칼을 맞댄 적을 힘껏 밀어냈다. 전력으로 밀었음에도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어찌 이런 힘이.'

요정임에 틀림없는 적은 실로 기괴했다. 키는 컸으나 호리호리한 체형인 탓에 그리 커 보이지는 않았는데, 바로 코앞에 칼을 맞대고 있음에도 그곳에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분명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힘을 다해 부딪치고 있음에도 말이다.

'허깨비 같군.'

칼을 맞댔다고 생각했으나, 칼날을 부딪친 것이 칼이 아니라 칼과 비슷한 형태의 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악!"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리고, 아무것도 없던 바로 앞과 옆에서 나타났으며, 심지어는 발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기습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습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지라, 제국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그나마 장교들의 활약으로 다시금 진형을 갖추고 응전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 기습 한 번으로 태반이 쓰러질 뻔했다.

"크륵!"

유령처럼 은밀하게 나타난 요정들은 물러날 때도 유령처럼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무사히 발을 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상을 입고 제때 물러나지 못한 몇몇이 생포 당했으며, 군터의 창에 발목이 잘린 요정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군."

억센 손이 회색 목을 억눌렀다. 호리호리한 몸이 가벼운 돌멩이처럼 번쩍 들렸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켁켁 거리는 것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요정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방금 전은 제법 인상 깊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 있을지 한 번 보도록 하지.]

목소리로 전하는 말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의성(意聲)이다. 황자에게 배운 쓸만한 재주 중 하나였다. 종족, 언어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의사소통 방법이 없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내 뜻을 전하는 데는 최고이나 그 반대는 어렵다는 점일까. 의성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기운에 의지를 심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의 통제에 통달해야만 한다. 말은 쉽지만, 황자의 말에 따르면 그러기 위해서는 반쯤은 인간을 초월해야만 했다.

"준비한 것을 꺼내라."

십여 명의 술사들이 호닝거를 중심으로 모였다. 병사들이 그들의 주변을 에워 싸는 사이 술사들은 흙을 파헤치며 땅에 기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아라."

호닝거의 지시에 술사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그들을 작은 수정을 꺼내더니 땅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수정에 각자의 술력을 불어넣었다. 그 힘의 흐름이 군터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다.

'힘을 집중시키는군.'

술사들 개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법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금처럼 하나가 아닌 여럿의 힘을 한 데 모은다. 한 명이 아닌 여럿의 힘이 모이면 한 명이었을 때는 감히 시도는커녕,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막강한 힘을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화르륵!

호닝거의 한 손에 머물던 불꽃이 한 순간 무지막지하게 그 크기를 키웠다. 호닝거를 통째로 감싸듯 부풀어 오른 불길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아래로는 술사들이 그린 문양의 몇 개 선을 따라 옮겨 붙었다. 미리 기름을 부어놓은 것도 아닌데, 가느다란 불길은 마치 파인 땅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처럼 퍼져나갔다.

카앙!

"막아라!"

불길이 하늘로 솟구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것 같은 투박한 외형이었으나 그 위력은 전혀 투박하지 않았다. 빠르고, 강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병사들이 방패를 들었으나 간간이 화살들이 방패의 벽을 뚫고 날아들기도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술사들을 감싼 덕에 술사들이 화살에 맞는 일은 없었다.

화르르륵!

하늘로 솟구쳤던 불기둥이 쪼개졌다. 두 갈래, 세 갈래, 네 갈래. 쪼개지고 쪼개진 불기둥은 셀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불의 가닥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양이 마치 수백 개의 붉은 채찍이 후려치는 듯했다.

"길이 열린다!"

세상이 환해졌다.

벽처럼 드리워 있던 안개가 걷히고, 불이 곳곳에서 타올랐다.

그렇게 환해진 시야 곳곳에,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적들이 훤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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