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군터는 울타마란 소레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단 그의 지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요정들에 대해 거론한 것이 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간을 두고 국경을 넘었고, 그 시간 동안 테리브란과 이런저런 교감을 나누었을 터였다. 당연히 대전략에 대해서도 황자와 충분히 논의를 했을 것이고, 그가 말한 요정들에 대한 사항에도 황자의 생각이 작지 않게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불안요소는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 좋지.'
물론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 역시 요정들에 대해서는 손을 쓰는 것이 좋다는 데 동의했다.
"생각이 일치한 것 같으니, 이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군."
"제가 하지요."
"음? 괜찮겠나?"
"장군께서 나서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네 역시 쉽게 움직일 수는 없는 위치네만."
그들 모두 위장으로서 대군을 이끌고 한 전선의 총지휘를 맡아야 하는 인물들이다. 요정들을 치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 하나, 전선의 총책임자가 움직일 만한 사안이냐 하면 그건 또 애매했다. 더군다나, 요정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색 산으로 움직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한 일이었다.
"아무리 시선을 끈다 해도, 이쪽에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게 된다면 요정들이 적에 가담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제한적이니 움직이는 병력은 반드시 최정예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에는 울타마란 소레딜도 동의를 표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군터가 직접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대장은 결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돼."
"동의합니다만, 좋은 칼이 있다면 칼집에 재워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의 용맹은 인정하겠지만, 자네의 위치를 조금 더 자각했으면 하는데."
"지금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으나, 이렇게 될 경우 결국에는 군터의 뜻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울타마란 소레딜이 비록 군터보다 위계가 하나 더 높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각기 독립적인 일군을 이끄는 위치. 따라서 그가 군터에게 명령을 강제하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급히 테리브란으로 사람을 보내 황자로 하여금 군터의 뜻을 꺾도록 종용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테리브란으로 보냈던 전령은 그가 바라던 답을 들고 오지 않았다. 황자는 군터의 뜻을 꺾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뜻대로 하라.
황자의 답신을 받은 울타마란 소레딜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그도 더 이상 군터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무운을 빌지."
"장군 역시."
군터는 그의 휘하는 물론, 새롭게 합류한 병사들까지 포함하여 정예 병사들을 추려냈다. 울타마란 소레딜 역시 적극 협조해주었다. 그는 자신 휘하의 뛰어난 술사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요정들을 상대하려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걸세."
평범한 술사들이 아니었다. 술법 실력뿐만 아니라 전장에서의 실전 경험까지 갖춘, 흔히 찾아보기 힘든 전투 술사들이었다. 특히 그들의 대장이라는 호닝거는 겉모습만 보면 술사가 아니라 숙련된 전사처럼 보였다.
"활약을 기대하겠다."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터가 별동대를 조직하는 사이, 울타마란 소레딜은 전선을 넓게 펼치며 베이고르를 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당초 군터가 점령을 목표로 한 마지막 영지였던 아힌키우스가 함락되고, 제국은 함락시킨 다섯 영지를 중심으로 전선을 확립했다.
"만 명에 가까운 적이 폴사도에 집결했다는 소식입니다."
"만이라고? 어지간히도 긁어 모은 모양이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베이고르의 다급한 움직임을 비웃었다. 만 명이라는 숫자가 결코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남쪽에 모였다는 일만 병력이 제대로 된 병사들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발등에 불똥이 떨어져 다급하게 긁어 모은, 훈련은 고사하고 무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잡병이 반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이쪽이 당장 싸워주지 않는다면 답답해질 터인데.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한들, 앞뒤 가리지 않고 머릿수만 늘리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저렇게 긁어 모은 병력을 어찌 유지할 것인가. 끌어 모은 그 순간부터 저들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데, 미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다급하게 움직인 적들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알아서 자멸해주면 이쪽이야 고맙지만.'
"강 너머의 적도 적이지만, 점령지 이곳 저곳에서도 산발적인 저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도를 점령하고 영주를 굴복시켰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주 가문의 방계 같은 자들이나 기타 관료들이 베이고르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으며 깃발을 들어올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명분을 쥐고서 인생 역전을 노리는 발칙한 시도들.
"고마운 일이지."
그들의 그런 저항은 제국군의 입장에서 썩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설치면 설칠수록 제국군은 명분을 쥐게 된다.
"병사들을 마음껏 날뛰게 해라."
명분이 없다면 탄압이나 이렇게 명분을 쥐게 되면 진압이다. 병사들은 약탈과 폭력에 굶주렸고,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분별 없이 날뛰게 해서는 안 된다. 협력한다면 무사할 것이고, 대항한다면 처참히 짓밟힐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해라."
"예."
시간이 흐르며 베이고르의 군대가 점점 전선 부근으로 집결했다. 병력의 수만 놓고 보면 제국군을 확실히 앞섰으나, 그들은 그 앞선 병력 수를 가지고도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다.
"알고 있는 게지. 억지로 채운 머릿수는 결국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길게 늘린 적의 포진을 보고 있으니 그들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억지로 늘린 머릿수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부터 뻗어 나온 공포의 증거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도 나쁠 것은 없지만…한 번쯤은 시선을 돌려주는 것이 좋겠지.'
바로 어제. 군터가 별동대의 조직을 끝냈다. 모두 기병으로 해서 딱 오백이다. 적의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기에는 약간 애매한 수. 그렇기에 한 번 흔들어줄 필요가 있다.
"오천을 남쪽으로 움직인다."
오천이나 되는 병력이 도하를 할 것처럼 움직이니 강 너머에 주둔한 베이고르의 병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부산함은 곧 서쪽에 포진한 베이고르군에도 옮겨 갔고, 그것은 머지 않아 전장 전체로까지 퍼져 나갔다.
군터의 별동대는 그 혼란을 틈타 은밀히 움직였다. 해가 떠 있을 때는 그늘로 숨어들었고, 달이 뜨고서야 말발굽에 풀을 잔뜩 묶어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적지를 거닐었다.
"북쪽에서 정찰병 무리가 접근 중입니다."
그들이 적에게 발각 당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술사들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 중 몇이 지닌 힘, '바람의 속삭임'은 적들의 존재를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만 때때로 바람이 등 뒤로 불어와 그들의 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군터의 초감각이 빛을 발했다. 비록 술사들처럼 한참 앞서서 적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는 못했으나, 적의 정찰대가 접근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인지하고 대응하는 데는 충분했다.
"믿기 힘들군요."
술사들의 대장, 호닝거가 군터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로서는 딱히 술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도 아닌 군터가 어찌 적의 접근을 이리도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피하지 못했지 않나."
"운이 좋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발각 당하지 않고 움직인 것만 해도 기대 이상이 아닙니까."
불운하게도 바람이 등 뒤로 불어온 바람에 술법의 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군터는 이번에도 적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렸으나, 이번에는 적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교전을 각오한 군터는 병사들을 넷으로 나눠 매복시켰다.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적의 정찰대를 전멸시킨다고 해도 이틀 이상을 벌기는 힘들다. 이틀 후면 그들은 적지 한복판에서 고립되는 것이다.
"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는 대략 스물 가량입니다."
살라스가 나직이 말했다. 군터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신호를 보냈고, 미리 매복하고 있던 할렌과 아드리안 등이 일제히 적의 배후에서부터 기습을 가했다. 적의 정찰대는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모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치워라."
호닝거의 지시에 몇몇 술사들이 나섰다. 그들이 땅에 손을 가져가자 흙더미가 물결처럼 일어나더니 죽은 사람과 말의 몸뚱이를 순식간에 파묻어버렸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회색 산까지는 하루면 충분합니다."
"적과 조우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겠지."
"산에 가까워질수록 적과 조우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적의 정찰 병력과 조우하는 것이 전선을 막 넘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잦아졌다. 덕분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결국 교전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말이다.
"제대로 짚었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이제부터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 교전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루 안에 회색 산에 닿는 것을 목표로 움직였다. 한나절이 지나기 전에 적과 두 번을 더 마주쳤고, 그때마다 군터의 별동대는 미리 자리를 잡고 있다가 선제 공격하여 손쉽게 그들을 전멸시켰다. 사상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점점 습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분 탓이 아닙니다."
할렌의 중얼거림에 호닝거가 대신 답했다. 그는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산에 가까워질수록, 생기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생기?"
"물이 없으면 그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은 생명의 근원과 같지요."
생명의 근원이니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호닝거는 물을 이야기하지만, 모페이브는 똑같은 이야기를 물과 땅만을 바꿔서 했었다. 그러나 군터는 호닝거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의 말처럼, 저 산에 가까워져 갈수록 대지의 생기가 짙어지고 있음은 분명했으니.
"심상치 않은 산입니다. 저런 영산(靈山)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호닝거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