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벌써 4개 영지를?"
울타마란 소레딜이 전령의 보고를 받고는 허허 웃었다. 그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길게 자란 흰 수염이 휘날렸다.
"빠르군. 빨라. 젊어서 그런지 기운이 넘치는구만."
"전하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렇다 해도 상당하지 않은가. 세레온 우슈무르의 뒤를 이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급습으로 이득을 취했을 뿐입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 무관이 사뭇 퉁명스레 대꾸하자 울타마란 소레딜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지. 그 급습 또한 그 자가 추진한 일이다. 공으로 추켜세워주면 모를까, 깎아 내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
"장군께서는 그를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아니.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볼 뿐. 그는 이 전쟁의 시작을 아주 훌륭하게 열었으니, 내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무관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 대꾸는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수긍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추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는 그마저도 좋아 보였다. 경쟁심, 질투심, 뭐든 좋다. 그런 순수한 감정을 활활 태울 수 있는 것도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추하게.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뜨겁게. 그렇게 때로는 뻔하게, 때로는 종잡을 수 없게 변해가는 것이야말로 삶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 한창 쉼 없이 달리고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가 달리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를 즈음이면 여유가 생긴다. 아니. 달릴 힘이 없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때가 되면 한 번쯤은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를 잘 봐둬라."
"예?"
"전하께서 그를 크게 생각하시니, 이번 전쟁 이후로도 그를 중용하실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면 그 공을 빌미로 그에 대한 중신들의 견제를 무마시킬 수 있다.
"앞으로 그려질 새 세상에서는 그와 너 같은 젊은 인재들이 활약하게 되겠지. 그러니 마냥 고깝게만 보지 말고 그에게서 배울 점을 찾거라. 그게 아니라면 하다 못해 약점이라도 찾아."
얼마나 이해했을까. 찌푸린 표정을 보면 그저 반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가라앉은 눈을 보면 제대로 이해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좋지.'
이해하면 이해한 대로 좋고, 아니라면 또 아닌 대로 좋다. 지금 깨닫는다면 빨라서 좋은 것이고, 차후에 깨닫게 된다면 늦은 만큼 깊고 크게 깨달을 테니 역시 좋다. 죽음이 아닌 한, 어디로 굴러가는 삶이라도 다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겠나.
"서둘러야겠다. 코누다이안의 수도 위글로우. 군터 그 친구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구나."
울타마란 소레딜과 그의 군대는 최대한 길을 서둘러 위글로우로 향했다.
위글로우에는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특별히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은근히 코를 찌르는 냄새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성벽과 성문은 비교적 멀쩡한데 시가지가 많이 상했군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젊은 무관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성문은 버려두고 성벽을 넘은 게다. 허무하게 성벽을 잃은 적은 병력을 물렸겠고, 자연히 시가전이 벌어졌겠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외성 구역을 거의 다 지났다. 내성의 성문이 보일 즈음, 그들은 성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오."
울타마란 소레딜의 눈길을 끈 것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거한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는 사내.
"군터 장군이시구만."
"그렇습니다 장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그에게 군터가 무뚝뚝하게 군례를 취했다. 윗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만 취한 셈이었는데,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울타마란 소레딜의 옆에 있던 젊은 무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특별히 말은 안 했지만 그런 기색을 대놓고 보였기에 군터의 시선이 슬쩍 그에게 옮겨갔다.
"이쪽은?"
"아. 내 아들 놈이네."
"반갑습니다 장군. 카운티그 소레딜이라 합니다."
"음. 반갑네."
군터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울타마란 소레딜을 보며 입을 떼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간의 일들과, 현 상황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세나."
*
울타마란 소레딜은 노장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이미 은퇴한 지 수 년은 지난 노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군터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인자한 웃음 뒤에 감춰진 견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육신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젊은 무관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경험 많은 노장 특유의 분위기가 그런 부족함을 넘칠 정도로 채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느긋함과 여유는 다른 이들까지 물들게 할 정도로 안정감이 있었다.
"아모트의 잔당은 없는가?"
"적의 주력을 확실하게 격파했습니다. 잔당이 있다 해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자잘한 규모일 것입니다."
"좋군. 허면 보급선에는 문제가 없고…군터 장군. 자네는 곧 아힌키우스를 치러 간다고?"
"예. 본래는 더 서두를 생각이었습니다만."
"흐음. 빠르게 끝내야 하는 전쟁이기는 하지만, 이쯤 되면 한 번쯤 숨을 돌리는 것도 좋지. 그나저나 이쯤 되면 그 아힌키우스의 영주라는 놈도 애가 탈 터인데, 항복을 권유해보지는 않았나?"
"소용 없을 겁니다."
"어째서?"
"영주라는 자들은, 그 자리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국은 영주라는 지위를 인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지. 흠…그렇다면 그 영주라는 놈들이 앞으로도 어지간해서는 굽히지 않을 거라는 뜻인가?"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골치 아픈 일이군. 허면 일일이 무릎 꿇려야 한다는 것인데……."
"베이고르의 대군과 회전을 벌여서 대파를 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저항해봐야 끝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면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영주의 지위에 대한 미련을 누를 수 있을 터.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닐뿐더러 위험요소 또한 제법 크지."
"이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십니까?"
군터의 물음에 카운티그 소레딜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정작 그의 부친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데 말이다.
"장군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분노가 담긴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들었으나 군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는 노장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전력을 쏟을 수 없는 상황이네. 음, 아마 지원병력이 더 투입 된다 하더라도 다 합쳐서 6만 가량이나 될까 싶군.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바크렌을 탈환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적이 바크렌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일찍이 아국은 반군들에게 패해 바크렌을 잃었었지. 바크렌의 병력은 물론이고, 인근 주의 지원 병력까지 투입 되었음에도 패하고 말았어. 초원의 야만인들이 놈들에게 가세했기 때문이었지."
"초원의 세력은 이제 없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까다로울 수 있는 적이 또 하나 있지 않나."
"…요정이라는 것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들 말이야. 만약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발목을 잡힌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요정들 때문일 것이야."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이라면 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피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이니 조금 더 상대에 대해 알고 싸우자는 것이지."
"음. 허나 전하께서는 이 전쟁을 최대한 신속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 하셨습니다."
"신속하게 마무리 지어야지. 허나 신속한 것과 허술한 것은 달라."
"허면 장군께서는 따로 생각이 있으십니까?"
"아란딜 페레모어에 이어 아그니스 체스퍼까지 끝내 실패했을 때부터 나는 바크렌의 반군들과 얹고 일전을 벌이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네. 하여 일찍부터 놈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지. 물론 그 중에는 그 요정이라는 것들에 대한 정보 역시 포함되었고."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그의 부관이 땅에 내려놓았던 기다란 상자를 가져왔다.
"그 요정이라는 놈들은 바크렌의 반군이 초원의 야만인들과 치른 전쟁에서 활약을 했지. 막을 도리가 없어 보이던 야만인의 왕을 제압한 데는 그들의 힘이 크게 작용을 한 것으로 알고 있네. 헌데, 희한한 것은 그 후로 요정들의 종적이 묘연해졌다는 것이야."
상자 안에서 꺼낸 것은 하나의 커다란 지도였다. 바크렌의 전역이 상세하게 표현 된, 지금껏 군터가 봐 왔던 모든 지도들 중 가장 크고 상세한 지도였다.
"야만인의 왕이 마지막 전투를 치른 바로 그 자리에 전에는 없던 산 하나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나? 필시 주술적인 힘이 작용한 결과일 것인데, 나는 바로 그 산에 종적을 감춘 요정들이 숨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네. 음…짐작이 아니라 거의 확신하고 있지."
그가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회색 산. 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우리는 이곳을 노려야 하네."
"노린다 함은?"
"요정들이 반군의 군세에 합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놈들을 쳐야 한다는 뜻이지."
"가능하겠습니까."
"현재의 전선을 넓게 유지하면서 적들을 끌어내는 거네. 적이 전선 쪽에 집결하면 정예로 구성한 별동대로 회색 산을 친다."
"그 전에 요정들이 반군에 가담하면 어찌 됩니까."
"그리 되지는 않을 게야."
"어찌 확신하십니까."
"일전에 야만인의 잔당이 초원 쪽에서 밀고 내려왔을 때. 북부가 완파 될 정도로 크게 피해를 입었지만 그 지경이 되기까지 반군 놈들은 요정들의 손을 빌리지 않았네. 내 생각에는 빌리지 않은 게 아니라 빌리지 못한 게야. 무슨 제약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아마도 어지간한 위기가 아닌 이상, 놈들은 요정들의 도움을 끌어내지 못할 걸세. 그러니 우리는 이 상태에서 전선을 고착시키고 놈들에게 여유를 주는 거네. 놈들이 요정들에게 손을 내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 사이 별동대를 통해 요정들을 멸하고……."
"그 후에는 자네의 말처럼 회전을 벌이든지 해서 전력으로 반군 놈들을 섬멸해가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