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적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 심지어 그 적들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다 알고서 매복까지 하고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그런데다 초장부터 지휘관까지 잃었으니, 비등한 수라고는 하지만 젠탄테르군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승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대승. 군터는 마지막까지 사납게 날뛰다가 그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모레인의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장군."
"아군의 피해는?"
"신경 쓰실 필요도 없을 정도로 미미합니다."
반면에 적은 거의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수만 해도 팔백이 넘었다.
"포로는 없다. 모두 죽여라."
"예."
모레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를 데리고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풀어줄 수도 없으니,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아악! 살려줘!"
서로 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죽일 때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죽일 때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는 병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악에 받쳐 소리치거나, 애원하며 매달리는 젠탄테르의 병사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허나 그것도 처음에만 잠깐 그랬을 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이들이 늘어갈수록 그들은 점점 죽어가는 이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의 눈에서 괴로움은 사라지고, 진득한 살기만이 뚝뚝 흘렀다.
"……."
이미 죽어있던 몸뚱이들의 위로 팔백여 구의 시신이 더해졌다. 짙은 죽음의 기운이 장작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군터는 그 농밀한 향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전보다 더 진하군.'
육신에 머물던 영이 흘러나와 흩어진다. 그것은 물길을 따라 흐르는 물과도 같았다. 군터가 슬쩍 그 흐름 속에 손을 뻗으니 손 끝에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것이 가늘게 얽혔다.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흐리게 울려 퍼지는 감정의 메아리가 그의 영을 두드렸다. 자신들에게 동조해달라는 듯이, 함께 해달라는 듯이.
'꺼진 불은 재만 남기고 사라지면 된다.'
그러나 군터는 그들의 애원, 절규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새벽의 바위처럼 차갑고 단단하여 그들의 몸부림에 그 어떤 연민도 느끼지 못했다.
-아아아아아!
뻗은 손을 털어내듯 가볍게 흔드니 얽혀 있던 것들이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들의 마지막 절규가 고요 속을 심심하게 울렸다.
"곧장 흐루헴으로 진격하실 생각이십니까."
모레인이 물었다.
"그래야지. 다른 생각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저 또한 장군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확인 차 여쭌 것뿐입니다."
센트리올과 젠탄테르의 규모가 비슷비슷하니 지금 이천을 섬멸함으로써 그들의 주력을 꺾은 셈이다. 나머지 병력은 영지의 곳곳에 분산되어 있을 것이니, 지금 젠탄테르의 수도인 흐루헴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없을 터. 그러니 진격의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아모트 쪽으로 움직인 군세도 전투를 시작했겠군."
"살라스 천부장이 신경 쓰이십니까?"
"아니라면 거짓이겠지."
"그는 잘 할 것입니다."
"어떻게 확신하나?"
"제가 본 그는 좋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 아군의 전력이 적의 전력보다 뛰어나니 실패할 이유가 없지요."
군터가 슬쩍 모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지휘관의 자질이라면, 자네 또한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
모레인은 뛰어난 군인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지만, 군터는 거기에 더해 그에게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까지 확인했다.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이번에 부장으로 대동하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닌 능력에 비해 행실은 꽤나 소극적이지. 그 소심함은 천성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른 대처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혹 자네의 그런 태도가, 티브리악이라는 이름과 연관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먼 방계일 뿐입니다."
"능력 있는 자가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관을 과대평가하셨습니다."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
거기까지 말한 군터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얼핏 모레인의 턱 근육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서지 않겠다면 끄집어낼 이유는 없다.'
모레인에게서 좋은 자질을 확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질이, 능력이 있다 해도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발휘할 마음이 없다면 남이 그것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럴 이유가 없다.
"나중에, 지금보다 더 솔직해질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 내게 찾아와 말하게."
이 말을 해주는 것이, 군터가 그를 위해 베풀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
"뭣이라!"
제국기를 든 적군이 도시 바깥에 나타났다. 그 보고를 들은 젠탄테르 남작은 체면도 잊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신하들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그는 자신의 머리만 움켜잡을 뿐, 그들의 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잘못 본 것은 아니더냐?!"
"확실합니다. 제국기와…붉은 깃발을 보았습니다."
"붉은 깃발……."
적기. 적포장군을 뜻하는 그 깃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제 베이고르의 인사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파헨델의 제국군이…어떻게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하물며 적기라니? 군터 그 자가 지금 저 밖에 와 있다는 뜻이 아니냐!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코누다이안의 상황이 급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딸이 보낸 서신에는 코누다이안의 현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라 생각했다. 그간 그의 딸은 라일라인지 뭔지 하는 계집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눌려 지내야만 했다. 허나 이번 위기는 그런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거기에 더해서 정말로 제국과의, 7황자와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장은 코누다이안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는 최대한 빠르게 병력을 모아 코누다이안으로 출병시켰다. 그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헌데 갑자기 제국군이라니? 군터라니?
"내 눈으로…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그는 휘청거리며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도시를 포위한 군대와, 그 군대가 치켜든 두 개의 깃발을.
"아아……."
그는 다시 한 번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를 부축하러 달려오지 못했다.
*
군터는 흐루헴을 포위하고 사자를 보내 투항을 권했다. 며칠 전에 떠나 보냈던 이천 병력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조언과 함께.
"항복…하겠소."
젠탄테르의 영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더 버텨봐야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그는 이 시점에서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택했다.
"부디 내 가문만은……."
"그에 대한 처분은 전하께서 내리실 것이오. 다만, 그대가 우리를 위해 최대한 협조를 해준다면 나 역시 그대와 그대의 가문을 위해 최대한으로 힘써줄 것을 약속하지."
"…고맙소."
그와 군터는 구면이었다. 군터가 코누다이안의 기사였던 시절에 막시밀리언을 수행하며 그를 만난 적이 몇 번 있었다. 가볍게 몇 마디 말을 나눈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 의미 없는 과거에 지나지 않았다. 젠탄테르의 영주는 허리까지 숙이며 굴종을 표했고, 군터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젠탄테르 영주는 코누다이안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 해라."
영주는 영지의 주인이자 구심점이다. 아무리 그가 순순히 성문을 열고 가문의 인장까지 바쳤다지만 그를 젠탄테르에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모레인의 권유대로 군터는 그를 코누다이안으로 보내기로 했다. 당연히 그의 식솔들도 함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둘이군."
"얼마 후면 하나가 되겠지요."
"네게 이곳을 맡기겠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직접 이곳에 남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센트리올이 정식으로 항복을 한 것도 아니며, 살라스가 간 아모트의 상황도 결론이 나지 않은 데다 아힌키우스와 폴사도의 움직임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 모든 것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코누다이안에서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맡겨주십시오."
그리하여 군터는 모레인에게 천오백의 병력을 주고 젠탄테르에 머물게 하고서 자신은 코누다이안으로 돌아갔다.
"장군!"
그런데 그가 코누다이안에 당도하자마자 낭보가 날아들었다. 살라스가 무사히 아모트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영주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보고에 따르면 피해도 기대 이상으로 적은 수준이었다.
"일부 병력을 주둔시키고 회군한다 합니다."
"좋아."
개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다 순조로웠다.
"더크만."
"예."
"할렌과 함께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센트리올로 가라. 센트리올의 영주에게 항복을 받고, 그와 그의 식솔들을 이곳으로 보내."
"옛."
코누다이안, 젠탄테르, 아모트를 손에 넣었다. 여기에 센트리올까지 더해진다면 이제 당초 목표로 했던 다섯 개 영지 중 하나만 남는 셈.
"살라스가 돌아오면 내가 직접 아힌키우스로 가겠다."
그렇게 살라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중. 때마침 본국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 이끄는 정병 1만 5천이 파헨델을 지났다 합니다."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점령지를 안정화시킬 병력이 빠듯해지려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울타마란 소레딜이 이끄는 1만 5천이 곧 합류한다는 소식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