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막시밀리언 코누디스의 장례식은 군터의 주도 하에 간소하지만 초라하지 않게 치러졌다. 사적으로는 옛 상관에 대한 예우를 한 것이었으며, 공적으로는 코누다이안의 백성들과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코누다이안을 손에 넣었고, 센트리올도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제 세 개가 남았다."
당초 목표로 했던 5개 영지 가운데 둘을 손에 넣었다. 아직도 반 이상이 남은 셈이지만, 가장 중요했던 코누다이안을 손쉽게 얻은 데다 기대치 않았던 센트리올까지 덩달아 얻은 셈이니 이는 명백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남은 셋 중 가장 먼저 쳐야 할 곳은 역시 아모트겠지."
코누다이안의 동남 쪽에 위치한 아모트는 앞으로 제국군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아군이 아모트에 닿을 즈음이면 그쪽도 만반의 준비를 갖췄겠지."
국경을 넘을 때부터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지만, 지금쯤이면 아모트를 비롯한 세 영지에서 모두 낌새를 챘을 것이다. 물론 코누다이안이 무너졌다는 것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아모트와 젠탄테르를 동시에 친다. 아모트에 4천. 젠탄테르에 2천. 아모트 쪽은 살라스에게 맡기고, 젠탄테르 쪽은 내가 직접 가겠다."
적이 낌새를 챘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이 전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속도전은 유효하다. 그러니 이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한다.
"아무리 반군 놈들이 상대라고는 하나…괜찮으시겠습니까?"
수하들의 우려는 당연했다. 시어문드가 이끌고 온 센트리올의 주력 군세가 2천이었다. 주력이라고는 해도 그것이 전력은 아니니, 센트리올이 있는 대로 병력을 쥐어 짠다면 4천까지는 어떻게든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젠탄테르가 센트리올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역시 그 정도가 될 것인데, 아무리 반응하기 전에 치고 들어간다고 해도 병력의 수가 너무 적은 감이 있었다.
"충분하다."
그러나 군터는 그런 수하들의 우려를 일축했다. 그는 일찍이 코누다이안의 무관으로 있으면서 젠탄테르의 인사들과도 교류를 했었고, 북부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동부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참전한 적도 있었다. 그런 경력이 있으니 당연히 젠탄테르군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젠탄테르의 군졸들은 대단치 않으며,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들 역시 변변찮은 이들이 없었다. 그러니 군터는 설령 그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춰서, 4천의 군세로 맞선다고 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일 보다는 오히려 다른 것을 신경 썼다.
"살라스. 믿고 맡겨도 되겠느냐."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살라스가 군터의 휘하에서 어느 정도의 병력을 지휘한 적은 많지만, 본인 스스로가 대장이 되어 군대를 이끈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굳은 표정을 한 살라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비장했다.
'괜찮겠지.'
사실 일군을 지휘하게끔 한다면 살라스보다는 더크만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군터를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있으며, 오랫동안 파헨델의 천부장으로서 복무했던 만큼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도 그를 잘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터는 살라스를 믿었다.
살라스는 뛰어난 군인이다. 어쩌면 군터 자신보다도 더. 오랜 세월 그를 봐왔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일군을 이끌어본 경험이 없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해도 경험이 없다 하여 매번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싹을 틔우지 못한다.
이번이 살라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제껏 보아온 그라면 이 기회를 통해 싹은 물론, 꽃봉오리까지 피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
군터는 2천 병력을 이끌고 젠탄테르를 향해 출진했다. 진군 속도는 상당히 빨랐지만 군터는 그마저도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그의 기준은 너무 높았다. 그것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전군을 기병으로 구성한다 해도 그의 눈에는 차지 못할 터였다. 하물며 이번에 끌고 나온 병력은 보병이 기병의 세 배에 가까웠으니 속도가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코누다이안에서 젠탄테르로 향하는 길은 평지가 드문 탓에 병사들의 피로가 쉽게 쌓였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는 적이 방비를 다 갖추고 있겠군요."
모레인이 말했다. 이번에는 아드리안 대신에 그가 군터의 부장으로 따라붙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잘 될 거라 보는가?"
"젠탄테르의 영주는 적당히 욕심이 있는 자라 들었습니다. 전령만 갔다면 아무래도 망설이겠지만, 딸의 서신까지 함께 갔으니 움직임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군터는 위글로우를 떠나기 전에 젠탄테르로 전령을 보냈다. 그 전령은 제국기가 아닌 베이이고르의 깃발을, 적기가 아닌 코누디스 가문의 깃발을 들고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영주부인, 그러니까 라일라가 아닌 또 다른 영주부인인 아리안 코누디스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아리안 코누디스. 본래의 이름은 아리안 젠탄테르인 그녀는 현 젠탄테르 영주의 여식이었다. 본래 코누다이안의 영주부인이었던 리에론 가의 여식, 카트리나 코누디스가 사망하면서 그 빈자리를 그녀가 채웠다.
허나 영주가문의 여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라일라의 위세에 눌려 있는 듯 없는 듯 영주부인이라는 허울만 유지한 채 지금까지 불안한 입지를 유지해 왔다. 뭐, 이제 와서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하여간, 군터는 그런 그녀를 설득하여 그녀의 친가에 지원병력을 청하는 서신을 쓰게 만들었다. 국경을 넘은 제국군에 맞서기 위한 지원병력. 코누다이안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기에, 지원병력을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코누다이안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올라갈 수 있음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케 했다.
그런 군터의 요청에 그녀는 물론 의심을 했다. 하지만 의심을 한다고 해서 그녀가 그의 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자유'였다.
"제 아버님에게, 우리 가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그건 그대의 부친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린 일이지."
젠탄테르 남작은 딱히 인상적인 사내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자란 사내도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욕심이 있는 자였고,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쉽게 내려놓을 법한 자가 아니었다. 비록 머리로는 제국군이 강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언정, 자신이 가진 영주 자리를 고분고분히 내려놓을 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자가 굴복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한 번쯤 크게 피를 흘린 후일 것이다.
"허나…그가 원병을 보낸다 해도 얼마나 보낼지는 모르겠군."
"아마 움직인다면, 결코 소극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지?"
"딸의 서신도 서신이지만, 그것을 제하고 그의 입장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제국군과 싸우게 된다면 그 전장은 자신의 영지에서 멀면 멀수록 좋기 때문이지요. 일전을 각오한다면 최대한 많은 군세를 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센트리온 남작 같은 경우가 특이한 경우였다. 보통 영주라 함은 다스리는 영지 내에서는 왕과 같은 위세를 지닌다. 때문에 영주들이 영주라는 지위에 대해 갖는 집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은 영주의 지위와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절대 열세인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물러날 수가 없는 이유다. 제국에서는 영주라는 지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순순히 항복을 한다 해서 이전의 부라든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해준다는 보장도 없지만.
"단번에 기를 꺾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영주의 자리, 영지 같은 것에 연연하다가는 그것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단 한 번의 회전(會戰).'
군터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적들이 수도에 집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야전으로 적을 패퇴시킨들, 도망친 그들이 고스란히 수도에서 뭉친다면 심히 곤란해진다. 공성전을 벌인다면 승리를 하더라도, 피해도 피해지만 시간이 너무 끌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성 밖에서 싸워야 한다. 최대한 많은 적을 끌어내서 섬멸해야 한다. 그래야 손쉽게 수도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군 속도가 느린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셈이 되겠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젠탄테르의 영주는 지금쯤 열심히 군대를 모으고 있거나, 이미 출진시켰을지도 모른다.
이미 오면서 경험하기도 했지만, 젠탄테르에서 코누다이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꽤나 험하다. 허나 그 길마저도 나름 오고 가는 행상들이 닦아놓은 것이었으니, 그 길을 벗어나면 더 험한 구릉이나 산지를 지나야 한다.
그러니 적들은 분명 이곳으로 온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매복을 할 만한 지형이 있나."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한나절 거리 정도 떨어진 곳에 갈대가 길게 우거진 곳이 있다 하더군요."
"좋아. 그곳에 매복한다."
군터는 군대를 매복시키고 정찰병을 더 풀어 젠탄테르군을 찾게 했다.
하루하고 반나절 가량이 지났을 때. 귀환한 정찰병 무리가 이천 가량의 군대를 보았음을 보고했다.
'왔군.'
그들은 예상했던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게 움직였다. 그들이 부근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을 접한 군터는 매복시킨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말의 고삐를 고쳐 쥐었다.
피잉-!
망을 보던 병사가 시위를 당기니, 효시가 높이 올라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군터는 기병들을 몰고 당황하는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적이다!"
적의 지휘관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군터는 뒤따르는 기병들보다 한참을 앞서 나가 소리를 지르는 적장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마, 막아!"
친위대로 보이는 병사들이 다급히 가로막았으나 소용 없었다. 군터의 손에 들린 검은 창이 한 번 번뜩이니 앞으로 나섰던 병사 두 명의 목이 나란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 이놈!"
콰앙!
적장의 머리가 사라졌다. 말은 다리가 부러져 주저앉았고, 이천 군세의 지휘관은 한 순간에 뭉개진 고깃덩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