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위글로우가 함락당했습니다."
수하의 보고를 들었으나 시어문드는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지금 고심 중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된 고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수하의 보고를 듣고서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을 어느 정도 굳혔다.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이야;'
새삼 제국군의 힘을 느꼈다. 동시에 군터의 말이 떠올랐다. 죽일 수 있지만, 한 번 살려주었다는 말. 그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베이고르가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함은 분명하지.'
베이고르가 성립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이 황제의 승하 후 황자들의 내전이 치열해지면서 그들이 국외의 상황에 대해 손을 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덕분에 7황자와 정전 협정까지 맺을 수 있었던 것이고.
허나 제국의 북부가 7황자의 손에 거의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시점에, 이유야 어찌 됐든 제국이 침공을 해온 이상 전면적인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베이고르와 제국이, 7황자가 맞붙는다? 사실 그 결과는 뻔하다.
'그들의 도움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때에는 이미 베이고르의 남부와 동부가 초토화 된 후일 터. 그렇다면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이다.
"다시 전령을 보내라."
수하들의 시선이 쏠렸다. 시어문드는 그 시선 속에 차 있는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씁쓸해졌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저 제국군과 맞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에서부터 이미 꺾여 있는 것이다.
"적의 기세가 막강하니, 감히 대적하기가 힘들다. 베이고르에 충성을 다한다면 가장 먼저 무덤에 이름을 쓰게 될 뿐이니. 영지가 무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으로서는 7황자에게 항복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래. 그 정도만 전해도 영주님께서는 이해하실 것이다."
그의 주군인 센트리온 남작은 겁이 많은 자였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과 그가 가진 것들이었으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충성에 목을 매지는 않을 터였다. 사실 지금 이렇게 군사를 내어 파병을 한 것 역시 시어문드의 강한 주장으로 인한 것이었을 뿐, 남작 자신은 마지막까지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대놓고 드러냈었다.
"백기를 걸고 위글로우로 사람을 보내라."
*
"다시 일어나지는…못하실 듯 싶습니다."
"그런가."
의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는 듯이, 목숨만 살려달라는 듯이 벌벌 떨었지만 군터는 그를 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이럴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물러가라."
"예, 옛."
군터가 라일라의 목을 비틀어버린 직후, 막시밀리언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군터가 본 막시밀리언은 이미 다 타고 재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그렇게까지 움직였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아마도 미겔의 심장을 찌를 때 보였던 분노. 그것이 다 타버린 그에게 마지막 힘을 불어넣어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만, 우리로서는 다행인 일 아닙니까?"
더크만이 말했다.
"영주를 밀어낸 실세 놈들을 다 잡아 죽였고, 영주까지도 알아서 사라져줄 테니 이곳을 통제하기가 한결 쉬워질 겁니다."
"맞는 말이다."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복자는 정복자의 논리로 생각하고 바라봐야 한다.
"천이백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한 곳에 몰아두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습니다. 너무 일찍 항복을 해버린 탓에……."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무장을 해제시켰다지만 싸울 줄 아는 장정들이 천이백이나 있다는 것은 적잖은 위험요소가 된다. 그러면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니, 그건 곧 고스란히 전력을 낭비하는 셈이 된다.
"끌고 가서 전투에 투입시키거나, 아니면 따로 처리를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도 무기를 쥐어주고서 제대로 부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고기방패로 쓰거나, 전장에서 진지를 구축하거나 할 때나 투입하겠다는 거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포획한 포로들에 대한 처분은 그게 보통이었다.
"허나, 아깝지 않습니까."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물론 포로들을 그리 다루는 것이 통상의 방식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코누다이안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들은 한때 코누다이안 군부의 수장이셨던 장군을 기억하고 있고, 장군의 지휘를 받는 데 익숙합니다. 비록 장군께서 지금 제국군을 이끌고 코누다이안을 점령하셨으나, 앞서 이야기가 나왔듯이 그들은 지도자를 잃었으니 장군께서 그들을 좋은 말로 달래시는 한편 전공에 따른 포상을 약조해주신다면 그들은 기꺼이 장군의 병사가 될 것입니다."
양쪽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 각자 할 말을 마친 이들이 군터의 답을 기다렸다.
"쓸 수 있는 병력은 많을수록 좋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쓸 수 있는 병력이라면 말이다."
표정이 밝아진 살라스에게 짤막하게 대꾸하고서, 군터는 얼마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시어문드의 전령을 들이도록 했다.
"군터 장군께 인사 올립니다. 시어문드 장군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항복인가?"
"예. 하옵고, 저희 장군께서는 센트리올의 안전과 저희의 주군이신 센트리온 남작님에 대한……."
"저항하지 않는다면 살려줄 것이고, 처우는 황자 전하의 뜻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장군께서 말씀을 해주신다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시어문드에게 전해라. 항복을 할 것이라면 직접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으라고 말이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안색이 흙빛이 된 전령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문드가 병사 십여 명을 대동하고 위글로우로 들어왔다. 그는 군터가 전했던 대로 그를 보자마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소관의 무례를 주인에 대한 어설픈 충정의 표현이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한다. 그래서, 충신이 되고 나니 어떤가? 뿌듯한가?"
"일부는 진정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센트리온 남작께서는 하잘것없는 이 몸을 알아봐주시고 중임을 맡겨주신 분입니다."
"자네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전하께 상신하겠다. 그 전까지는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할 것이다."
"장군의 은혜에는 거듭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센트리올군에 대한 문제까지 해결하고 나니 남은 것은 위글로우, 나아가 코누다이안에 대한 후속처리였다. 도시를 함락시켰다고 해서 온전히 점령했다 할 수 없으며, 수도를 손에 넣었다 해서 영지 전체를 복속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싸워서 얻는 것보다 얻은 후에 안정을 시키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장군."
사로잡은 관료들에 대한 처우를 논하려 하는데, 회의실 밖을 지키던 무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군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위벨이라는 자가 장군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듣자 하니 꽤나 높은 신분인 것 같습니다만……."
"위벨?"
"장군께서 아시는 자인지."
안다 뿐이겠는가. 한때 함께 코누다이안을 위해 일했던 사이다. 또한 영주였던 막시밀리언이 각별히 총애한 신하이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 있었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더군요."
"감옥?"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들었지만, 군터는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기로 하고 그를 불러올 것을 명했다. 자연히 회의자리는 파해졌고, 관료들의 처우에 대한 논의는 차후로 미루어졌다.
"군터 경. 아니, 군터 장군으로 불러드려야 할까. 아무튼 오랜만입니다. 정정해 보이시는군요."
"그대는…고초가 심했던 것 같군."
빈 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 위벨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병자처럼 퀭한 눈과 푹 들어간 볼. 앙상해진 몸 등.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하자면 깁니다. 쿨럭! 허나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치렀을 뿐입니다. 미겔과 미트라스, 영주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몸이 상한 모양이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장군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저 역시 신경 쓰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 한 목숨, 이미 미련을 두지 않은지 오래입니다."
위벨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듯했다. 군터가 기억하던, 누구보다도 정력적이던 사내는 이제 없었다.
"허면 나를 보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 놓아버렸습니다만, 아직도 놓지 못한 한 가지 미련 때문입니다."
"그게 뭐지?"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수단이며, 기회일 수 있겠으나 거기에 휩쓸리는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시련입니다. 장군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영주님을 섬기면서, 더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부족한 이 한 몸의 모든 것을 짜냈습니다."
"알고 있다."
위벨은 고위 관료답지 않게 순수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때때로 치밀함과 비정함을 보이기도 했으나, 그 동기 자체는 순수했다. 그의 말처럼, 백성들을 위한 위정자의 마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놓았습니다만, 마지막까지도 그 하나만은 놓지 못하겠더군요. 하여 장군께 청을 올리는 것입니다. 부디…일찍이 우리가 다스리고 지켰던 백성들임을 상기하시어 관대한 정복자가 되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그 말을 하는 위벨의 눈은 허허로운 가운데 간절했다. 군터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그 눈에 담긴 간절함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장군의 덕에 이제야 편해질 수 있겠군요."
"집으로 돌아가게. 의사를 보내도록 하지."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의미 없는 일입니다."
위벨이 물러가고, 군터는 그에게 의사를 보냈다.
다음날. 의식을 잃고 있던 영주가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나절이 지나기 전에 위벨이 그 뒤를 따르듯 눈을 감았다.
"기분이 묘합니다."
살라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감정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냈다.
"누구나 다 죽는다. 죽음은 모든 생명의 숙명이지."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머리는 아는 것을 어리석은 가슴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막시밀리언도 위벨도, 코누다이안도, 모두 과거의 흔적이다. 그런 흔적들이 하나 둘씩 지워지는 것은 현재에 남은 이에게 상실감을 안겨준다.
군터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둑한 하늘에 낀 구름 사이로 자그마한 달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