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이, 이게 무슨……."
미트라스는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이미 휘하의 군졸들을 집결시킬 것을 명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최대한 자신의 안위만큼은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백여 명 가량의 병사가 모이고 나서 그제야 움직이려 자택을 나섰을 때. 미트라스는 뭔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역적 미트라스의 목을 베어라!"
그의 자택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화살을 쏘아댔다.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이, 미트라스는 그를 둘러싼 수하들 틈에서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게 무슨 개 짓거리냐! 어떤 놈이냐! 주동자가 누구야!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느냐?!"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병사들이 쫙 갈라지더니 꽤나 지쳐 보이는 사내가 무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처음에 미트라스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허나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일그러졌던 미트라스의 눈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번쩍 뜨였다.
"다, 당신…어떻게……."
"섭섭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내가 네게 나름대로 베풀었다 한들, 네게는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 그 계집과 미겔이 네게 더 큰 것을 약속했을 테고."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살다 보면 종종 뒤통수를 맞기도 하지.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야."
막시밀리언을 본 순간, 미트라스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의 사병들 역시 마찬가지.
"넌 그저 일개 말이었을 뿐이니, 편히 보내주겠다."
사냥감에 몰려드는 짐승들처럼, 막시밀리언이 몸을 돌리자마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미트라스와 그의 수하들을 도륙했다.
*
"다시 조용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성내의 소란이 가라앉을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는 결말이 나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까에 비해 눈에 띄게 조용해진 내성 쪽을 바라보며 군터는 생각에 잠겼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성문을 열어도 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고, 상황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서 성의 수비를 포기하다니?
"함정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장군. 안쪽의 상황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명을 내려주십시오."
수하들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기다려주기만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군터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국군 병사들이 조용히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다리를 걸고 성벽 위로 올라가기까지 위글로우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성벽의 계단을 통해 내려가 성문을 열 때까지도.
"어이가 없군."
"보아하니 전부 다 안쪽으로 몰려간 것 같습니다."
불길과 고함, 비명 소리는 내성의 중심 시가지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모조리 그쪽으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병사들을 통제해라. 상황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항하지 않는 자들까지 손댈 필요는 없다."
"예."
군터는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성벽과 성문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넓게 펼쳐 내성의 중심 시가지를 중심으로 포위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집에 숨어있던 위글로우의 시민, 그리고 병사들이 무장해제 당하고 한 곳으로 끌려갔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는 놈은 즉시 베어버리겠다!"
제국군은 차근차근 움직였다. 그들은 착실하게 위글로우를 손에 넣어갔다. 시민이건 병사건 저항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전투가 끝났음을 그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이곳의 영주라는 자가 병상에서 일어나 역적들을 제거하고 있답니다."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것 같던 아드리안이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군터와 살라스, 할렌을 비롯해 한때 베이고르와 코누다이안에 몸 담았던 이들이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미트라스라는 놈의 목은 이미 떨어진 모양이고, 지금 영주가 그를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미겔이라는 놈을 잡으러 움직였다는군요."
"장군."
아드리안의 말에 살라스가 군터를 돌아보았다.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가봐야겠군."
"직접 가시렵니까?"
"미겔이라는 놈에게 진 빚이 있다."
"아아. 그랬었지요."
"모시겠습니다."
살라스와 할렌을 비롯한 천부장들이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군터는 그 외에도 수백 병사를 거느리고 미겔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찰대 본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
감찰대 본부 앞에서 두 무리가 대치했다. 각기 막시밀리언이 이끄는 병사들과 미겔이 이끄는 감찰대의 병사들이었다.
"그래. 이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겠어. 당신이 벌인 일이었군. 국경에서의 그 말도 안 되는 사건 말이야."
미겔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막시밀리언도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알아차렸으니 똑똑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야 알아차렸으니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당신이 이긴 것 같나? 아니야. 당신이 이뤄낸 모든 것이 이제 곧 저 제국군의 발 아래 통째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도적 놈에게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다."
"대단하군. 그나저나 어떻게 일어난 거지? 그녀는 당신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
"글쎄. 그 계집도 결국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
"이제 다 끝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계집은 어디에 있지? 아마 저 안에 있을 것 같은데. 이 상황이 되도록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가? 정말 어지간한 계집이군."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미겔을 보며 막시밀리언이 조소했다.
"너도 그 계집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군.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지. 나 역시 그랬으니까."
얼굴은 웃고 있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묻어 있었다.
"그 계집이 네게 무엇을 속삭이던가? 달콤했겠지. 그 공기, 숨결.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고, 세상이 내 품에 들어온 것만 같았을 거야. 하지만 그것은 독이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독이지. 이제 내가 그랬듯, 너 또한 그 독에 취했던 대가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아니. 난 너를 죽이고 이 도시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녀와 함께."
"아직도 미몽에 취해 있군."
"송장이면 송장답게 얌전히 누워있었어야 했다!"
미겔이 검을 뽑아 들자 감찰대의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에 막시밀리언이 제지하는 무관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섰다.
"마지막 싸움이다! 너 놈의 목을 베면 너희 모두 살 수 있다! 싸워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위해서!"
와아아아!
쇠락한 영주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삶의 욕구에 대한 자극이 유효했던 것일까. 병사들은 눈에 불을 머금고 감찰대의 병사들에 맞서 싸웠다.
채채챙!
"아악!"
수는 막시밀리언 측의 병사들이 더 많았다. 족히 두 배는 되는 수였다. 하지만 감찰대의 병사들은 미겔이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으며, 무장 역시 보통의 병사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문에 전투는 백중세였다. 살기 위해 죽고 죽이는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
서걱!
"흐으으……."
미겔은 또 한 명, 자신에게 덤벼들던 병사의 목을 베었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병사를 걷어차고,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막시밀리언에게 다가갔다.
"영주님!"
영주의 곁을 지키던 몇몇 무관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들의 솜씨는 그들의 충성심만큼 대단하지 못했다. 미겔은 그의 지위가 아니라 일신의 무공으로도 코누다이안 전체를 통틀어 한 손에 드는 강자. 그런 그가 작정하고 검을 휘두르니 그를 막아선 무관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땅에 널브러졌다.
"좋은 검이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내 생일 선물로 들어왔던 물건 같은데."
"알아보았나. 맞아. 본래 당신의 검이었지. 이제는 내 것이지만."
미겔은 막시밀리언에게 걸어가며 히죽 웃었다. 피 묻은 입 꼬리가 제법 섬뜩했으나 막시밀리언은 덤덤했다. 그는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고, 미겔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손에 쥔 검을 들어올릴 뿐.
"설마 나와 싸울 생각인가? 추한 꼴을 보이는 것보다는 그냥 죽는 게 편할 터인데."
"기왕에 힘겹게 일어선 마당에, 얌전히 당해줄 수는 없지."
"좋아. 그렇다면 영주님의 칼 솜씨나 한 번 보도록 할까!"
미겔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그가 날카로운 검을 내리 그었다. 막시밀리언이 인상을 찡그리며 칼을 들어올렸으나, 강맹한 미겔의 검을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퍼억!
그러나 두 사람의 칼이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뒤쪽에서 날아온 시커먼 무언가가 미겔의 머리에 부딪쳤고, 그로 인해 미겔의 몸이 허공에서 뒤로 밀린 까닭이었다.
"이게 무슨……."
미겔은 엉거주춤 착지하자마자 자신이 맞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것인 것 모를 수급임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뒤늦게 고개를 들어 막시밀리언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괜한 짓을 한 겁니까?"
아드리안이 피 묻은 손을 털며 물었다.
"아니. 잘했다."
군터는 짤막하게 답하고 앞으로 나섰다. 막시밀리언이 그를 보며 픽 웃었다.
"오랜만이군.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그 어깨의 전포 때문인가?"
"영주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이십니다."
"아직 날 영주님이라 불러주는가? 조금 감격스럽군."
"사정이 이리 되었으나, 과거 베풀어주셨던 은의를 잊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 놈의 목을 내게 양보해주겠나?"
"그것은 힘들겠군요. 빚이 있어서 말입니다. 다만, 계집의 목은 넘겨드리지요."
"…어쩔 수 없군."
한숨을 내쉰 막시밀리언이 갑작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
군터는 막시밀리언이 미겔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제지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숨이 멎을 듯 달려가는 막시밀리언의 모습에서 그의 울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하다. 막시밀리언은 어찌 보면 미겔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으니. 자신 역시 미겔에게는 빚이 있지만, 옛 상관에 대한 예우로 양보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 커윽……."
미겔과 막시밀리언의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이 순간, 두 사람은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털썩!
이야기가 끝났다. 미겔의 눈은 빛을 잃었고, 막시밀리언은 심장을 찌른 검을 묘비처럼 남겨두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장군."
"놔둬라."
저래도 되겠냐는 듯 그를 쳐다보는 할렌에게, 군터는 짧게 답했다.
미겔이 마지막으로 숨을 헐떡이는 동안 치열했던 전투는 거의 끝나 있었다.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군터와 그의 병사들을 보고 감찰대의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희망과 의지 모두를 잃은 그들은 비틀거리는 막시밀리언을 막아서지 않았다.
끼이익-
막시밀리언이 시체들 사이를 걸을 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여인과 아이.
막시밀리언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여전히 귀신 같군. 이제 네 차례가 된 줄은 어찌 알았느냐?"
"신께서 들려주셨지요."
"그래. 신께서 오늘 네가 죽을 것이라고도 말씀해주셨느냐?"
"예. 허나 당신에게는 아닙니다."
"아니. 네 신은 틀렸다."
막시밀리언은 땅에 뒹굴던 칼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여인, 라일라를 향해 걸어갔다.
"……."
라일라는 그런 막시밀리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더니, 외투처럼 두르고 있던 모피를 뒤로 넘겨 벗었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과 몸이 훤히 드러났다.
"으음."
막시밀리언은 칼을 쥐고 라일라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칼을 들어올렸으나, 부들부들 떨리는 팔은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했다. 누군가 칼을 휘두르려는 그의 팔을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멈춰서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당신은 나를 해하지 못합니다."
라일라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막시밀리언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그토록 분노하면서도 그는 칼을 마저 휘두를 수 없었다. 그의 눈 또한 라일라의 눈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이 년을 죽여라! 사지를 하나하나 베어 죽여버리란 말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병사들에게 악을 쓰는 것뿐이었다.
"마녀를 죽여라!"
누가 그리 말했을까. 칼을 쥐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영주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벌 떨게 하는 라일라의 모습은 분명 비범한, 어쩌면 사악한 여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영주의 명에 병사들이 라일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으, 으으……."
살기등등하게 달려든 병사들은 가까이서 라일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못 박힌 것처럼 멈춰서 침음만 흘려댔다. 침을 흘리거나,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막시밀리언이 그런 병사들을 보며 탄식했다. 한심하다 욕할 수도 없었다. 당장 그 자신조차도 바로 앞에 있는 그녀를 베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라일라가 읊조리듯 말했다.
"당신은 나를 죽이지 못합니다."
"나는 어떤가."
거대한 그림자가 막시밀리언을 뒤덮었다.
막시밀리언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간 군터가 손을 뻗어 라일라의 목을 움켜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네 년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실수를 했었지."
"당신은…죽음입니다. 나의…죽음이며…수 없이…많은 것들…의…죽음……."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큼직한 손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직!
정면을 바라보던 얼굴이 정반대로 돌아갔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나직이 중얼거린 군터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덜렁거리는 몸뚱이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