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저런 코딱지 만한 성 따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제대로 불이 붙었다. 그들 모두는 가장 먼저 성벽을 넘어 베이고르의 깃발을 꺾어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의욕이 충만한 수하들 누구에게 명을 내려도 오늘 내로 위글로우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여기서 조금 더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급함은 독이다.'
황자와 나눴던 수 없는 담론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다. 언제나, 어디서나 조급함은 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신중을 기하라는 뜻까지는 아니나, 절대로 조급해져서는 안 된다.
'이미 승리는 확정적이지.'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서 한 번쯤 고삐를 느슨하게 쥐어도 되지 않겠는가. 전쟁은 이미 시작 됐고, 피해는 적을수록 좋다.
"놈들에게 투항을 권해라."
"투항 말입니까? 놈들을 살려주실 생각이십니까?"
"미겔, 미트라스. 그리고 라일라. 그 셋의 목을 베어서 바친다면 성 내에 있는 이들의 목숨을 보장한다 전해라. 그러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면 성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는 말도 함께."
군터의 말은 곧 목청 좋은 병사들의 입을 통해 내성에 있는 위글로우군에게 전해졌다.
"그 셋의 목을 바치면 살려준다고……?"
"미트라스 경과 미겔 경은 그렇다 치고, 라일라가 누구야?"
"그 있잖아. 그 영주 부인 말이야."
성벽 위의 병사들이 웅성거렸고, 성내의 장교들이 입술을 깨물었으며, 불안에 떨던 관료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모두가 패배를, 죽음을 직감하고 있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단 세 명의 목만 베어 넘기면 살려주겠다 하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 말을 하는 적장이 한때 그들 모두가 알던 군터였기에 그 동요는 더욱 컸다.
"군터 경이 거짓을 말씀하실 분은 아니지."
"그러고 보면 미겔 경과 미트라스 경이 비겁한 수를 써서 군터 경을 축출했다는 소문이 있지 않았나?"
"그 둘만…아니, 그 라일라라는 여자까지 셋만 넘긴다면 우린 살 수 있어."
창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병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런 병사들의 동요를 알아차린 장교들이 칼을 빼 들고 돌아다니며 윽박을 질렀다.
"엉뚱한 생각들 하지 마라! 저 군터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잊었느냐! 영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고 영주님의 암살을 도모하다 실패하고 제국으로 망명한 자다! 그런 자의 말을 신용할 수 있겠느냐!"
한 장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니는데, 때마침 그의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장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야기 말인데, 석연찮은 부분이 있지 않은가?"
"무슨 소리인가!"
소리치던 장교가 짜증스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이 흔들리는 것을 막으려는 참에 동료 장교라는 자가 딴지를 거니 화가 난 것이다.
"영주님 하니 생각이 난 건데. 영주님께서는 대체 어찌 되신 건가."
"와병 중이시지 않나! 몰라서 묻는가?"
"그래. 미겔 경도, 미트라스 경도 그리 말을 했지.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영주님께서 병환을 명목으로 칩거하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영주를 앞세워서 전면에 나선 영주 부인이나, 그녀의 손발이 되어 인사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저들 마음대로 주물러대기 시작한 미트라스와 미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야! 그리고 두 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이 무슨 불경……."
바락바락 이어지던 목소리가 끊겼다. 복부를 꿰뚫고 나온 한 자루 검 때문이었다.
"이, 이게……."
"그렇게 모르는 척을 하고 싶겠지. 네놈은 미겔의 개니까."
속삭이는 말에 그의 눈이 부릅 뜨였다. 하지만 몸 속을 파고 든 검이 한 번 크게 흔들리자 그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는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다! 세 사람의 목으로 나를 포함해 수천이 넘는 사람이 살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피 묻은 검을 뽑아낸 장교가 어리둥절해 하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나는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뒤에서 제 살 궁리만 하는 이들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은 자! 살고 싶은 자! 그런 이들이 있다면 나와 함께 하자! 단 세 명의 목만 베면 우리는 모두 살 수 있다!"
"나는…죽고 싶지 않아!"
"나, 나도!"
하나 둘씩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생겼다. 그렇게 여러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싶었을 때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수백이 되었다.
와아아아-!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열기는 삽시간에 내성의 곳곳을 물들였다.
*
와아아-!
갑작스레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에 시비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창 밖을 조심스레 내려다 보았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단의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렴풋이 보였다. 아마도 전투가 일어난 것 같았다.
'제발…….'
제국군은 잔혹하여 병사가 아닌 일반 시민들조차도 가리지 않고 살육한다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제발 저 병사들이 용감히 싸워 제국군을 막아주기를 바랐다.
"함성이 들리는군."
쨍그랑!
뒤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 시비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장식품과 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몇 번 거칠게 숨을 쉬다가, 덜덜 떨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가 바라본 곳. 그곳에는 죽은 듯이 누워 있어야 할 영주가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여, 영주……."
어찌나 놀랐던지, 시비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주는 그런 그녀의 반응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힘 빠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좀 도와주겠느냐. 오랫동안 누워 있었더니 혼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구나."
"어, 어어……."
"이쪽이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덜덜 떨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영주님!"
문을 걷어차듯 열며 들어온 것은 두어 명의 무관들, 그리고 십여 명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일어나 있는 영주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군례를 취했다.
"이리 다시 뵙게 되니……."
"나 또한 기쁘다. 허나 지금은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좋아. 일어나는 게 쉽지 않군. 좀 도와주겠나?"
"예, 옛!"
장교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 영주, 막시밀리언은 몇 번을 휘청거렸으나 끝내 자신의 두 다리로 서는데 성공했다.
"성내의 상황은 어떤가?"
"혼란스럽습니다. 군터 경이 세 사람의 목을 내놓는다면 성내의 모든 이들을 살려주겠다 말했고, 그 말에 병사들이 동요를 일으켰지요. 저희는 그 동요를 틈타 병사들을 부추겼습니다."
"세 사람이라……. 그렇지. 군터 그 녀석도 그 년, 놈들에게 쌓인 게 있겠지."
피식 웃은 막시밀리언이 병사 한 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에게 그가 짤막이 말했다.
"검."
병사가 황급히 허리춤의 검을 풀러 그에게 건넸다. 막시밀리언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감촉에 집중하다가 곧 발걸음을 옮겼다.
"아. 그렇지."
침실의 문을 나서기 전, 그는 잠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덜덜 떨고 있던 시비가 그의 눈길을 받고 대뜸 무릎을 꿇었다.
"여, 영주님!"
"왜 그리 떠느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그간 고생 많았다.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돌보랴, 그 계집의 눈 노릇을 하랴…노고가 컸겠지."
가뜩이나 창백해져 있던 시비의 안색이 이제는 하얀 것을 넘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내가 산 송장이나 다름 없었다지만, 그런 험담을 면전에서 해서야 되겠느냐."
"여, 영……."
"아무튼, 고생이 많았다."
그 말을 끝으로 영주는 침실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 장교들과 병사들도 방을 빠져나갔다. 단 한 명의 병사들 제외하고.
"아, 아아……."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병사는 말 없이 칼을 뽑았고, 그녀는 다급히 입을 떼었다. 하지만 병사의 칼은 그녀의 한 마디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서걱!
*
"여, 영주님?"
통제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내성의 상황은 난잡했다. 지휘관을 잃거나, 심지어 지휘관을 직접 죽인 병사들이 제 멋대로 날뛰며 미겔과 미트라스,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런 통제불능의 혼란 속에서도 막시밀리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들어라. 미겔과 미트라스는 역적이다. 그 놈들을 따르는 무리 역시 역적. 이제껏 나는 놈들의 흉수에 당해 기회를 엿보아야만 했다. 허나 이제 내가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으니, 나는 놈들에게 놈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다."
성밖에 몰려와 있는 제국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묻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영주 역시 미겔과 미트라스를 적대할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었다. 즉,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칼 끝을 돌렸던 그들에게 명분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도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영주의 명이라는 명분이.
"영주님을 따르라!"
처음 영주 관저를 나설 때는 십 수 명에 불과했던 인원이 순식간에 백을 넘어섰다. 그 후로도 그들과 조우하는 모든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합류했다.
"영주님. 그 계집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영주님 역시도……."
"눈치가 빠른 계집이다. 가장 안전하다 생각하는 곳으로 도망쳤겠지. 아마도……."
막시밀리언이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느릿하게 걸음만 옮겼을 뿐인데도 식은땀이 온 몸을 적시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감찰대 본부로 갔겠지. 미겔 놈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럼 바로 그곳으로 가야겠군요."
"아니. 미겔 놈과 그 계집보다 미트라스가 먼저다. 놈은 놈의 가문과, 다른 유지 가문의 사병들을 휘하로 두고 있다. 놈들이 뭉치면 제압하기가 쉽지 않을 터. 놈이 대응하기 전에 한 발 앞서서 처리해야 한다."
짙은 그늘이 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성내가 소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
군터는 외성의 성벽에 올라 내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살라스를 비롯한 천부장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군터의 선언 이후로 시끌시끌해진 내성 쪽을 바라보며 저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정말로 알아서 목을 가져다 바칠 모양인데."
"그야말로 오합지졸이군. 살려주겠다니까 낼름 상관의 목을 바치겠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군터는 침묵하며 점점 더 커져가는 불길과 연기를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