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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74화 (474/1,064)

474화

"장군께서 전쟁을 입으로 하시는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진심으로 투항을 권했건만, 돌아온 것은 도발 섞인 거절.

물론 군터는 시어문드가 그의 말 몇 마디에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투항을 권했던 것은, 일찍이 함께 전쟁을 치렀던 만큼 시어문드의 재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이기엔 아깝다.'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창 대신 활과 화살을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위를 세 번 당겼다.

피잉!

연속으로 날아간 세 대의 화살은 정확히 시어문드의 뒤편에 있던 세 명의 무관을 맞췄다. 한 명은 목을, 두 명은 가슴을 움켜잡고 낙마했다. 시어문드가 경악하여 입을 쩍 벌림과 동시에 군터가 다시 한 번 외쳤다.

"자네가 알던 것이 맞으니 괜한 말로 도발할 필요 없다! 난 전쟁을 입으로 하지 않아! 내가 지금 한 번 자네를 살려주었으니, 군영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게! 답은 위글로우가 다 불타기 전까지 듣도록 하지!"

군터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센트리올 군이 뒤늦게 화살을 쏘아댔으나 그 화살들은 군터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고개를 꺾었다. 군터가 말을 달려 군영으로 돌아갈 때까지, 시어문드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

더크만이 이끄는 본군은 막 날이 저물 무렵 즈음에 위글로우의 성벽 앞에 당도했다.

"동쪽의 적은 뭡니까?"

더크만은 군터에게 군례를 올리자마자 오면서 보았던 센트리올의 군대를 언급했다. 그들은 처음 언덕 위에 포진한 뒤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더크만이 이끄는 본군이 당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공략하는 동안 이천을 뒤에 남겨두겠다. 먼저 움직인다면 대응하되, 그게 아니라면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

군터는 시어문드가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방관할 것이라 보았다. 그가 움직일 가장 좋은 시기는 더크만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이었다. 위글로우와 공조하여 협공을 가하는 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시어문도 역시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서 군터는 그에게 전의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다만 전장에서 확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천 병력을 남기기로 했다.

"내일 날이 밝음과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겠다."

위글로우를 감싼 포위망이 더 두터워졌다. 도시 전체가 전보다 더 가라앉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성벽 위로 보이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뚜렷하게 감돌고 있었다.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는 싸움입니다."

할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할렌만이 아니라 군터와 함께 베이고르에서 제국으로 넘어왔던 수하들은 모두 비슷한, 흥분과 기대로 들뜬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성벽을 넘기 전까지는 들뜨지 마라."

"예."

군터는 수하들을 가볍게 다독이며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적당히 긴장의 끈을 당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해가 막 고개를 들었을 때, 위글로우의 사방을 포위한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와아아-!

사방에서 비슷한 수의 병사들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지만, 사실 주공(主攻)은 정해져 있었다.

"무리하게 성문을 칠 필요는 없다. 성문은 성벽을 넘어 뒤에서 열 것이다. 시선만 끌어라."

"알겠습니다."

군터가 이끄는 남쪽의 군세는 빠르게 성문 앞까지 치고 들어갔다. 틈 없이 이어서 든 방패로 쏟아지는 화살을 막았고, 어젯밤에 조립한 충차를 이용해 성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공성병기를 이용해 성문을 돌파하려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성벽 위에 걸리기 시작한 사다리와, 그를 오르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간다."

군터와 정예 병사 백 명은 나머지 병사들과는 따로 떨어져 성벽을 올랐다. 사다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뾰족한 갈고리에 줄을 연결한 것을 성벽 위로 던져 걸치고 그것을 타고 올랐다. 성벽을 밟다시피 하여 오르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적들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반 수 정도가 성벽 위에 올라온 뒤였다.

"뒤를 받쳐라!"

성벽을 올라온 병사들이 군터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군터는 그들과 함께 성벽을 내려갔다. 성벽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들만 신경 쓰고 있던 적군은 한 발 빠르게 성벽에 오르고, 곧바로 내려가는 군터와 병사들을 제대로 막아서지 못했다.

"적이 성문을 노린다! 막아라!"

뒤늦게 군터의 의도를 눈치 챈 적군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군터는 이미 성문 뒤를 지키던 병사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비켜라!"

성문을 고정시키는 걸쇠는 두 개였다. 둘 다 사람의 허리만한 굵기라 들어올리려면 적어도 너덧 정도는 붙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군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군터는 홀로 달려가 두 개의 걸쇠를 순식간에 뽑아냈다.

"성문이 열렸다!"

걸쇠가 제거된 성문이 활짝 열리고, 성문 밖에 있던 병사들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그 즈음해서 적의 기세는 완전히 꺾여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신호를 보내라!"

군터의 명에 기수들이 일제히 지휘기를 들어올렸다. 도시 밖,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수들이 올라간 깃발을 보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 둥-!

북소리는 다른 쪽에 있는 아군에게 보내는, 약속된 신호였다.

"벌써? 빠르군."

"병사들을 뒤로 물린다. 천 명을 남문으로 보내."

다른 쪽에서 도시를 공략하던 지휘관들이 신호에 반응했다. 그들은 군세를 뒤로 물리는 한편, 일부 병력을 남쪽으로 보냈다. 제국군이 물러난 줄 알고 숨을 돌리던 위글로우의 군대는 남문으로 우회해 돌아가는 병사들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그들이 남문이 돌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움직일 무렵에는 이미 우회한 병력의 상당수가 뻥 뚫린 남문을 통해 위글로우로 들어서고 있었다.

"밀어붙여라."

군터는 내성까지 연달아 돌파하기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동, 북, 서문 쪽으로 병사들을 돌렸다.

"뭐야 이 놈들은!"

"아아악!"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곳 저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병사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무참히 살육 당했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전장을 특정할 수 없는 혼잡한 상황에서 일반 백성과 적병을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병사들의 눈은 뒤집어졌고, 그들에게 있어 아군이 아닌 이들은 모두 적이었다.

"북문으로 간다! 가로막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버려라! 하지만 다른 길로 새는 놈들은 내 직접 목을 베어주겠다!"

할렌이 기마병을 이끌고 길을 열었다. 병사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베어 넘기며 이동하니, 보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

군터는 그 난장판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일부 병사를 거느리고 검게 그을린 건물 위에 올라 본격적으로 불타기 시작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씁쓸하군요."

그의 옆에서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토어릭이 문득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냐."

"한때 우리는 저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까. 헌데 지금은 우리가 지켜야 했던 이들을 우리 손으로 살육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과거의 이야기지."

"장군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냐라. 토어릭이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말로 군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말했듯,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현재는 현재고. 현재에 과거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렇습니까. 장군께서는 역시 강한 분이십니다."

"별로. 그저 약해지지 않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그러길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지요.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으시니, 강하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들이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전황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꿔가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이 몇 배로 불어났고, 서문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살라스님이 가장 빠르군요."

그러나 그런 말을 하기가 무섭게, 동문에서도 병사들이 진입해 들어왔다. 아드리안이 있는 쪽이었다.

"다들 대단하군요. 오늘 안에 일을 끝마칠 수도 있겠습니다."

"애당초 오늘을 넘길 생각은 없었다."

잠시 후 북문까지 뚫렸다. 더크만이 이끄는 군세까지 도시에 진입하니, 사방의 제국군이 내성을 향해 진격하는 모양새가 갖춰졌다.

"쥐새끼가 속이 타겠군요."

"그렇겠지."

이제 조금씩 뜸해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군터는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시어문드 그 작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게야!"

미트라스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분통을 터뜨렸다. 거의 발작하듯 날뛰는 그를 그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외성은 적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이제 대체 어찌 해야……."

어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죽든가, 아니면.

"전세가 이미 기울었습니다. 이제 다른 수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투항을 한다면……."

서걱!

'투항'을 입에 담았던 자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졌다. 나오던 목소리가 끊기고, 그는 피가 쏟아지는 목을 움켜잡은 채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투항을 말하는 자, 모두 같은 꼴이 될 것이오. 그러니 이제부터는 말을 함에 있어 조금 더 신중을 기하길 바라지."

미겔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했으나, 그의 두 눈은 며칠 동안 잠을 설칠 것처럼 충혈이 되었으며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모두가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이미 이곳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전령들이 왕도를 비롯하여 인근 영지들로 출발했소. 저 밖에 있는 센트리올군을 보면 모르겠소? 그들은 우리의 요청을 받고 급히 달려온 원군이오. 비록 적의 세가 너무 크기에 교전을 벌이지는 못하고 한 발짝 물러나 있지만, 다른 영지의 군세가 당도한다면 그들과 힘을 합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싸워줄 것이오. 모두 아시겠소? 우리는 이제부터 죽을 힘을 다해 성벽을 사수해야 하오. 내 장담컨대, 이틀만 버티면 우리는 살 수 있소. 사흘도, 나흘도 아닌 단 이틀 말이오."

핏발 선 눈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쥔 채 이틀을 말하는 미겔. 그의 말에 동의를 하든 안 하든,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 입을 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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