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다. 평소 같았으면 미겔이나 미트라스가 나서서 소란을 가라앉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도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국경에서 사달이 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바로 엊그제였지."
미트라스가 나직이 미겔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은연중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떨림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지금 위글로우를 포위하고 있는 저놈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도 모르겠소. 이제부터라도 알아보고 대처해야겠지. 다행히 적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그대도 저 밖에 있는 게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
어찌 모르겠는가. 알아봐달라는 듯이 높게 들어올린 적기만 보더라도 성벽 밖에 있는 게 누구인지, 누구의 군대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일단은…상황 파악부터 해야겠지. 만약 저놈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면, 이는 명백한 협정 위반이요."
"놈이 설마 그것을 모르겠소? 저렇게 자신 있게 치고 나왔을 때는 저놈 나름대로 어떤 계산을 마쳤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느냐는 듯 미트라스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지금의 미겔은 평소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말을 하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지를 알고, 생각지 못한 답을 툭툭 내놓던 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트라스의 말에 미겔이 이를 갈았다. 살짝 멍해져 있던 눈빛도 바뀌었다.
"일단, 놈들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지금 당장 왕도와 인근 영지들에 사람을 보내야 하오. 이 소식을 전하고, 원군을 청해야겠지. 지금 도시 밖을 포위한 적의 수는 얼마 되지 않소. 저들만으로 위글로우의 성벽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니, 필시 뒤따라오고 있는 본대가 있을 것이오. 그 놈들이 당도하면 일이 어려워질 것이니, 서둘러야만 할 거요."
"적들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소. 사람을 보낸다 하지만 적들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소. 돌파가 가능할까?"
"뚫지 못하면 우리 모두 죽는 거요."
미겔은 원군을 청하러 갈 인원의 선별을 미트라스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자신은 영주 관저로 향했다. 정확히는 영주 관저에 있는 영주 부인의 처소로.
"군터 그 놈이 군대를 이끌고 도시 밖에 와 있습니다."
비가 한바탕 쏟아진 뒤의 강가처럼 자욱한 연기가 가득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항상 느끼는, 기이한 나른함이 전신을 적셨다. 미겔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다급했으나 끄트머리에 갈 즈음에는 잔뜩 힘이 빠져 있었다.
"알고 있어요.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미겔은 단 한 번도 이 여인에게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코를 간질이는 향을 맡기만 해도 이전까지의 모든 감정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귀와 눈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열리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잘것없이 느껴진다.
"그 자는 세상에 해가 될 흉험한 존재입니다. 그 자의 목을 베어오세요. 이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마세요. 내가 직접 그의 머리를 태우겠습니다."
장막이 걷히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한 아이의 어미라는 것을 믿지 못하리라. 주름 하나 없는 여인은 이제 갓 스무 살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미인이었다.
미겔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느릿하게 답했다.
"반드시…그리하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아드리안은 고개 숙인 수하를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뿐. 딱히 나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천오백으로 도시 하나를 포위하고 있는데 돌파하려고 작정을 하는 놈들을 다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방향도 아니고 여러 방향으로 한 번에 튀어나오는 놈들을 어찌 다 막는단 말인가.
"장군께 보고해라."
"예."
빠져나간 놈들이 원군을 불러올 것이다. 도시를 함락시키기도 전에 다른 쪽의 놈들까지 끼어들면 귀찮아진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하지."
아드리안은 막 출발하려던 수하를 멈춰 세우고 군터가 있는 군영 쪽으로 말을 달렸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그는 군터를 보자마자 대뜸 고개부터 숙였다.
군터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예상한 일 아닌가. 그래도 하루는 벌었군."
"오늘 도착한답니까?"
"아마도."
"이틀? 하루 하고 한 나절 정도 안에 성벽을 넘어야겠군요."
"그 정도도 필요 없지. 반나절이면 족하다."
"오…그렇습니까?"
아드리안은 남들이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거칠고, 제멋대로인 녀석이라는 그들의 평은 별로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그 스스로도 별로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자신은 그저 주관이 뚜렷할 뿐이었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지 못한다. 또한 마음에 안 드는 것을 그냥 못 본 척 넘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충돌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쁜가? 아니다.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옳은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남들이 그와 같이 행동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겁이 많거나, 그건 아니라 해도 대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대담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하고, 그들과 차별 된다고 여겼다. 그는 이제껏 자신보다 더 대담한 사내를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람. 새롭게 그의 상관이 된 이 사람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한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내가 봐왔던 그 누구와도 다르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개의치 않는다. 하고자 하는 바를 우직하게 밀어붙이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시도하고 해낸다. 그와 함께 단 며칠 말을 달렸을 뿐이지만, 아드리안은 그의 상관이 도무지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을 몇 번씩이나 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장군. 저 안에 장군의 원수 놈들이 있는 겁니까?"
"…그래."
"미리 알려주십쇼. 혹 제가 그 놈들을 보게 됐을 때 실수로 목을 쳐버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장난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말에 군터가 피식 웃었다.
패기 넘치는 수하의 말이 그의 귀에는 썩 유쾌하게 들렸다.
처음 라몬이 했던 우려 섞인 말과는 달리, 군터는 아드리안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할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거칠고 급하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아드리안은 할렌보다 훨씬 더 자유분방했다. 천부장 씩이나 되는 자가 이런 독특한 개성을 가질 수, 아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장군!"
풀어진 분위기에서 가볍게 잡담을 나누던 중. 막사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기가 돌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굳어지고, 군터의 건조한 눈길이 막 뛰어들어온 병사에게 향했다.
"동남쪽 언덕에서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깃발은……."
군터는 병사가 헐떡거리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병사가 말한 동남쪽 방향을 보았다. 꽤나 멀리 떨어진 언덕 위로 자그마한 깃발이, 그 주변에 뭉쳐 있는 군대가 보였다.
'센트리올의 군대로군.'
그는 휘날리는 깃발의 문장이 센트리올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언덕 위에 포진한 것인지, 잠깐 멈춰선 것인지 모를 군대는 대략 2천을 조금 상회하는 것 같아 보였다.
'빠르군.'
위글로우의 전령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받고 움직인 것이 아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국경의 소요를 접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일으킨 거라고 봐야 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서둘러서.
즉, 이쪽의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부터 완벽하게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먼저 치러 가기에는 모양이 좋지 않군요."
아드리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적이 포진한 지형을 보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전 병력이 기병. 적이 자리잡은 경사진 언덕을 올라 적에게 접근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런데…저놈들, 딱히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거겠지."
이쪽의 병력은 고작 천오백. 그것을 넓게 펼쳐 위글로우를 간신히 포위하고 있으니, 언덕 위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면 포위를 풀어야만 한다. 그리 되면 위글로우에서도 다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으니, 자칫 적을 양쪽에서 맞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터.
'과감하면서도 신중한 운용.'
군터는 언덕 위의 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훌쩍 말에 올랐다.
"어디를 가십니까?"
"따라오지 마라."
창 한 자루만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군터는 적군이 포진한 언덕을 향해 말을 달렸다. 뒤에서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가 어느 정도 말을 달렸을 때, 적군도 약간의 반응을 보였다. 가장 높게 깃발이 올라간 곳에서 뭔가 웅성거리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히히힝!
언덕 위의 적에게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군터는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외쳤다.
"거기 있는 적장은 누구인가! 혹 시어문드가 아닌가!"
깃발 아래 적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잠시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곧 수십 기의 기마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이 어느 정도 경사를 내려왔을 때, 군터는 가장 앞에 있는 익숙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군터 장군!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들렸다. 거리도 거리고, 그의 목청이 군터만큼 크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그 정도도 충분했다. 군터는 그의 말을 알아듣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충분히 가 닿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찼으니까.
"나 역시! 다시 만나 반갑군!"
"허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죽지 않고자 하니 자연스레 이리 되었네!"
"코누다이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얼핏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곡절이 있었던 간에 지금 우리는 이렇게 적으로 다시 만났으니, 옛 정에 연연하여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좋지! 허나 자신 있는가! 이미 전쟁은 시작 됐네! 우리는 선봉일 뿐이야! 오늘 내로 9천의 병사가 합류할 것이고, 또 며칠 뒤에는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당도할 걸세! 그 뒤로도 막강한 군세가 줄줄이 북상할 것이고! 알겠나? 베이고르는 이미 끝이란 말이다!"
"……."
"나는 내일까지 위글로우를 함락시킬 작정이었네! 방해를 받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지! 허나 자네의 기민함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군! 자네의 재주가 특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네!"
"무슨 말씀을 하려 그러십니까!"
"전세는 기울었네! 가망 없는 전쟁에 헛되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지! 그러니 항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