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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72화 (472/1,064)

472화

"정말 괜찮겠습니까?"

"내 아들이지만, 동시에 한 개 십인대를 이끄는 십부장이다."

"그렇지만 공자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할렌이 말끝을 흐렸다.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만큼 보리스를 걱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는 너도 두 녀석을 모두 데려가지 않느냐. 아드리안의 말 때문이냐?"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녀석들이지만, 언제까지 응석받이로만 키울 수는 없습니다. 녀석들도 이제는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 나이니까 말입니다."

전장은 교육의 현장으로는 별로 적합하지 못하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올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을 완전히 바꿔 놓는 데 전장보다 효과적인 곳도 또 없다. 할렌의 교육 방식은 매우 거칠고 극단적이었으나, 군터는 딱히 그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녀석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남고 싶으면 남아도 된다 했지."

바로 어젯밤이었다. 군터는 보리스를 불러 원한다면 남아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리스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치기 어린 반발이었을지, 아니면 진지하게 고민하여 내린 결론일지는 몰라도 선택을 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스스로가 질 일이다.

"그렇습니까."

할렌은 더 이상 그에 대한 말을 듣지 않겠다는 군터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의 주인은 때때로 무섭도록 단호한 면이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듯했다.

"그나저나, 아들이 둘인데 한 명은 남겨도 되지 않겠느냐."

"…그리 말씀하시는 장군께서는 하나 뿐이시잖습니까."

할렌이 툴툴대자 군터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잔에 손을 가져갔다.

허나 그때, 밖에서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전령이 당도했습니다."

"그래. 왔군."

순간 멈칫한 손이 잔을 쥐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번에 들이킨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할렌은 벌써부터 일어나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

살라스와 모레인이 이끌고 간 병사는 팔백. 되도록 조금 더 붙여 보내고 싶었으나 국경 수비대의 눈에 띄지 않고 국경 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의 규모를 줄여야만 했다.

"모두 예정된 대로다. 국경을 넘어온 적군은 패퇴하여 물러났고, 살라스와 모레인이 백여 두의 수급을 취했다는군."

말할 것도 없이 의도적이고 약속된 패배다. 코누다이안은 약속대로 움직여주었다. 덕분에 명분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이쪽의 차례.

"지금쯤 토어릭이 테리브란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 쪽으로도 파발이 출발했고."

"개전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군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전이다."

이제부터 그는 성급한 지휘관이 되어야 했다. 국경을 넘어 아군을 공격한 베이고르군에 분노하여,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감정적으로 국경을 넘어선 장군이 되어야 한다. 물론 오래지 않아 테리브란에서 황자의 재가가 떨어질 테고, 그때부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지겠지만 일단 지금은 독단적으로 군대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국경을 넘으라고, 베이고르를 불태우라고.

'어렵지 않은 일이지.'

군터는 가볍게 한 번 발을 굴러 말에 올랐다. 중무장을 한 거한이 토끼처럼 날렵하게 말 위에 오르는 모습은 놀랍다 못해 기괴하게까지 보였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모르거나,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은 그 한 동작에 혀를 내둘렀다.

"출진이다."

굳게 닫혀 있던 파헨델의 성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군터는 가장 앞서서 성문을 지났다.

"간악한 베이고르 놈들이 감히 국경을 넘어 들어와 아군을 공격했다! 일찍이 우리와 맺었던 정전의 약조를 깨뜨린 것이다!"

이 말을 하며 군터는 살짝 낯이 간지러웠다. 정전 협정이 맺어질 당시 그는 베이고르 소속의 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간악한 베이고르를 운운하니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그의 외침을 듣고 서서히 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보며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군터는 점차 수천 명이 발하는 열기에 스며들어갔다.

"이제부터 우리는 국경을 넘을 것이다! 신의를 모르고, 도리를 모르며, 겁 또한 모르는 저 반군 놈들에게 제국의 징벌을 내려줄 것이다!"

와아아아아-!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몇 번의 자극적인 외침만으로도 병사들의 전의는 순식간에 최고조까지 치솟았다. 군터는 그의 목소리에 거센 함성으로 호응하는 병사들을 부릅 뜬 눈으로 바라다가 휙!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 따르라!"

군터와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국경까지 나아갔다. 미리 출진 준비를 하고 있던 군대는 체력도 넉넉했기에 본래 걸려야 할 날짜를 며칠씩 단축하여 움직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중간에 국경 수비대의 제지를 받기도 했으나, 군터는 그의 명분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막아 섰던 이들을 설득하거나, 반 강제로 그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이미 칼을 뽑아 든 마당이었다. 군터가 마음 먹고 윽박을 지르면 그의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이가 드물었다. 거기에 그가 무슨 반역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명분까지 쥐고 있으니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 국경을 넘는다."

파헨델에서 출진할 당시 7천이 조금 넘었던 병력은 살라스와 모레인의 선발대와 합류하고, 국경을 지키던 병력 일부까지 흡수하면서 만에 가깝게 불어났다. 군터는 지친 군대에게 하루 동안 휴식을 주는 한편 전열을 가다듬었다. 지금쯤이면 코누다이안에서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여기서 며칠이 더 흐르면 배나시드에도 소식이 닿을 것이고, 그리 되면 전 베이고르가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 되기 전에 동부의 다섯 영지를 무너뜨린다.'

코누다이안은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네 개 영지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그 다섯 영지를 발판으로 삼아야 차후의 베이고르 공략이 용이해질 것이다.

"가장 먼저 쳐야 할 곳은 코누다이안이다."

감정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코누다이안은 나머지 네 개 영지와 모두 맞닿아 있다. 코누다이안을 공략하고 나면 나머지 네 개 영지로 쳐들어가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니 적이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코누다이안을 무너뜨려야 한다.

"소관에게 맡겨주십시오."

아드리안이 벌떡 일어나 선봉을 자청했다. 하지만 군터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어째서입니까?"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불만을 드러내는 아드리안에게 군터는 짤막하게 답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그러므로 선봉은 나다."

아주 대놓고 '너보다는 내가 낫다'라고 말해버리니 아드리안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할렌이 실실 웃었다.

"아직 뭘 모르는군 애송이."

"뭐라?"

아드리안이 발끈하자 할렌이 느물거리며 말했다.

"너는 장군을 몰라. 이제부터 알게 될 거다. 장군이 어떤 분이신지를."

*

군터는 기병 천오백 기를 추렸다. 그가 직접 이끌 선봉대였다.

"맡기겠다."

"착실히 뒤따라가겠습니다."

보병이 주가 되는 본대의 병력은 더크만에게 맡겼다. 살라스에게 맡길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천부장들과 두루두루 관계가 원만하고 통솔력 또한 나쁘지 않은 더크만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리 결정했다.

"단번에 위글로우까지 치고 간다."

군터와 천오백의 기병은 국경을 넘은 순간부터 위글로우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렸다. 중간중간에 베이고르의 국경 수비대를 비롯하여 코누다이안의 소규모 병력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별다른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격파 당했다. 군터를 선봉으로 한 기병 돌격 한 번이면 끝이었다.

"싱겁군. 너무 싱거워."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조금 전 마주친, 백 명이 될까 말까 한 소규모 적 부대를 막 몰살시킨 참이었다. 전략이고 전술이고 없었다. 그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어 궤멸시킨 것이 전부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싱거운 전투의 연속. 당연한 승리지만, 그 당연한 승리 속에서도 피해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 특별했다.

'맨 앞에서 다 짓밟아버리니 그 뒤는 쉬워지는 거지.'

할렌의 도발에 끌린 것도 있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봉에는 못 서더라도 선봉대에 포함은 될 수 있도록 다시 자청했다. 그의 상관은 그것까지 물리지는 않았다.

'이 정도일 줄이야.'

할렌이 이제 알게 될 거라 했는데, 정말 알게 됐다. 군을 이끄는 최고 사령관이 선봉에 서겠다는,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이러면 가능하지.'

그는 말과 사람이 사이 좋게 반으로 갈리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누구라도 그런 광경을 보게 되면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으리라. 첫 충돌과 동시에 적이 전의를 잃고 지리멸렬하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위글로우까지는 얼마나 남은 겁니까?"

아드리안이 투구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던 군터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부터 다시 움직인다면 한나절."

"바로 움직입니까?"

"물론."

만나는 적들마다 거의 다 몰살을 시키면서 왔기에 적에게 소식이 닿는 것은 최대한 늦출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쯤이면 적들도 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상관 없다. 어차피 기병 천오백만으로 위글로우를 함락시킬 생각은 없었으니.

"본대는?"

"따라오고는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 해도 성문 앞에서 며칠은 기다려야겠지만."

군터와 아드리안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군터가 말했던 대로, 그들은 출발한 지 한나절 만에 위글로우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구만."

굳게 닫힌 위글로우의 성문과, 성벽 위에 포진한 병사들을 보며 아드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만이 아니라, 그의 눈에 비친 위글로우는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도시, 딱 그 정도였다.

"넓게 포위해라. 쥐새끼 한 마리도 놓쳐서는 안 돼."

고작 천오백 기병으로 도시 하나를 포위한다는 것은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성벽 위에 보이는 병사들이 하나 같이 겁에 질려있는 것이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으니까.

'오래는 힘들어도…이틀 정도는 충분하지.'

어차피 본대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틀 후면 저 볼품 없는 도시는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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