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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71화 (471/1,064)

471화

모레인은 힐끔 옆을 살폈다. 살라스가 그와 나란히 말을 몰고 있었다.

'이런 자였던가?'

살라스가 군터를 따라 파헨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천부장들 중에서도 그의 능력과 인품을 칭찬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맡은 일은 딱 부러지게 해냈다. 어떤 면에서는 모레인과도 비슷하다 할 수 있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잘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기가 좋았다. 잘났으면서도 잘난 체를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맞춰주기까지 하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평소 그 인기 많던 모습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하며, 은연중 흘러나오는 살벌한 기운은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아 휘두를 것처럼 사납기 그지 없었다. 평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었던 얼굴의 흉터들도 지금은 꽤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상관인 군터 뿐만 아니라, 살라스 역시 베이고르에 몸 담았던 적이 있다. 얼핏 듣기로는 코누다이안이라는 영지에서 나름 잘 나갔다고 하는데, 정적에 의해 축출 당했다던가.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 이렇게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이 그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군."

살라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아마도 시선을 느낀 듯했다. 살짝 겸연쩍어진 모레인이 눈을 돌렸다.

"조금은."

"그대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장군과 이전부터 장군을 따르던 이들은 코누다이안에 빚이 있소. 정확히는 지금 그곳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빚이 있지. 나 역시 마찬가지."

"이 전투에 그들이 참전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거기다가 아마도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없이 끝날 터였다.

"각오를 다진다고 해둡시다. 근래에 들어 칼이 많이 무뎌져서 말이오."

"무뎌졌다라……."

모레인은 다시 한 번 살라스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 이곳 저곳을 가로지르는 자잘한 흉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 역시 군문에 든 이후로 이런저런 곡절을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월들도 이 사내에 비하면 꽤나 심심해질 것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빚을 이야기하면서도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짚어봅시다. 국경을 넘어온 적 2천과 교전. 전투가 시작되면 적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고 추격은 없다. 맞소?"

"말한 그대로요."

예정대로만 일이 흘러간다면 싸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싱거운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하니, 곧 진짜 전쟁이 시작되리라. 그리고 그 선봉에는 파헨델이 있을 것이고.

*

"며칠 후면 테리브란의 조정이 발칵 뒤집히겠군요."

라몬의 말에 군터는 긍정했다.

"그렇겠지."

이번 일은 테리브란의 조정을 거치지 않는다. 황자의 재가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코누다이안과의 공조 역시 마찬가지.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될 사실은 베이고르의 국경 수비대가 국경을 넘어 제국을 침범. 근방을 지나던 파헨델의 순찰대와 교전을 치르고 패퇴. 여기까지다. 어째서 파헨델의 순찰대가 국경 근처까지 나와 있었는지, 국경을 넘은 베이고르군과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쳤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자들이 꽤나 생기겠지만 그들이 목소리를 내려 할 즈음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일 터.

미리 준비해 놓은 보고가 테리브란의 왕궁에 들어가면 황자는 격노하여 진군을 명할 테고, 그러면 대기하고 있던 군대가 1차로 국경을 넘게 되리라. 일단 한 번 전쟁이 시작되면 도중에 멈출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설령 그런 방도가 있다고 한들, 황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다.

"요 근래 1년은 뭔가 쉴 새 없이 다사다난 한 것 같습니다."

더크만이 농담조로 이야기하자 아드리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겁쟁이 같은 말은 군인이 할 말이 아니지."

"어째서 그런가? 반드시 자네처럼 싸움닭이어야만 군인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힐난에 가까운 말에도 더크만은 여유롭게 받아 쳤다. 아드리안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났다. 더크만의 말처럼 '싸움닭'인 그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들뜨다가는 전장에서 눈 먼 칼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할렌이 핀잔을 주자 아드리안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씩 웃었다.

"나보다는 네 아들놈들 걱정이나 하지 그러나. 이곳에 고이 남겨두고 갈 게 아니라면 말이야."

"다시 말해보겠나?

"안 들리나? 그때 귀를 때린 기억은 없는데."

할렌과 아드리안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군터가 나직이 그들을 중재했다.

"그 넘치는 기운들은 당분간 아껴두도록."

특별히 꾸짖거나 압박하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군터의 한 마디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할렌과 아드리안 모두 그의 한 마디에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바로 했다. 라몬이나 더크만을 비롯한 다른 천부장들도 표정을 굳히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군사들의 준비는 부족함이 없는가?"

"만전입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 출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살라스와 모레인이 전령을 보내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즉시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에게 파발을 띄울 것이다. 우리가 먼저 국경을 넘고 나면 그들이 뒤를 받칠 것이니, 그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흑포 장군 울타마란 소레딜과 그의 군대는 파헨델에서 열흘 거리에서 주둔 중이었다. 물론 그 역시 이쪽의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이쪽의 본대는 그에게 파발을 보내고, 그가 반응하여 움직일 때에 맞추어 움직여야 했다. 아무리 베이고르가 어렵지 않은 상대라 한들 고작 7천 병사로 도모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일단 한번 국경을 넘으면 사방이 적지로 변하게 될 터인데, 후방에서의 원조가 없다면 고립되어 어려움을 겪기 쉽다.

"개전 직후부터 늦어도 보름 안에는 동부의 다섯 영지를 손에 넣어야 한다."

군터는 국경 가까이 위치한 베이고르의 다섯 영지를 하나하나 짚어갔다. 코누다이안, 아모트, 폴사도, 아힌키우스, 젠탄테르. 각 영지를 짚으며 이름을 이야기할 때마다 일찍이 함께 전쟁을 치렀던 해당 영지의 지휘관들이 떠올랐다. 한때는 어깨를 맞대고 싸운 동지였지만, 이제는 그들을 적으로 만나게 될 터였다.

묘한 기분이었다. 허나 결코 거리낌이나 망설임은 아니었다. 어차피 전장에 서는 것이 군인의 숙명이며,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 따라 갈린 운명일 뿐이다. 흘러간 과거는 과거일 뿐이듯, 과거의 인연 역시 마찬가지다.

*

"공자님. 장군께 아무것도 들으신 바가 없으십니까?"

초췌한 인상의 청년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묻자 보리스는 짤막하게 답했다.

"없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어디론가 움직이려는 건 틀림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할렌의 아들인 그라모트의 말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무거운 공기와 긴장감이 흐르는 군영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겁이 나느냐?"

"겁이라기 보다는…궁금해서 그러지요. 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잖습니까."

이제껏, 이라고 해봐야 군문에 든 지 몇 달 밖에 안 된 애송이 병사의 말이었다. 보리스는 점점 더 한심한 꼴을 보이는 그라모트를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라모트가 용감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하다 못해 동생인 로우렌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형이라는 녀석은 아까부터 연신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뒤척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그라모트를 흘깃거리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보리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둘을 데려오지 말았다면 나았을 것을. 대체 정이 무엇인지.

"어찌 생각하나?"

보리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단순한 초소 경계 임무만 반복했던 터라 뭐라 추측하기가 어렵군. 하지만…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대적으로 군대가 움직이려는 것은 분명해. 그리고 파헨델의 군대가 움직일 정도라면 상황이 급하다는 것인데, 그리 급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베이고르와의 전쟁인가?"

보리스가 툭 하고 뱉은 말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사람, 특히 그라모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자밀 우슈무르 낯빛을 굳히고 역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야. 목소리를 낮추게. 혹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괜한 소문이 퍼질 수도 있어. 추측이 틀려도 문제지만, 틀리지 않았다 해도 조심해야 하네. 자네는 장군의 아들이야. 자네의 위치를 자각해야지. 자네의 아무렇지 않은 말 한 마디에 병사들의 사기가 흔들릴 수도 있네."

"으음.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내가 경솔했군."

보리스는 자밀 우슈무르와 어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친구가 되고자 마음 먹었다. 나이가 비슷해서도, 신분이 비슷해서도 아니었다. 그와 어울리는 것이 즐겁기도 했고,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 그가 볼수록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하다 보면 배우는 점이 많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내 위치를 자각해야 한다…라.'

곱씹을수록 와 닿는 말이다

몰랐던 것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장군의 아들로서 병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며, 여러모로 아버지의 이름에 해가 되는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것 등. 하지만 머리로만 아는 것과 진정 아는 것은 차이가 컸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에 묻어나지가 않는다. 무심코 실수를 하고서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그 뒤에야 '아! 그랬었지.'하는 것을 어찌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찍부터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더니.'

본인의 현명함도 현명함이지만,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그를 만든 토대가 되었을 터였다.

'내게는 없는 것이지.'

일찍부터 경험을 쌓은 친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경험이야 이제부터 쌓아가면 되는 것이니.

"어차피 우리 같은 십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네. 대기하라는 명이 내려왔으니 대기하면 그뿐이야."

"뭐…그렇긴 하지."

순간 부친을 찾아가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관두기로 했다. 자신이 파헨델로 따라가겠다고 하고, 십부장의 지위를 얻었을 때부터 부친은 자신을 아들이 아닌 수하로서 대했다. 물론 간혹 사적인 자리를 갖기도 했으나, 그때는 공무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공과 사를 엄격히 나눴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찾아간들 그는 '십부장 보리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리라.

"이 친구의 말을 들었겠지? 이제 좀 진정하는 게 어떠냐."

자꾸만 들썩거리는 그라모트에게 한 마디 쏘아붙인 보리스가 그의 검을 꺼내어 기름 먹인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검신을 몇 번이고 천으로 문지르니 긴장됐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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