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이게 뭐지?"
군터는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추레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의 사내를 흘깃 보았다. 그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는 화살 한 대가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꽤나 고통스러운지 정체 모를 사내는 연신 신음을 흘렸다.
"야간 순찰을 돌던 중에 성벽 아래에서 수상한 자를 발견하여 잡아왔습니다."
"어느 쪽이던가?
"북쪽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 코누다이안, 그리고 미겔이었다. 자연히 사내를 바라보던 눈이 차가워졌다.
"으…아니오. 난 첩자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지?"
"군터 경. 나는 영주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영주……?"
"코누디스 자작님 말이오. 어찌 모르는 척을 하시오."
"……."
모르는 척을 한 게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을 뿐.
"네 말을 어찌 믿지?"
"영주님께서는 지금 서신 한 통도 쓰지 못하실 만큼 쇠약해지신 상태요. 하지만 그대에게 전하라 몇 가지 언질을 주셨소."
사내는 힘겨운 목소리로 몇 가지를 말했다. 그것들은 예전, 군터와 막시밀리언이 술자리에서 나눴던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꽤나 인상적인,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사내의 말을 통해 군터는 그가 정말 막시밀리언과 관련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지. 그래서, 내게 무슨 용무인가."
"경은 이제 정말 제국의, 7황자의 사람이 된 모양이구려."
"……."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말이 질책 같이 들리는 것은 왜일까. 군터는 독백에 가까운 그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비록 원치 않은 일이라 하나 이미 벌어져버렸으니, 주워담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지."
"사담이 길군."
"영주님께서는 복수를 원하시오."
"복수."
군터는 그 단어를 작게 읊조렸다.
복수. 누구에 대한 복수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내가 말하길, 막시밀리언은 서신 한 통도 쓰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 있다고 했다. 또한 위글로우에 다녀온 토어릭이 말하길, 이미 코누다이안의 모든 권력은 라일라와 미겔 등에 넘어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인데 영주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산 송장 꼴을 면치 못하고 있을 것 같은 막시밀리언이 뭘 할 수 있을까.
"설마하니 군대를 내어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경에게, 아니 장군에게 그럴 권한이 없음은 알고 있소."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기대가 됐다. 막시밀리언이라는 사내가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아 아는 그라면, 뭔가 숨겨둔 한 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주님께서는 7황자에게 명분을 주실 수 있소."
"명분? 무슨 명분 말인가?"
"전쟁의 명분."
"……."
"비록 영주님께서 사특한 년, 놈들에게 발뒤꿈치를 물리셨지만, 모든 것을 다 잃으신 것은 아니오. 아직도 나처럼 그분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있소. 또한 나와는 달리 숨죽이고 있지만, 언제든 그분의 명이 떨어지면 칼을 뽑아들 이들도 적지 않지. 그들은 의심 많은 미겔 놈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숨어있소."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막시밀리언에게 남 몰래 숨겨둔 한 수가 있으리라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미겔을 의심 많은 놈이라 했지만, 군터가 보기에 막시밀리언은 그 미겔 이상으로 의심이 많고 치밀한 구석이 있는 자였다. 비록 어느 순간부터는 그 날카로움을 잃고 방심하다가 크게 낭패를 보았지만, 그래도 품속에 칼 한 자루 정도는 충분히 숨길 수 있는 자다.
하지만 사내가 말한 '우리'가, 숨어있다는 자들이 얼마나 활약을 해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실권은 모조리 저쪽에 넘어갔는데, 그들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우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것은 신만이 알겠지. 허나 일이 어찌 되든, 그대와 7황자가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잖소."
그렇긴 하다. 정확한 것은 조금 더 말을 들어봐야 알 테지만, 아마도 저들의 일로 인해 이쪽이 잃을 것은 없을 터였다.
"7황자를 만나게 해주시오. 그의 앞에서 모든 걸 말하겠소이다."
"……."
"경. 시간이 얼마 없소."
"무슨 말이지?"
"영주님께 남은 시간 말이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삶이 심지만 남은 초와 같다고 하셨소.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작은 불꽃이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오."
"……."
"그대 역시 영주님의 신하였소. 영주님께서 가장 총애했던 신하 둘을 뽑으라면 코르넬님과 그대겠지. 부디 옛 정을 기억하여, 영주님의 마지막 바람에 힘을 보태주시오. 말했듯, 일이 어떻게 흘러가던 간에 그대에게 손해가 날 일은 없을 거요."
눈에 핏발이 선 사내의 절박한 호소.
군터는 그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흥미롭군."
오밤중에 궐문을 두드린 것은 군터의 깃발을 든 전령이었으나, 정작 그 내용물은 바크렌에서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으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초췌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황자의 흥미를 크게 돋웠다.
"네 주인이 바라는 것은 복수냐?"
"그렇습니다. 제 주인께서는 이 일에 리에론 공작은 물론, 왕실까지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 모두의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공작이니 왕실이니 하는 칭호는 궁벽한 땅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놈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송구합니다. 소인은 그저……."
"되었다."
당황한 사내가 변명하려는 것을 황자는 혀를 차며 끊었다.
"네가 바라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내 이제껏 바크렌을 그냥 놔둔 것은 놈들과 한 약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먼저 움직인다면, 그 약조 또한 무의미해지지."
"바로 그렇습니다. 하여……."
"군대를 일으켜 바크렌을 수복하는 것은 간단한 일. 그러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네놈들이 정말로 말한 것처럼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상대는 지고(至高)한 존재였다. 그의 주인보다도, 베이고르 왕보다도 훨씬 더. 말 한 마디에 수십만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고, 방금 말했듯 베이고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자의 앞에서 말을 꺼내려니 자꾸만 몸이 의지와 상관 없이 떨렸다. 하지만 해야 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달렸다.
"미겔은 군부의 요직에 자신의 사람이거나, 최소 자신에 적대적이지 않은 인사들을 두루 앉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놈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특히 일선의 장교들이 그렇지요. 비록 그들의 위에 있는 지휘관은 미겔의 사람이지만, 그 바로 밑에서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들 중에는 제 주인을 섬기는 이들이 몇 있습니다."
"그들만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 아닌가?"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현재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나가 있는 수비대의 병력은 총 2천. 한 명의 사령관이 그들을 통제하지만, 그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아직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자를 처리할 셈이군?"
"…그렇습니다. 그 자를 죽이고, 병사들을 통솔하여 국경을 넘겠습니다. 그러면 병사들이 혼란에 빠지기 전에 미리 대기 중이던 전하의 군세와 가벼운 교전을 벌이는 거지요."
"선제 공격이라."
"베이고르와 코누다이안의 깃발을 손에 넣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2천의 군세. 두 개의 깃발. 충분한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허나 그리 되면 네 주인도 살아남지 못한다."
"어차피 제 주인께서는 얼마 살지 못하십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통렬한 복수요, 후련한 죽음입니다."
황자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캄캄하고 아득한 꿈속을.
그 속에서 얼마나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을까. 어둑함과 고요함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세상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가 있는 세상 바깥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라는 걸, 그는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밖이라. 자신이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그 밖이 있다면, 그곳은 대체 무엇인가. 또 어디인가.
아주 간단한 의문이 생겼다. 의문이 생겼다는 것은 그가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의문이자 깨달음은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그의 세상을 한 순간에 모두 바꿔버렸다.
'나는…….'
어미의 뱃속을 떠나 세상에 나온 아이. 비유하자면 그와 같았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그를 각성시켰다. 이제 그가 있는 곳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내가 어째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궁금해했고, 떠올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 기억해내는 데에는 무수한 고통과 인내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해냈다. 그는 모든 것을 떠올렸고, 그 결과 형언할 수조차 없는 분노에 몸서리를 쳤다.
'우습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라일라.
그 신비로운 여인이 모든 틀어짐의 시초였다. 하지만 그녀가 어째서 자신을 등졌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바라는 모든 것을 해주었거늘.'
칼이라도 박힌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왔다. 분노와 슬픔, 그 외의 영문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그의 마음을 진탕 시켰다.
'미겔.'
라일라에 대한 감정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합적이라면, 미겔에 대한 그의 감정은 순수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은 분노.
'그토록 탐하고 또 탐해왔던 것은, 결코 네놈 따위에게 빼앗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꺼져가는, 어쩌면 이미 다 꺼졌을지도 모르는 초에 다시 한 번 자그마한 불씨를 피워 올린 것은 바로 그 화산보다도 더 뜨거운 심화(心火)였다.
허나 막시밀리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면서도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은밀하게 이곳 저곳에 숨겨두었던 칼들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몇몇과 연락을 취했고, 그를 바탕으로 조금씩 복수의 칼을 벼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는 그의 마지막 싸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