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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69화 (469/1,064)

469화

"타라냐드는 아직인가?"

"예. 아직 망설이고 있는 듯하옵니다."

테리브란의 궁성에서 열린 회의. 옥좌에 앉은 7황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미적거릴 셈인지 모르겠군. 차라리 저쪽에 붙는다면 속 시원히 쓸어버리기라도 하련만."

"몸값을 올리겠다는 심산이겠지요."

"이미 더 올라갈 몸값도 없다. 남은 건 결정뿐. 그런데도 늑장을 부림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인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황자도 딱히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리바스트라와 바크렌, 아폰렉스와 맞닿은 타라냐드는 특별히 중요한 땅은 아니었다. 갈색초원과도 접해 있는 그곳은 바크렌 만큼이나 척박한 땅이었고, 군사적으로도 가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들이 그 땅에 관심을 두는 까닭은 그곳이 또 다른 강적인 27황자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타라냐드를 손에 넣는다면 후에 27황자와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한층 더 다양한 진격로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차후를 위한 포석이었다.

허나 이런 점은 27황자의 진영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즉, 그들 역시 타라냐드를 손에 넣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이 지겨운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타라냐드의 총독은 양측에서 제안을 받았고 지금까지 답을 유보하고 있었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을 해보겠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끈 것이 벌써 넉 달이 넘어가니, 답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답답함이 쌓여만 갔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다. 모두 수고했네."

황자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길게 붙들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을 돌려보내고 넓은 대전에 카자쿠와 단 둘이 남았다.

"후우."

황자가 한숨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눈길은 대전 바닥에 펼쳐진 거대한 지도에 머물렀다. 지도는 제국의 전역과 제국 밖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타라냐드의 일로 고민하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타라냐드야 아무래도 좋아. 신경이 쓰이는 건 다른 녀석들이지."

황좌를 두고 경쟁하는 그의 형제들. 하나는 해치웠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이들이 남아있었다.

"타라냐드만 손에 넣으면 제국의 북방은 온전히 내 손에 들어왔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서쪽에 웅크린 무식한 녀석과도 편안히 자웅을 겨룰 수 있고, 그 후에는 기세를 몰아 중부까지 넘볼 수 있지."

그쯤 되면 황좌를 목전에 뒀다 봐도 될 것이다. 즉, 서쪽에 웅크린 경쟁자만 쓰러뜨린다면 황제의 자리가 가시권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라냐드를 손에 넣어야 하는데, 여우 녀석이 쉽게 손을 내밀어주지를 않는구나."

아마도 타라냐드의 여우 역시 그와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이겠지. 그것을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다. 차후 서쪽의 적과 자웅을 겨루는 데 있어 타라냐드가 가지게 될 가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까? 간사한 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다른 길이라……."

다른 길. 다른 길이라.

'다른 길이…없는 것은 아니지.'

대전 바닥에 깔린 지도. 그 중 타라냐드라 적힌 선 안에 머물던 시선이 조금 더 오른쪽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바크렌이라는 글씨가 작게 쓰여 있었다.

'바크렌에 있는 반군 놈들의 손을 빌린다면 타라냐드를 노려볼 수 있다. 서쪽에서 군대가 출발하기 전에 끝을 보는 것도 가능하지.'

물론 거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따른다.

첫째, 당연하지만 바크렌의 반군이 손을 빌려줘야 한다는 것.

둘째, 그렇게 빌려준 손이 최소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 타라냐드의 여우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

넷째, 서쪽의 무식한 놈이 개입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는 것.

'역시 무리다.'

가만히 가능성을 타진해보니 무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타라냐드의 여우를 속이려면 이쪽에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소수다. 그러면 자연히 바크렌 쪽이 중요해지는데, 그는 바크렌의 반군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들이 일찍이 아란딜 페레모어와 아그니스 체스퍼 같은 제국의 위장들을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원의 야만인과 같은 조력자들과 힘을 합한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조력자들마저 잃어버리고, 내전으로 인해 그 부족한 전력까지 상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 자들에게 기대를 걸자니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한 번 진행하고 나면 뒤가 없다. 실패하게 된다면 타라냐드는 그의 적에게 가담하게 될 것이다. 그리 되면 정말 골치 아파진다.

'그래.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아직 우리는 먹은 것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니.'

쓰러뜨린 2황자의 영역을 아직까지도 완전히 병합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만간 병합을 다 끝낸다 해도 본격적으로 안정을 찾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다행이라면 민심이 그렇게까지 바닥은 아니라는 것이지만,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불신과 조급함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지.'

황자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흔들림 역시 자신이 사람이라는 방증일 터. 그렇기에 그는 인상을 쓰는 대신 웃었다.

오늘도 이해하기 힘든 주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자쿠가 화제를 돌렸다.

"수상한 놈들이 테리브란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는 수상한 놈보다 수상하지 않은 놈들이 더 적지. 어떤 놈들이냐."

"북방의 억양을 쓰는 놈들인데, 이곳 저곳 기웃거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북방?"

이 테리브란 역시도 제국의 북방이다. 그런 이곳에서조차 북방이라 할 정도면 정말 위로 올라가야 하는 곳에서 왔다는 뜻인데, 그런 놈들이라면 짚이는 것은 한 둘뿐이었다.

"반군 놈들이냐?"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간이 부었군."

이번에는 웃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고. 설마하니 정계에 끈이라도 만들어놓겠다 그건가?"

"어찌 하오리까."

무뚝뚝하게 그의 의중을 묻는 카자쿠. 지금 그가 잡아오라 명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허나 카자쿠가 그러든 말든, 황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수뇌부의 생각일 리는 없다. 나를 믿지 못했다면 진작에 움직임을 보였겠지. 전쟁도 다 끝난 지금에 와서 괜한 움직임을 보일 이유는 없어.'

반군 놈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납작 엎드려서 그의 눈치나 살피는 것이다. 이렇게 어설픈 수작을 부려서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테리브란에 들어왔다는 놈들은 반군의 수뇌가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놈들이 보낸 것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누가?

'최근의 변동이라면, 파헨델에서 보냈다는 사절단뿐인데……. 그렇다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역시 그쪽인가.'

코누다이안?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것이다. 군터의 말에 의하면 섬기던 주인을 배신하고, 군터를 몰아낸 배반자들이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들이 군터와 척을 진 것은 확실하니 파헨델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군터가 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터. 그러니 그를 견제하기 위해 어떻게든 방도를 짜내려 할 터.

'그리 생각하면 대충 맞아떨어지는군.'

물론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짐작이 맞을지 어떨지는 이제 확인해보면 되겠지.

"놈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고?"

"예. 줄을 대려고 시도하는 모양입니다."

"음……."

"잡아오리까?"

"아니. 아니다. 그대로 둬라."

"예?"

카자쿠가 의아해했으나 황자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이미 다시 지도로 향해 있었다.

*

"이상은 없나."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휘하 백부장의 다부진 대꾸에 모레인은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이어갔다.

일과라고는 하지만 이런 단순한 순찰에 굳이 천부장 씩이나 되는 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모레인은 이런 사소한 것조차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 과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성실함.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야말로 맨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야 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널브러진 채로 체념하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일어서던가.

모레인이 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올랐다. 맨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치열하게 싸워온 결과다.

"……."

오늘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전념했다. 휘하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경계 및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고 나니 벌써 하늘에는 해가 지고 어둑함이 감돌고 있었다.

성벽 위를 걷다 보니 어느새 거뭇한 암벽이 보였다. 파헨델을 천혜의 요새로 만들어주는 두 개의 벼랑 중 하나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성벽 끝에 다다른 것이다.

'오늘도 끝이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그의 일은 끝이었다. 오늘의 일도 끝이었다. 또 하루를 마친 것이다.

"음?"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왔던 길로 돌아가려 몸을 트는데, 성벽 아래 얕게 우거진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발견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우연이었다. 수풀 아래로 아주 살짝 튀어나온 발을 보지 못했다면 그저 바람에 흔들렸겠거니 여기고 넘어갔을 터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작스레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뒤따르던 부관과 병사 셋이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색하지 마라. 저쪽 수풀 속에 누군가가 숨어있다."

"옛?"

"내색하지 말라 했다. 활."

모레인은 병사가 조심스럽게 건넨 활을 받자마자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확인은 하지 않으십니까?"

"북쪽이다. 정체를 밝힐 것이었다면 대낮에 성문 앞으로 왔겠지."

그의 활 솜씨는 뛰어나다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수풀 쪽으로 화살을 날릴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피잉-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수풀이 거칠게 흔들렸다. 또 한 발 화살을 시위에 걸고서, 모레인은 작게 흔들리는 수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수풀의 움직임이 멎고 나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한 명인가?'

"인근의 병사들을 불러라."

"옛."

한 명인 것 같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수풀이 품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몇 사람이지만, 점점 짙어지는 어둠이 품을 수 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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