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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68화 (468/1,064)

468화

자밀 우슈무르는 파헨델에 온 순간부터 행실을 조심했다. 사실은 오기 전부터, 정확히는 그가 세레온 우슈무르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겼을 때부터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행실과 그로 인해 생길 평판이 작고한 부친의 이름을,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소극적으로 움츠러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러면서도 수하 병사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배려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를 어려워하던 이들도 점차 마음을 열어주었다. 이제는 타 부대 소속임에도 그를 보고 먼저 인사를 해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장교도 아닌 말단 병졸들이 말이다.

사실 자밀 우슈무르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고만, 그것도 특별히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무난한 미래가 보장된 입장이었다. 비록 가주를 잃었다고는 해도 우슈무르 가문이라는 후광이 있고, 우슈무르 가문과 손을 잡은 군터가 그의 상관이었다. 그러니 못해도 천부장까지는 금방 올라갈 것이 확실했다.

그렇기에 병사들과도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진짜' 십부장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며 감탄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보게."

"음?"

자밀 우슈무르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게 무슨 용무라도?"

그를 부른 사람은 같은 직급에 있는 보리스였다. 이름보다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더 유명한.

'확실히…타고났군.'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볼 때마다 대단한 무골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나름대로 자질이 좋다는 말을 듣는 편이었지만,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보리스가 지닌 자질은 그런 그보다도 두어 단계는 더 윗줄인 것 같았다. 크지만 둔하지 않고, 오히려 날렵해 보이는 체형. 거기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까지. 부친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음.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은가?"

"시간이라면…예. 괜찮습니다만."

의아했다. 적어도 이 파헨델에서만큼은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신분인 그가 자신에게 의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싶었다.

*

살라스가 말했다.

"근래에 들어서 공자님이 자밀 우슈무르와 어울리시는 모양입니다."

"자밀?"

뜻 밖의 보고에 군터의 눈매가 흔들렸다.

"무슨 일이지?"

"근무 시간 외에는 그와 어울려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시는 것 같더군요."

"……."

"비슷한 또래에, 어찌 보면 비슷한 신분이니…친우로 사귀시려는 게 아닐지."

"친우?"

군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보리스가 또래의 친구를 사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혹 그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와 어울렸을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그가 알기로는 보리스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이는 이제껏 없었다. 할렌과 두 아들이 함께 어울리기는 했지만, 신분의 상하 관계가 명확하다 보니 친구라고 하기에는 맞지 않았다. 친구끼리 존대와 하대를 자연스럽게 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런데 친구? 자밀 우슈무르라.

"녀석이 그 아이를 의식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소관 또한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생각이 바뀌신 모양입니다."

보리스가 자밀 우슈무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파헨델에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부터였다. 살라스의 말처럼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신분이다 보니 여러모로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자밀 우슈무르와 보리스가 어울려 다닌다? 그것도 말을 들어보면 보리스가 먼저 그를 찾아간 듯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뜻밖이었다.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소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우슈무르 가의 자제는 사람과 어울리는 데 재주가 있습니다. 그와 어울리시다 보면 공자님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한 부분이라…….'

사람을 대하는 재주라지만, 그런 것은 사람을 많이 접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절로 길러지는 것이다. 그런 재주가 없고,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일 터.

'그렇다면, 그 역시 내 책임인가.'

전부일 수도 있고, 일부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터였다.

그리 생각하니, 군터는 조금 속이 답답해졌다.

"네가 그리 하라 이른 것은 아니냐?"

"아닙니다. 장군께서 알아서 하게 두라 언질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는 보리스가 테리브란에 남기를 바랐지만, 기왕 파헨델에 온 이상 이곳에서 더 성장하기를 바랐다. 특히 정신적으로 말이다. 몸은 다 컸지만, 아직 남아있는 철부지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보리스가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되도록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기를 원했고, 그래서 살라스를 비롯한 보리스와 친분이 있는 수하들에게 일절 도움을 주지 말 것을 명했다.

"그러면, 녀석이 자밀을 찾아간 것은 그 녀석 스스로 내린 판단이란 말이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흠."

보고서를 훑어보는 군터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를 본 살라스도 덩달아 조용히 웃음기를 머금었다.

"토어릭은 지금쯤 테리브란에 당도했겠지."

"그렇겠지요."

먼 길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고단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가볍지 않은 임무까지 수행을 해야 하니, 누구라도 지칠 수밖에 없다. 군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수하가 토어릭이었기에 그를 혹독하게 부려먹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면 넉넉하게 휴가라도 줘야겠군."

"기뻐하겠군요. 안 그래도 조금 지쳐 보이던데 말입니다."

"돌아온 녀석들은 어떤가."

"좋지 않습니다. 노역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텐데도 몸이 많이들 상했더군요. 그 중 몇몇은…아마도 다시 창칼을 쥐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화가 치밀었다. 코누다이안에 있을 연놈들을 포함해 그의 등을 찔렀던 모든 자들. 당장이라도 군사를 몰고 가 그것들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테리브란에 전갈을 보냈으니, 필요하다면 후송하도록 한다."

"예."

테리브란에는 실력 좋은 의사들이 즐비하다. 치료가 필요한 병사들이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더라도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 생각이었다. 필시 적지 않은 지출이 있겠지만 그마저도 싸다. 감옥에 갇히고,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따른 병사들이다. 그 충성심에 대한 값은 돈 몇 푼으로 치를 수 없다.

"그리고…지켜보고 있습니다만, 현재까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회의적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미겔은 교활한 놈입니다. 그 놈과 붙어먹은 계집도 간사하기로는 뱀보다 더하고 말입니다. 그런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토어릭이 구해온 병사들이 백 명 가량인데, 그 중에 적의 첩자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첩자기만 하면 다행이지, 그 이상이라면…….

"군중의 분위기는 어떠냐. 내 보기에는 많이 안정이 된 것 같다만."

"예. 라몬과 더크만의 공이 큽니다. 아드리안도 예상 외로 잠잠하고 말입니다."

라몬과 더크만은 군터가 이끌고 온 이들과 기존 파헨델의 장졸들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들 덕분에 고작해야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두 무리 사이의 벽이 많이 옅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경우는 초장부터 할렌과 한바탕 치고 받은 이후로 줄곧 잠잠했다.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라몬이 우려한 것처럼 사고를 치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이 이상 잘 풀릴 수 없을 정도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이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할렌은? 요즘도 아이들을 쥐 잡듯 잡고 있나?"

"여전합니다. 아주 이 참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다더군요."

살라스가 말을 하면서도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군터도 피식 웃었다.

할렌의 두 아들, 그라모트와 로우렌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어머니인 루시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다. 군터가 그러했듯, 할렌 역시 군터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문인지, 할렌의 두 아들은 좋게 말하면 철부지고 나쁘게 말하면 망나니 비슷하게 자라버렸다. 어머니인 루시가 그들을 너무 곱게 키운 탓이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귀하게 키우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루시의 경우는 그것이 조금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녀의 두 아들이 보통을 넘는 응석꾸러기들이었던지.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나중에라도 훈육을 통해서 버릇을 고쳐야 했을 텐데,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할렌이 뒤늦게 나서보려 해도 루시가 허락하지 않은 탓이었다. 밖에 나오면 누구에게도 기가 죽지 않는 할렌이지만 집에서는 그의 아내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를 아는 이들은 할렌의 공처가 기질을 가지고 그를 놀리기도 했는데, 할렌은 그럴 때마다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뭐라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루시와 떨어져 있는 지금이, 어쩌면 다시 안 올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할렌의 아들들은 테리브란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들이 파헨델에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보리스 때문이었다. 어딜 가든지 보리스와 붙어 다니던 둘이었기에 보리스가 파헨델에 간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 그들에게 재앙을 불러왔다.

"어지간히도 독하게 구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휘하 장교들이 말릴 지경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 할렌이 자기 자식을 훈련에 포함시켰을 때, 할렌 휘하의 장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임지까지 와서, 그것도 엄격해야 할 훈련에서 제 자식들을 돌본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첫 훈련에서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장졸들이 그라모트와 로우렌을 안쓰럽게 여기는 지경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두 녀석이 제 아비를 원망하겠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렇다 해도 할렌은 감수하겠다는 모양입니다. 남은 2개월 안에 제대로 된 군인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군요."

파헨델의 장졸들은 4개월에 한 번씩 테리브란에 다녀올 수 있었다. 가봐야 한 사나흘 정도 있다 오는 것이 전부지만, 그 짧은 시간만을 목 내어 기다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파헨델에서 그 시간을 가장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이들은 할렌의 두 아들들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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