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영주관저의 시비인 에밀리는 오늘도 아침 일찍 빗자루를 들고 관저에 들었다. 관저 내에는 이미 그녀보다도 더 일찍 온 다른 시비들이 여럿 있었다.
"…그니까 말이야. 미겔 경이 사자를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고 들었어."
"부인께서 미겔 경에게 아예 그 일을 통째로 일임하셨다던데?"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니잖아?"
"하긴 그래."
"요즘 그런 이야기도 돌던데, 혹시 들었어?"
"무슨 이야기?"
"소영주님이 사실 미겔 경의 아이라는……."
"쉬잇! 말 조심해. 누가 그런 말을 들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속삭이듯 말을 꺼냈던 시비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그녀에게 주의를 준 이들도 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멀찍이 있던 에밀리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밀리도 희미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들어도 못 들었다는 표시. 그제야 그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
복도 청소를 마친 그녀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영주의 침실이었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 둘이 그녀를 보고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살짝 목례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조용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안에 사람이라고는 방금 들어온 에밀리와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영주 단 둘뿐이었다.
에밀리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빗자루가 카펫 위를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빗자루는 문 앞에서부터 안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영주의 침실은 어지간한 방 너덧 개를 합친 것보다도 더 컸기에 입구에서 영주의 침대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스윽-슥
몸을 굽힌 채 빗자루를 쓸며 이동하던 에밀리가 큼지막한 침대 앞. 정확히는 영주가 누워 있는 부근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전…했느냐."
바로 앞에서 들어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소리.
스윽
빗질은 멈추지 않았다. 들려온 소리 못지 않게 작은 목소리는 빗질 소리에 묻혀 흘러나왔다.
"예. 전하였습니다."
"답…은?"
에밀리가 빗자루를 한 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 쓸었던 곳을 다시 한 번 쓸며, 빈 손을 옷 안 쪽으로 가져갔다.
"다음은 엿새 뒤입니다."
옷 안쪽에서 빼낸 손에는 몇 번이고 접혀 꼬깃꼬깃해진 종이가 들려 있었다. 에밀리는 그것을 이불 속 영주의 손에 밀어 넣었다.
"알…겠다."
앙상하게 마른 손이 종이를 움켜쥐고, 감겨 있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수…고…했다."
에밀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빗자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빗질 소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그녀는 이제 침대를 지나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스윽-
적막한 침실에 빗질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흘렀다.
*
코누다이안에 다녀온 이후로 보리스는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함께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일은 토어릭이 다 했지만, 그와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파헨델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좋았던 기분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여기저기서 흘깃대는 시선이 느껴진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감이 좋은 편이고, 눈썰미는 그보다 더 좋은 보리스였다. 곁눈질 같이 잠깐 머물다 갈 뿐이라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그가 아닌 것이다.
'내가 제 놈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 줄 아는 건가.'
죄다 그의 눈치를 본다. 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사령관의 아들이니만큼 어느 정도 눈치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과하지 않은가.
속이 답답해진 보리스는 살라스를 만나러 갔다. 원래 그가 주로 속을 터놓는 상대는 할렌이었지만, 지금 할렌은 그의 두 아들을 쥐 잡듯 잡느라 바빴다. 그리고 이번에 코누다이안을 함께 다녀오며 친해진 토어릭은 또 다른 임무 때문에 테리브란으로 떠나 있는 상태. 그러니 보리스가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살라스 뿐이었다.
"공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파헨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살라스는 벌써부터 그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업무를 처리하다가 보리스의 방문을 받고 없는 시간을 내어 그를 맞이했다.
"제가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폐라니요. 잘 오셨습니다. 앉으시지요."
살라스의 집무실은 주인을 닮아 간소하기 그지없었다. 장식이라고는 벽에 걸린 칼 한 자루가 전부였는데, 보리스는 그 칼이 실제로 살라스가 사용하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가 나갈 대로 나가서 더 이상은 수리해서 쓰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들었는데, 버리는 대신 휑한 벽에 걸어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살라스님답습니다."
"하하. 정이 들어서 말입니다. 녹이기는 아깝더군요."
소리 내어 웃으니 얼굴에 난 흉터가 꿈틀거렸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저 상처들이 나기 전의 준수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딱히 못난 얼굴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크고 작은 흉터들이 훤칠한 얼굴을 일정부분 앗아간 것은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어인 일이십니까? 공자님께서 저를 다 찾아주시고."
"상담…이라고 해야 할지.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상담이요? 제게 말입니까?"
"예."
"음.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귀 기울여 들어드리기는 하겠습니다."
"후우……."
보리스는 살라스에게 그의 고충에 대해 털어놓았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까지 자신을 어려워하며 다가오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든 피하려 든다는 것 등. 덕분에 자신까지 무슨 일을 하든, 어디를 가든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까지.
"음……."
살라스는 보리스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 주었다. 보리스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그는 침음을 흘렸다.
"제가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음. 공자님. 장졸들이 공자님을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자님과 같은 경우를 겪어본 적이 없기에, 감히 공자님께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더라도……."
"어설픈 조언은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속이 상한 것 같은 기색의 보리스를 돌려보내고, 홀로 남은 살라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은 참 어렵군.'
이런 일이 내키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살라스는 보리스가 젖도 못 떼던 시절부터 보아왔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보리스는 단순히 섬기는 주인의 자식,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런 보리스를 본의 아니게 실망시켜야 한다는 것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정말 엄한 아버지이시군.'
씁쓸하게 웃은 살라스가 밀어두었던 서류를 다시 잡았다.
*
살라스를 찾아가 실망감만 더 쌓인 보리스는 오늘 저녁에 있을 경비 근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의 부대원들이 있는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이."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일까. 옆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퍼뜩 고개를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드리안 천부장님."
"귀관은 상관을 보고도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나? 사령관의 아드님이시라고 눈에 뵈는 게 없나? 응?"
"송구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다른 생각? 저놈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무시할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말하는 건가?"
"맹세컨대, 절대 아닙니다."
"그래? 그럼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 계셨는지 들어보도록 할까."
"예?"
"왜. 나한테는 털어놓을 수 없는 내용인가?"
"그런 것은…아닙니다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잠시. 보리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할렌과 주먹다짐을 하고 그에 대한 벌로 채찍 50대를 맞은 후. 또 따른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아드리안은 잠잠했다. 까칠한 것은 여전했지만 특별히 사납게 구는 일도 없었다. 보리스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보리스는 딱히 아드리안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 그와 싸운 할렌조차도 아드리안에 대해 특별히 험담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이 좀 맵더라 정도?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이 사람이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생각한 보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런 데서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호오?"
아드리안이 의외라는 듯 눈을 좁혔다. 사실 그는 보리스가 핑계를 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애송이는 정말로 뭔가 고민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야…자리를 옮기지."
그렇게 옮긴 장소는 아드리안의 집무실이었다. 아드리안의 집무실도 살라스의 것처럼 간소했으나, 곳곳에 뭔지 모를 짐승의 가죽이 걸리거나 깔려 있다는 점이 달랐다. 보아하니 직접 사냥한 짐승들의 것인 듯했다.
"그래서…꼬마 장군님의 고민이라는 게 뭐지?"
"…호칭부터 제대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실례했군 보리스 십인장. 이제 됐나?"
"후우."
능글맞게 웃는 아드리안을 보며, 보리스는 이 사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도 되는 것인지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대충 둘러대고 일어날 수도 없어, 그는 조금 전에 살라스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아드리안에게 반복했다.
"시답잖군."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아드리안의 반응은 살라스와 전혀 달랐다. 물론 같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극과 극이었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살라스와 달리, 아드리안은 별 헛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심드렁하게 독설을 퍼부었다.
"설마 병사들이 너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길 바란 건 아니겠지? 신분을 숨긴 것도 아니고, 올 때부터 장군의 아들이라고 뻥뻥 소리치면서 와 놓고 말이야."
"…뻥뻥 소리친 적은 없습니다만."
"병사들이건 장교들이건, 장군의 아들이 부담스러운 건 당연하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면 네가 그들과의 거리감을 없애려고 노력해야지 않겠나? 가만히 앉아서 저놈들 왜 저러지? 하면서 인상만 팍팍 쓰는 대신에 말이야."
"그렇다면, 제가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모르겠는데?"
"…예?"
가뜩이나 심드렁하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한층 더 심드렁해졌다.
"난 내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그런데 아마 장군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 네가 어찌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아나."
"……."
"그런데 말이지."
"……?"
"운 좋게도, 이곳에는 장군의 아들이 하나 더 있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아……."
"그 녀석은 너와는 달리, 꽤나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더군."
"으음."
"그러니 그 녀석에게 한 번 가보는 게 어떻겠나. 혹시 아나? 그 녀석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보리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