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그런 것은 배짱이 아니라 허세라고 하지."
"그리 생각한다면 어디 한 번 시험해보지 그러나."
시험이라. 어찌 그러고 싶지 않겠나. 다만 그렇게 한 번 시험을 하고 나면 뒤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발을 딛게 되는 것이다.
"……."
토어릭은 이곳이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편안해 보였다. 그의 풀어진 표정은 마치 '네게 그럴 만한 배짱이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짜증나는 놈이군.'
군터가 그러했듯, 이놈 역시 코누다이안의 군관이었다. 하지만 미겔은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이 정도의 사내가 코누다이안에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 인정하지. 그대가 이겼다. 그래서? 그대의 주인이 원하는 게 뭔가? 내 목? 영주 부인의 목? 미트라스의 목?"
"물론 그 전부를 원하고 계시지."
"물론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내어줄 수 없음은 알고 있겠지?"
"그대들의 사정 따위와는 상관 없이, 원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해서 내 주인께서는 다른 것을 제안하셨다."
"다른 것?"
"당신을 따랐던 수하들. 일전에 우리가 코누다이안을 탈출할 당시에 미처 함께 탈출하지 못했던 이들. 그들 중 일부가 살아남았다고 알고 있다. 죄수가 되어서 노역장에 끌려가고, 음습한 감옥에 갇혔다고 들었지."
"그들을 풀어달라는 건가?"
"그게 아니면 코누다이안 자작을 풀어줘도 괜찮은데. 어떤가? 아,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야."
"…위험한 농담을 스스럼 없이 하는군."
"솔직해지자고 한 건 그쪽 아니었나? 그런 주제에 정말 더럽게 꽁꽁 싸매는군. 이 정도 말을 듣는 것도 거북한가?"
"좋아.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내가 그들을 내어준다면 그쪽에서 줄 수 있는 건 뭔가?"
"살려주지. 그러니까, 당장 군대를 몰고 와서 너희의 사지를 찢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다. 너희들이 알아서 죽을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은, 내버려둬주겠다. 어차피 내 주인께서는 이미 이런 궁벽한 땅에 시간을 쏟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말이지. 지금 요구한 것에 더해서 너희가 적당히 사죄하고 성의를 표한다면…지나간 일은 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어찌 믿지?"
"믿지 않으면 어쩔 텐가?"
"……."
처음부터 달리 수는 없었다.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전쟁 이전에, 여기서 이 놈들을 처리해버리는 것 자체가 문제지.'
사절단이 코누다이안에서 해를 당한다면 저쪽에 명분을 주는 꼴이다. 그리 되면 파헨델 뿐 아니라 7황자와의 전면전인데, 그러면 베이고르에서 힘을 실어줄지도 의문이었다. 7황자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나 마찬가지. 거기다 명분까지 이쪽에서 먼저 제공해버렸으니, 베이고르는 전쟁 대신 꼬리를 자르는 쪽을 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지금으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명줄이 늘어났군. 축하하오."
이 순간. 미겔은 저 나불거리는 입과, 싱글거리는 면상에 칼을 꽂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어떤가요 부인?"
"그래. 확실히 피부가 더 매끄러워진 것 같구나."
원래부터 루시는 피부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잡티가 조금씩 생기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것들이 다 어디로 숨었는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남방에서만 자라는 푸른 나무가 있대요. 그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이라더군요. 매일 그걸 잠들기 전에 피부에 발라주면 피부에 윤기가 돌게 된다는데, 정말이었어요."
"그래?"
"그렇다니까요. 저를 보면 모르시겠나요?"
본래 말을 아끼는 편이 아니었던 루시였지만 지금은 평소보다도 훨씬 과하게 말이 많았다. 그만큼 흥분한 탓이었다. 하나 둘씩 생기는 잡티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녀였기에 푸른 나무 수액이라는 것의 효능에 상당히 흥분한 것 같았다.
"그렇게 효과가 좋다면 찾는 이들이 많겠구나. 값도 비쌀 테고."
"말이라고요. 같은 무게의 금으로 산다고 해도 언제쯤 구할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한다고 합니다. 물건 자체가 많이 나지를 않는 데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까요. 제국 전역에서 구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니, 이쪽까지 차례가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그런데 너는 그 귀한 것을 어찌 구했느냐?"
"케닝 부인에게 선물 받았습니다. 저더러 선물로 주면서 부인께도 드리라며 따로 챙겨주더군요. 효능에 대해서 말로는 들었는데, 믿을 수가 없어서 제가 먼저 한 번 써서 확인 한 후에 부인께 온 거랍니다."
"케닝 부인이 내게 왜……."
테리브란에 온 이후로 남편인 군터와 함께 참석했던 몇몇 자리 외에는 사교계의 행사에는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는 벨리사였다. 케닝 부인이라는 여인도 얼굴만 한 번 봤을 뿐, 사적으로는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이런 귀물을 선물했다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과 친해지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어느 쪽과도 가까워질 생각이 없다 하셨다."
귀부인들의 친목은 단순히 여인들끼리 친분을 다지는 선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녀들의 남편. 나아가 두 가문 사이의 교분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연히 정치적인 이해관계까지 함께 얽혀 들어가는 일이기에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벨리사는 그녀의 남편이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제껏 테리브란의 사교계에 발을 딛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해 올 이들과 괜히 얽혀 곤란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저 또한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 염려하실 필요는 전혀 없을 거에요."
"무슨 뜻이냐?"
"장군께서 이번에 임지로 부임하시면서 우슈무르 가문의 자제를 휘하로 들이셨다는 것을 부인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지."
"라스케르 케닝 공은 일찍이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을 지원하던 이였습니다. 케닝 가문 자체가 우슈무르 가문과 대대로 이어져 있던 가문이지요."
"그래서?"
"장군께서 우슈무르 가문의 지지를 받으시고, 그 자제까지 휘하로 거두시지 않았습니까? 켄이 가문은 우슈무르 가문과 긴밀한 사이고, 그런 케닝 가문의 안주인이 부인께 선물을 보냈지요. 부인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알지만, 어차피 장군께서 이미 우슈무르 가문과 깊은 연을 맺으셨으니 부인께서 케닝 부인과 교분을 맺으신다 한들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설득력이 있었다. 벨리사가 생각하기에도 루시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루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벨리사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지 네가 무턱대고 먼저 재단할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네가 영특한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허나 명심해라. 아무리 영특한 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네가 네 영특함에 기대고 자만할수록 언제고 실수를 저질렀을 때 네가 치러야 할 대가는 더욱 커질 것이다."
"예. 부인의 말씀, 깊이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무겁게 루시를 나무란 벨리사는 고운 비단에 싸인 물건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선물을 받은 마당에 다시 돌려주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조만간 케닝 부인에게 화답을 해야겠구나."
"송구합니다 부인."
"아니다. 내가 나무란 것은 네가 앞서나갔기 때문이지, 네 말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니."
루시의 말대로, 군터가 정치적으로 우슈무르 가문과 손을 잡은 상황에서 우슈무르 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된 케닝 가문과 굳이 벽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다, 루시를 통해 그쪽에서 먼저 손을 내민 상황이니…….
"그런데…이게 주름도 펴줄지 모르겠구나."
벨리사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어두워졌던 루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름에도 효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꾸준히 바르면 마흔이 넘은 여인도 스무 살 때로 돌아간다고 하니 틀림없이 효험을 보실 거에요."
"그래?"
선물로 받은 물건이 적어도 반 년 동안은 아낌 없이 써도 될 정도라는 말에 벨리사는 옅게 웃음을 머금었다.
*
"수고했다."
"한 일이라고는 왔다 갔다 한 것 밖에 없습니다."
토어릭이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코누다이안에 가서 구해온 동료만 백 명에 달했다. '데려온'이 아니라 '구해온'이다.
"네 공을 어찌 치하할까."
군터가 웃으며 말했다. 드물게 짓는 뚜렷한 웃음이었다. 그에 토어릭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는 제가 보았던 것들에 대해 먼저 보고를 올리고자 합니다만."
"그래. 그것도 중요하지."
사절단을 보낸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코누다이안에 잡혀 있는 수하들을 되찾아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곳의 상황을 탐문하는 일이었다. 둘 중 하나는 이룬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나머지 하나에 대해 들어볼 차례였다.
"짐작하신 대로, 코누다이안의 실권은 미겔이 틀어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라일라라는 계집이 제 핏덩이 아들을 앞세워서 섭정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실제로 앞에 나서는 건 미겔과 미트라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겔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델핌 남작이라는 자가 리에론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정무에 크게 끼어드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실세는 미겔이었습니다. 실제로 소관과 협상을 한 것도 그 자였고 말입니다."
"협상이라."
"명목상은 말입니다."
"그래. 그 외에는?"
"병사들은 형편없었습니다. 한 번 물갈이를 한 건지, 다들 꽤나 늘어져 있더군요. 이곳의 정예 병사 삼천만 끌고 가도 어렵지 않게 위글로우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음. 영주는?"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특히 영주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감추려 하더군요. 와병 중이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살아있다는 말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런가."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영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다 하니 꽤나 실망스러웠다.
'어쩔 수 없지.'
그 또한 토어릭의 말처럼 막시밀리언이 살아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설령 살아있다고 한들 '살아있다'고 말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으리라 짐작했다.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군터는 야심만만했던, 젊은 영주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