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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65화 (465/1,064)

465화

"오늘도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양입니다."

"부지런하기도 하군."

수하의 보고를 받은 미겔이 미간을 문질렀다.

파헨델 사절단의 대표인 토어릭이라는 자에 대한 보고였다. 그 자의 동향을 놓치지 말라고 수하들에게 지시하고서 고작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보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보고들을 종합해 보면, 이 토어릭이라는 놈은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정말이지 겁 대가리를 상실한 놈이었다. 아무리 이쪽이 대놓고 해코지를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해도, 적진에 들어온 주제에 어찌 이리 날뛰어댈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을 보내도 아주 제대로 골라 보냈군.'

목적이 이쪽의 속을 뒤집어 엎는 것이라면 정말 딱 적임자를 골라서 보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어디로 갔다더냐."

"내성의 상가로 갔다더군요."

"더 자세히."

"포목점을 가서 영주관저로 들어간 옷감을 물어봤답니다."

"…그 놈. 정말로 목숨이 대여섯 개쯤은 모양이군."

표정은 굳어졌는데 입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대놓고 찔러대니 딱히 경계심도 들지 않았다. 단지 이게 뭐 하는 수작인가 싶어 머리가 복잡해졌을 뿐.

"그래서, 알고 싶은 건 알아갔다더냐?"

"설마 그렇게 움직이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탓에……."

"다 알아갔다는 소리군."

"죄송합니다."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란 것은 안다. 다만 짜증이 나는 것은, 뭐가 됐던 간에 변명부터 해대는 태도였다.

'도무지 쓸만한 녀석이 없어.'

그나마 있는 녀석들 중에 가장 괜찮다는 녀석이 이 정도다.

"…그 녀석에게 사람을 보내라. 내가 보잔다고 해."

"예. 헌데 무슨 일로……."

무능하고, 겁이 많은 데다가 주제까지 모른다. 미겔의 표정과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아, 옛."

미겔은 도망치듯 몸을 돌리는 수하를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그의 요청에 대한 토어릭의 답을 전해 듣자마자 영주 관저로 향했다.

*

"답답하시지는 않습니까?"

"조금 그렇기는 합니다."

"생각하셨던 것과는 다르지요?"

"그렇기는 합니다만…여차하면 칼부림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왔으니, 이 정도면 양호한 편입니다."

보리스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토어릭은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제 보니 이 어린 공자님은 농담에도 제법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농담이 맞는 거겠지?'

진정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토어릭님께는 정말 놀랐습니다."

"예? 제게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공이 이렇게 용맹하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용맹이라니, 저와는 잘 안 어울리는 말입니다만."

실제로 토어릭은 몸 쓰는 일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쓸만한 것이라면 말 타는 재주 정도겠지만, 그의 동료들 중에는 말을 잘 타는 것을 넘어서 말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이들이 수두룩했기에 하나뿐인 재주조차도 어디 가서 내세울 수가 없었다.

"무공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잘 싸우는가는 상관 없습니다. 얼마나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흐음."

"이곳은 적지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공은 원수들의 앞에서 할 말을 다하셨지요. 그들이 불쾌해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보란 듯이 그들의 속을 긁으셨습니다. 그 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셨지요."

"흐흐."

"공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저들이 우리를 쉬이 건드리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더라도,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뭐…그렇지요.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놈들이 손을 쓴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일 겁니다."

"헌데 어찌 그리 대담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으면 놈들도 죽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공자의 아버님께서 손수 군대를 이끌고 와 저놈들의 목을 베어주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서 안 죽더라도 어차피 늦든 빠르든 그리 되겠지요."

"…단지 그뿐입니까?"

보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토어릭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태연히 대꾸했다.

"공자. 어차피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그러니 저는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입니다. 정확하게는, 어떤 의미도 없이 죽어버리는 것이 두렵지요."

"……."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이곳에서 저놈들의 칼에 맞아 죽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죽으면, 그것은 장군께서 군대를 일으키실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 하나 죽음으로 인해서 코누다이안이 불타고, 나아가 베이고르가 불탄다면…그건 꽤나 근사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것을…근사한 일이라고 봐야 합니까?"

"아닙니까? 음. 그렇다면 멋진 일 정도로 해둘까요?"

"……."

보리스는 토어릭에 대해 가졌던 존경이라든지, 감탄하는 마음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토어릭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공감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그의 태도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미겔이 제게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미겔이 말입니까?"

보리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매섭게 치뜬 눈에는 사나운 살기까지 엿보였다. 그 눈이 정말 부친과 판박이였다. 물론 부친의 눈이 호랑이의 눈이라면, 이쪽은 잘 쳐줘봐야 성질 사나운 고양이 정도?

"무슨 용무랍니까?"

"진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겠지요. 제가 하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니까 그쪽도 신경이 쓰였을 겁니다. 요 며칠 동안은 그래도 참고 넘겼으나, 이제 더는 못 참겠다는 것이겠지요."

"어찌 나올 거라 보십니까."

"글쎄요. 몇 가지 짐작은 되지만, 확정은 못 내리겠습니다."

"으음."

심각해진 표정의 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토어릭이 한 마디를 툭 뱉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가만히 계시겠다고 약조만 해주신다면."

"물론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보리스는 위글로우에 온 이후로 줄곧 쥐 죽은 듯이 있어야만 했다. 토어릭의 엄명이었다. 그런 결정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보리스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차에 토어릭이 원수와 만나는 은밀한 자리에 자신을 대동하겠다 하니 보리스로서는 흥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가서 원수 놈의 목을 칠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조용히 흥분하고 있는데, 이어진 토어릭의 말은 더더욱 보리스의 피를 끓게 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최악의 경우에는 피를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손으로 미겔 그 자의 목에 칼을 꽂아주겠습니다."

"으음. 저도 정확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토어릭님이라고 해도 그 일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푸흐흐. 뭐, 두고 보지요."

날이 저물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토어릭은 보리스와 함께 수하들을 이끌고 나왔다. 미겔이 보낸 안내인이 그들을 약속 장소로 안내했다.

내성에 위치한 말끔한 건물이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겠지. 쥐새끼 같은 놈들.'

미겔이 이끄는 감찰대에 전직 도적 출신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과연 예전에 몸에 익은 버릇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었다.

냉소를 머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휑한 내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원래 있던 것을 다 치워버린 모양인지, 있는 거라고는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에다가 큼지막한 원탁 하나. 그리고 그것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는 이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앉은 채로 맞이하다니, 꽤나 경우가 없군."

"그대가 경우를 따지는 것도 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소? 첫날의 일도 그렇고, 그 뒤의 일도…흐음. 뭐, 피차 서로 간에 알 것은 다 아는 만큼 괜한 말로 시간을 허비하지는 맙시다. 앉으시오."

혀를 찬 토어릭은 미겔이 가리키는 의자에 가 앉았다. 보리스, 그리고 그의 수하들은 그의 뒤편에 조용히 가서 섰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그러니 서로 솔직해지는 게 어떻겠소?"

"솔직? 솔직이라고 하니 물어보지. 내가 그대를 잘 아는 것은 맞는데, 그대가 날 안다고?"

토어릭이 미심쩍다는 듯 물으니 미겔이 쓴웃음을 지었다.

"음…그렇소. 난 그대에 대해 잘 모르지. 하지만 그대의 주인은 잘 아오."

"아니. 아니야."

미겔이 다 털어놓듯이 말을 했으나, 토어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내 주인에 대해 잘 몰라. 단지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다 치지. 그래서, 그대의 주인이 원하는 게 뭐요?"

"그래. 곧바로 확인시켜주는군. 내 주인을 잘 안다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는 모르나?"

"말장난이나 들으려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오."

"내가 마련해달라고 한 자리도 아니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이 그대의 무덤이 될 수 있음을 아는가? 그대의 수하들은 물론이고, 그대의 작은 주인 역시 마찬가지."

미겔의 시선이 토어릭의 뒤편에 선 보리스를 향했다. 그러자 보리스가 살기를 드러내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뿐. 보리스는 턱 근육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이를 악 물었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왜 말을 도중에 끊나?"

"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보리스와는 달리, 토어릭은 여전히 태연했다. 목숨을 위협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한 것을 넘어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내 목이 떨어지고, 공자의 목이 떨어지고, 뒤에 있는 놈들의 목이 떨어지고, 네 목이 떨어지고, 네 뒤에 떨거지들도 목이 떨어지고, 이 도시에 있는 놈들도 다 목이 떨어지고, 음…거기에 더해서 이 나라에 있는 놈들 대부분의 목도 떨어지겠지. 그건 왜 말은 안 하고 도중에 끊었느냐는 거다."

"…무슨 소리지?"

"특히 너. 네놈은 팔 다리가 잘린 채로 들개와 새들의 먹이가 될 테지. 차양 뒤에 숨어있던 그 계집도 역시 비슷한 꼴이 될 테고…음, 또 있나? 아! 그 미트라스인가 뭔가 하는 놈도 포함해야겠군."

미겔이 피식 웃었다.

"협박인가?"

"아니. 협박은 네놈이 한 것이 협박이고, 내가 한 것은 부연설명 정도라 할 수 있지."

토어릭이 의자에 기댄 몸을 슬쩍 뒤로 젖혔다.

"그래서, 우리의 목을 칠 텐가? 그럴 거면 말해라. 수고 끼칠 필요 없이 우리가 알아서 우리 목을 찌를 테니까. 어때? 그리 해주길 바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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