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어쩔 셈이오."
"어쩔 셈이라고 해도…달리 뭐 수가 있습니까?"
파헨델에서 출발한 사절단이 이미 국경을 넘었고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났다. 애당초 그들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고, 지금에 와서 뭔가를 논한다는 것도 솔직히 우스운 일이었다. 적어도 델핌 남작은 그리 생각했다.
'발등에 아주 불똥들이 떨어졌구만."
그는 이곳에 자리한 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코누다이안의 기사 미트라스, 미겔. 그리고 뭐 그리 비싸게 구는지 차양을 치고 얼굴도 안 보여주는 영주 부인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입에 뭐라도 문 것처럼 말 한 마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바로 파헨델의 새로운 사령관이 된 자를 축출한 당사자들인 것이다
'뭐, 리에론 각하께서도 한 몫 하시기는 했지만.'
그게 바로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였다. 그러나 여기 모인 저 자들에 비하면 리에론 공작의 지분은 아주 미미하다 할 수 있었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그는 군터라는 자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원한을 산 일도 없고, 여기 모인 자들처럼 속이 타 들어갈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회담에 참석하기는 했음에도 델핌 남작은 방관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입장을 다른 이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남작께서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미트라스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대놓고 비치자 이번에는 델핌 남작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내가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는 둘째 치고, 그 말투부터 고치는 게 어떤가?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일개 기사 나부랭이와 나란히 보고 있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네."
"……."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미겔이 나섰다.
"델핌 남작께서는 기분 상해하지 마십시오. 남작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서 말입니다."
"음."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기를."
"쯧."
델핌 남작이 혀를 차면서도 찌푸린 표정을 풀자 미겔은 그에게 살짝 목례하고서 본격적으로 회담을 주재하기 시작했다.
"파헨델에서 오고 있는 사절단의 문제는…물론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미겔의 말에 설득 되었다기보다는,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겠다는 수용의 표현이었다.
"그 자가 적포 장군의 위를 받고 파헨델의 사령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7황자의 신하에 불과합니다. 아국과 7황자가 맺은 협정을 일개 장군이 깨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조금 심술을 부리는 정도가 전부일 겁니다."
"심술이라. 허!"
미트라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당연히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지요. 믿기 싫은 현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현실은 현실이니."
"그럼 그냥 그 자가 어떻게 심술을 부리든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가?"
"당분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면서 기회를 엿봐야겠지요."
"기회? 무슨 기회? 설마하니 뭐, 암수라도 쓰자는 건 아니겠지?"
미트라스의 말에 미겔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자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앉아 골머리를 썩힐 일도 없었겠지."
암살자의 손을 빌려 해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면 일찍이 위글로우에서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분명 죽였다고 생각했거늘.'
직접 목을 베었다. 틀림없다.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할 그가 아니었고, 손에 남았던 감각은 절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사실 미겔은 군터가 적포 장군이 되고 파헨델의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보다도, 그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방금 전에 직접 그의 입으로 말했듯이, 현실은 현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자가 7황자의 진영에 들어간 지 10년이 됐소, 20년이 됐소?"
"음……."
"기반이라 할 것이 전무한 상황이오. 듣자 하니 처음에 뒷배를 봐주던 제레이스 가문과도 갈라진 모양이던데, 운 좋게 공을 세워 황자의 총애를 얻었다지만…쉽게 얻은 총애는 쉽게 사라지는 법 아니겠소?"
"실각시키자는 말인가?"
"우리가 아니라도 난 데 없이 굴러들어와 적포 장군의 자리를 꿰찬 자요. 시샘하는 자들은 많을 것이고, 경계하는 자들은 더더욱 많겠지. 우리가 아니라도 어련히 나설 자들이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들에게 적당히 성의를 표하면서 작은 힘이라도 더 실어주면 되겠지."
"그 말처럼 되었으면 좋겠군."
"될 거요. 되게 만들어야 하고."
굳은 목소리로 말하는 미겔. 그런 그를 델핌 남작은 묘한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녀석이 실세란 말이지.'
미트라스는 어리석다. 머리를 아예 못 쓰는 것은 아니지만 셈이 깊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움직일 때가 적지 않다. 반면에 저 미겔이라는 녀석은 머리도 좋은 데다가 필요에 따라 굽히기를 망설이지 않고, 무엇보다 상황을 넓게 볼 줄을 안다. 일을 처리하는 신중함과 치밀함도 높게 살만 하지만, 저 정도의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이는 정말로 드물었다.
'탐이 나는 녀석이지만…….'
인재로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놈이지만 델핌 남작은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주인을 문 전적이 있는 놈인데다가.
'얼마나 대단한 계집인지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지.'
차양 너머에 자리한 여인. 코누다이안 자작 부인과 미겔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흘러 다니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이 뜬 소문으로 취급하는 모양이지만, 델핌 남작은 그것이 마냥 헛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익숙한데…또 낯설군요."
보리스의 감상이 곧 토어릭의 마음이었다.
"기분이 묘하시겠습니다."
"예. 이 도시는 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부터 저는 이곳에서 살았으니까요."
"흐음. 뭐 저도 공자와 비슷합니다. 고향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 도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말입니다."
감회가 새롭다 정도로 말할 수 있으리라. 다만 토어릭은 그런 말랑말랑한 감정은 곧바로 마음 속에서 치워버렸다. 이곳은 적지이며, 그는 적지를 살피러 온 정찰병과도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그가 정찰을 하러 왔다는 것을 적들도 뻔히 알고 있으리라는 것.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아는 가운데 벌어지는 신경전이라고나 할까.
"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조용히 해주셔야 합니다. 사실 제 마음 같아서는 공자를 대동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가만히 있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음."
적의 창칼은 두렵지 않아도 보리스가 사고를 치는 것만은 두려운 토어릭이었다. 하지만 슬슬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보리스에게 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가는 정말로 엄한 곳으로 튀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마중을 나온 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없군.'
나름대로 위치가 있어 보이는 자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 중 미겔과 미트라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격에 맞게 대우하기는 하겠지만, 7황자가 아닌 일개 장군이 보낸 사절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자…어디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실까.'
토어릭과 보리스를 포함한 십여 명의 인원은 안내자들을 따라 영주 관저로 향했다. 수십, 수백 번을 보고 거닐었던 길이, 마치 오늘 처음 보고 걷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사자는 소영주님께 인사 올리시오."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중년인의 말에, 토어릭은 몸을 굽히는 대신에 보란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코누다이안의 영주님을 뵈러 왔는데, 영주님은 어디 계신 거요?"
"커흠! 영주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시어 사자를 만나실 수 없소. 하여 소영주께서 영주님을 대리하시어……."
토어릭은 불편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영주의 의자에 앉아 있는 꼬마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몇 살이나 먹었을까? 6살? 7살? 아무리 많이 잡아줘도 10살은 절대로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잘생긴 꼬마 아이가 눈을 깜빡 거리고 있었다.
'이럴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김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자는 예를 갖추시오!"
몸을 낮추지도 않은 채 꼿꼿이 서서 소영주를 빤히 바라보는 토어릭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큰 무례였다. 그렇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중년인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가 결코 크지는 않았다. 토어릭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일개 장군의 사자에게 제대로 화 한 번 내지 못하는군.'
속으로야 용기 없는 자들을 비웃었지만, 토어릭은 중년인의 말을 듣자마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조금 당황해서 말이오."
"당황?"
"음. 군터 장군께서 이 사람에게 코누다이안 자작을 뵙고 안부를 여쭈라 하셨소. 그런데 자작께서 편찮으셔서 이 사람을 만나실 수 없다니, 덕분에 이 사람이 꽤나 곤란해졌소이다. 하여간 무례를 저지른 점에 대해 사과하리다."
"방향이 잘못 되었소. 이 사람이 아니라 소영주께 사죄 드리도록 하시오."
"아아. 그렇지. 부디 소영주님의 넓은 아량을 바랍니다."
토어릭이 소영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잠시 후. 대답은 소영주가 아닌 그 너머에서 들려왔다.
"사자의 무례를 용서하오."
묘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다시 듣고 싶어지는, 가늘지만 깊은 목소리. 그것을 정확히 뭐라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계집이로군.'
파헨델을 떠나오기 전에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몇 번 스치듯 들은 적이 있었다.
소영주가 앉은 의자 너머, 짙게 차양을 친 공간이 있었다. 목소리는 그 너머에서 나오고 있었다.
"영주 부인이시오. 와병 중이신 영주님을 대신하여 소영주님과 함께 영지의 대소사를 다스리고 계시지."
"귀가 어두워 미리 들어 알지를 못하였소. 뒤늦게나마 영주 부인께도 인사를 올립니다."
토어릭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며 슬쩍 차양이 쳐진 쪽을 살폈다. 어찌나 차양을 두껍게 쳤던지, 밖에서는 차양 너머가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너머에 있었다. 그의 주인을 등 뒤에서 찌른, 교활하고 요사스러운 계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