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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63화 (463/1,064)

463화

할렌과 아드리안 두 사람이 모두 처벌을 받았다. 천부장인 그들이 채찍을 50대나 맞고 요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파헨델의 군중에 흐르던 미묘한 분위기도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당분간은 조용해질 듯했다.

"헌데, 일이 좀 이상하게 풀릴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냐."

"군졸들 사이에서 할렌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순간 군터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살라스가 그를 상대로 싱거운 농담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아드리안과 대등하게 치고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진 모양입니다."

"그게 병사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인가?"

"소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드리안이 그의 휘하가 아닌 군졸들에게는 인망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드리안은 거친 자였다. 자신의 사람은 잘 챙긴다고 하지만, 자신의 사람이 아닌 자들에게는 그리 인기가 없었다. 아니, 그냥 인기만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할렌이 그와, 비록 주먹다짐이었다고는 하지만 한바탕 크게 맞붙어 대등하게 싸웠으니 이전의 '실력도 없으면서 줄 하나 잘 잡아 벼락출세한 천인장' 같은 인식을 일정부분은 벗어 던지게 된 듯했다. 게다가 채찍을 50대나 맞으면서도 비명 한 번 안 질렀다는 무용담 아닌 무용담이 퍼지고 있는 터라, 새롭게 퍼지고 있는 '용맹한 자'라는 새로운 인식은 더 힘을 얻고 있었다.

"뭐, 나쁘지 않군."

"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들은 할렌이 아드리안과 싸움을 벌인 탓에 그들에 대한 파헨델 군졸들의 반감이 더 커질 것을 우려했었다. 그런데 그런 우려와는 반대로, 사고를 쳤는데도 그 결과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이미 말했지만, 당분간은 파헨델에 융화되는 데 최선을 다해라."

"예. 장군께서 우슈무르의 차남을 데려오셨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덕분에 그들 틈에 녹아 드는 것이 현재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할렌의 일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불필요한 충돌은 피해야 한다."

"예."

"그러고 보니 테리브란에서 온다는 충원 병력은 어찌 되었느냐."

"닷새 거리까지 왔다고 합니다."

2황자의 전쟁으로 인해 파헨델의 병력은 이전의 반절도 안 되게 줄어버렸다. 당장 전투가 벌어질 일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인지라 테리브란에서는 2천의 충원 병력을 파병했다. 비록 그 대다수가 기초 훈련만 간신히 마친 신병들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계속해서 충원해준다 했으니…….'

황자는 되도록 제대로 된 병력을 보내주려 했으나 후방에 정예병을 투입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신병들을 파병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고 했다.

'어찌 됐든, 반 년 내로 1만은 맞춰지겠군.'

단일 군세로도 대군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지만 파헨델을 놓고 보면 그래도 조금은 부족하다. 물론 지금처럼 휑한 수준은 벗어나게 될 테니, 그것만 해도 일단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하루하루 별 다를 것 없는 날들이 지나가던 와중. 라몬이 군터의 집무실을 찾았다.

"장군."

"무슨 일인가?"

"반…아니, 베이고르의 상인 무리가 장군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베이고르는 제국, 정확하게는 7황자와 교역을 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움직이는 베이고르의 상인 중 열에 일곱은 파헨델을 지나곤 했다. 그러니 새로이 파헨델의 사령관이 된 군터에게 인사를 하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것을 넘어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런 그들의 당연한 행동을 당연한 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쓰이십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 중에는 필시 코누다이안에서 온 자도 있을 것이니."

"그렇겠지요. 허나 장군께서 그 놈들을 신경 쓰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제 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군의 눈치를 살피며 두려워하는 것뿐일 테니까 말입니다."

라몬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나, 군터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마음이 쓰이는 것은 라몬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코누다이안이라…….'

한때는 특별했지만 지금은 그저 원수들이 있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이다. 후에 그가 코누다이안에, 위글로우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 그때의 그는 피를 묻힐 칼 한 자루를 빼어 든 채일 것이다.

"어찌 하오리까. 장군께서 만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아니. 만나지. 들여라."

"예."

상인의 무리는 대략 스물 정도였다. 각 상단의 대표격들만 온 것일 텐데도 그 정도였다.

"미천한 자들이 장군을 뵙습니다."

"장군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붙인다.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그들을 군터는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닿기 전에도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들은 이제는 몸을 떨기까지 했다. 군터가 평소처럼 기세를 안으로 다 갈무리 하지 않은 탓이었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예…예. 그렇습니다. 소인들이……."

"이유는?"

"파헨델을…다스리시게 된 자, 장군께…인사를 올리고자……."

대표로 말을 하는 자의 얼굴이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렸다. 배나시드에서 온 상단의 인사였다. 베이고르의 수도에서 온 자인 만큼 그가 이들 무리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름 대표라고는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의 역할은 그저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

'허수아비로군.'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대는 것이나 말을 떨어대는 것이 연기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군터는 계속 그를 바라보는 척하면서 나머지를 은밀히 살폈다.

대략 너덧 정도. 의식하지 않으면 몰랐을 만큼 조용한 시선이 느껴졌다. 명백히 탐색의 의도를 담은 시선들이었다. 앞에 세워둔 허수아비와는 다르다. 그들이 진짜였다.

"베이고르와의 일은 전하께서 명을 내리신 것이니 내게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굳이 인사를 하겠다니 받도록 하지. 이제 물러가라. 갈 길이 멀 것이 아닌가."

"예, 옛."

상인들이 물러가고 잠시 후, 토어릭이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주머니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뭐냐."

"상인들이 장군께 성의를 표했습니다. 다른 것들도 더 있습니다만, 가장 큼직한 것만 가져왔습니다."

군터가 눈짓하니 토어릭이 탁자 위에 주머니를 올리고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살짝 연 것만으로도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보석들이었다. 금으로 바꾸면 주머니 크기의 수십 배 이상은 될 것 같은.

"가져오지 않은 것들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합니다."

"인사 한 번 제대로 하는군."

"장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눈물 겨운 노력 아니겠습니까."

그들 모두 군터가 베이고르에서 제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상당히 껄끄러운 과정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거나, 알지는 못해도 짐작은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괜한 불똥이 튀는 것을 피해보고자 꽤나 무리를 한 것일 테고.

"어찌 할까요."

"일부는 테리브란에 보낼 것이다."

"허면 나머지는."

"적당히 나눠라. 병사들에게는 술과 고기를 내리도록 하고."

"파헨델의 모든 군졸들이 장군의 이름을 찬양하겠군요."

"아. 그리고."

주머니를 도로 가지고 돌아가려는 토어릭을 군터가 붙들었다.

"따로 하명하실 일이라도."

"조만간 네가 해줄 일이 생길 것 같다."

"예. 무엇이든지 기꺼이."

어떤 일이든지 상관 없다는 듯이 담담히 답하는 토어릭. 그 모습이 군터의 눈에도 꽤나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

'흐음. 어떤 일이든 상관 없다고 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일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설마 이런 '짐'까지 떠안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때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 그보다 조금 뒤에 '짐'이 그에게 부탁을 해왔을 때 매몰차지 못했던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됐다.

'짐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실례인가.'

뭐라도 해보겠다는 의지는 높이 산다. 그 때문에 피곤해지는 사람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것까지는 그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니.

"그나저나 공자."

"예."

"용케도 장군께 허락을 받으셨습니다."

보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아닌가. 거기에 가야 할 곳이 어디 그냥 그런 곳도 아니고 베이고르. 그것도 코누다이안이니까 말이다.

"맹세코 공의 일에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믿음직스럽군요."

"저는 그저…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았던 자들을."

"음. 혹시라도 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칼을 뽑아 들거나 하셔서는 안 됩니다. 공자의 칼 솜씨가 대단한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다가는 우리 모두 위글로우에서 살아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설마요. 저도 그 정도 분간은 할 줄 압니다.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못 믿느냐는 듯, 보리스가 불퉁한 투로 대꾸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반복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보리스의 성미가 할렌처럼 급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꼬여 있는 구석이 있었다. 토어릭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아마도…조급함이겠지.'

무엇을 그리 조급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싶다는 마음에 이것저것이 더해진 것 같았지만…토어릭은 그런 보리스의 치기 어린 마음이 자신의 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음. 공자. 이제부터는 베이고르입니다."

"기억이 납니다. 아마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한 십 년 정도는 된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뒤따라 붙을 추격대를 걱정하며 국경을 넘던 때와는 처지가 너무나도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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