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아마도 모두가 예상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늦든 빠르든 결국 한바탕 사고가 터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군터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결국은 터졌을 그 사고가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주먹다짐?"
헐레벌떡 뛰어온 병사가 전한 말을 듣고, 군터는 순간적으로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즉각 출동한 살라스 천부장이 두 천부장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둘 다 무사한가?"
"너무…아니, 아주 멀쩡합니다."
화도 나지만 웃기기도 웃겼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은 나지 않았다. 군터는 말실수를 삼키고 쩔쩔매는 병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이 잡혀 들어갔다는 감옥으로 향했다.
"엉망이군."
군터는 어둡고 습한 감옥의 한 방에서 할렌과 독대했다. 할렌은 특별히 족쇄를 차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일단 사고를 쳐서 잡혀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식적인 수감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군터가 한 엉망이라는 말은 천부장 씩이나 되어 동료와 주먹질을 해서 감옥에 잡혀온 행동거지도 행동거지지만, 그보다는 여기저기 부어 오른 채 살이 터지고 피가 굳은 그의 얼굴에 대한 감상이었다. 심하게 얻어터졌다는 말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얼굴이 군터로 하여금 보는 순간 혀를 차게 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할렌이 푹 고개를 숙였다. 사고를 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얻어터진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 모습이 꽤나 안쓰러워 보였다.
"……."
아주 오래 전, 혈기만 앞서서 앞뒤 안 가리고 여기저기 뛰어들던 애송이 시절의 할렌이 떠올랐다. 시간이 흐르고 자식도 생기면서 많이 차분해졌다고 생각했건만,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찌 된 일이냐. 오면서 대충은 들었다만, 네게 다시 직접 듣고 싶구나."
"그것이……."
할렌은 살짝 새는 발음으로 떠듬떠듬 이야기를 했다. 오면서 들은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하기는 했지만 결국 내용은 같았다.
"능력을 보이라 했었지. 이런 식으로 하란 뜻은 아니었다."
"…송구합니다."
군터는 숙인 고개를 여전히 들지 못하는 할렌을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처분을 기다려라."
"예."
"사사로이 형을 감해줄 수는 없다."
"물론입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 부족함 없이 받게 해주십시오."
할렌을 보고 난 후. 군터는 아드리안이 갇혀 있는 옥방으로 향했다.
"음."
아드리안은 군터를 보자 할렌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숨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군터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할렌보다는 낫군.'
그러나 어디까지나 할렌에 비해서 낫다는 것이지, 아드리안의 몰골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두 사람의 주먹다짐에서 우세를 점한 쪽은 아드리안인 것 같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할렌은 군터 휘하에서 일신의 무공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며, 살라스나 니클라스와 함께 최고를 다투었다. 그런데 그런 할렌을 상대로, 물론 맨주먹 싸움과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실전은 다르다지만 어쨌거나 우세를 점하다니? 아드리안이 실력 하나만은 파헨델 최고라던 라몬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장군께서 다 행차하십니까?"
이런 상황에서조차 툴툴대는 아드리안. 그에 군터는 혀를 찼다.
"천부장끼리 주먹다짐을 해?"
"칼부림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뭐라?"
"그 얼간이 자식은 병사들을 부리면 안 되는 놈입니다. 전장에 나가면 적이 아니라 지 부하들 칼에 맞아 죽을 놈이란 말이지."
"할렌이 내 밑에서 치른 전투가 백 회가 넘어간다. 그 중 대부분을 지휘관으로 참전했었고."
"그거야 장군께서 계셨으니 그랬던 걸 테고, 만약 놈에게 병사 천을 주고 독자적으로 전투를 치르게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네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 먼저 할렌을 자극한 것은 알고 있나?"
"그렇다 한들……."
"단순한 태도 문제가 아니라 하극상에 준하는 정도였다더군."
"…뭐요?"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갔었나?"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흥분해서 달려간 것 같았다. 다짜고짜 찾아가 주먹다짐을 벌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아드리안 역시 할렌과 비슷한 성미를 가진 듯했다. 일단 한 번 머리가 뜨거워지면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몸부터 움직이는.
"내일 바로 너희의 처분에 대해 논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그 병사들의 처분 역시 논해야겠지."
"……."
똥 씹은 얼굴이 된 아드리안은 군터가 옥방을 나설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
다음날 아침. 군터는 두 사람의 처분을 논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이른 아침이었고, 거의 잠에서 깨자마자 불려온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군터는 입 아프게 설명할 수고를 덜어도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처분을 논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군터는 할렌과 아드리안이 주먹다짐을 하게 된 원인. 할렌에게 하극상을 벌였던, 아드리안 휘하 출신의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전부가 이미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아드리안이 한 차례 불만을 드러냈었지. 그것이 비단 그 한 사람만의 마음이 아님은 알고 있다. 아니꼬울 수도 있겠지."
그 대목에서 표정이 살짝 변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군터는 그것을 모르는 척 넘기고 말을 이었다.
"속으로야 어찌 생각하든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군터의 기세가 급변했다. 숨을 막히게 하는 투기가 뻗어 나왔고, 흉기 같은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콰지직!
두꺼운 원목으로 만든 회의용 탁자에 쩍하고 금이 가더니 반으로 쪼개져 무너졌다. 앉아 있던 무관들이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며 무너져 내리는 탁자를 피했다.
"전시는 아니라 하나, 이곳은 삼주(三州)를 잇는 교점이자 베이고르와 맞닿은 최전방의 요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군기를 흐리는 행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은은하게 비치는 살기에,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한 명씩 쓸어보니 숨소리마저 제대로 나는 이가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에 살라스가 입을 떼었다.
"장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을 것입니다. 허면 장군께서는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하실 요량이신지."
"말했듯, 엄히 처벌할 생각이다. 관련한 모두 목을 베어버리면 되겠지."
"헙!"
목을 베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여기저기서 기겁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 과합니다. 재고해보심이 어떨지."
살라스가 즉각 반대를 표했다. 그에 군터는 노골적으로 노기를 드러냈다.
"재고라니. 방금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더냐? 내 분명 군기를 흐리는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 했다."
"물론 소관은 장군의 뜻을 알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허나 장군. 장군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군중의 분위기가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어찌 보면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은 일이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터질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위하며 그냥 넘기자는 말이냐?"
"아닙니다. 단지 장군의 뜻을 엄히 보이시되, 경직된 군심을 장군의 너그러움으로써 동시에 보듬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군심을 보듬어라?"
군터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목소리들이 끼어들었다.
"소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소관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라도 여럿이 뭉치니 힘이 실렸다. 군터는 할렌의 말에 힘을 싣는 이들을 제지하지 않고 있다가 목소리들이 사그라질 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리 말을 하니 이번만은 내 마음을 굽히도록 하겠다. 하긴, 부임하자마자 천부장의 목을 둘씩이나 날리는 것도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닐 터이니……. 두 사람에 대한 벌은 참형 대신 편형으로 정하겠다."
"장군의 너그러우심을 온 군졸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
할렌과 아드리안이 나무틀에 나란히 묶였다. 두꺼운 줄에 팔과 다리가 묶이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빌어먹을. 꼴이 우습게 됐군."
병사들의 참관은 허락되지 않았다. 허나 백부장 이상의 장교들은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드리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자 할렌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중얼거린다고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고, 주변이 조용했던 탓에 그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아드리안의 귀에 들어갔다.
"그래. 누구 덕분에 말이지."
"…뭐, 부정하지는 않겠다."
인정한다는 듯한 말투.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기에, 할렌은 퉁퉁 부은 눈으로 슬쩍 옆을 바라봤다.
"그래도 말이지. 나도 나지만 그쪽도 그쪽 아닌가? 그쪽이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졌다면 이런 일은 없었어. 아니면 손버릇을 좀 고치던가. 그리 잘난 주먹도 아닌데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니까 일이 커진 거지."
"뭐라고? 도중에 끊기지만 않았어도 네 그 이빨을 모조리 부러뜨려버렸을 거다."
"그래. 그 성질머리 좀 죽이라고. 지금만 해도, 열이 좀 오른다 싶으니까 감당도 못할 헛소리를 찍찍 뱉어대잖나."
아드리안이 연신 이죽거리자 할렌이 발끈하여 날뛰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밧줄이 그의 사지를 단단히 묶은 뒤였다.
"둘 다 기운이 아주 넘치는군. 나쁘지 않지만 조금 아껴두는 것이 어떤가? 이제 곧 그 기운이 필요해질 텐데."
형의 집행을 맡은 살라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그에 할렌은 입을 꾹 다물었고, 아드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빠르고 깔끔하게 가지. 구경거리가 되는 취미는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살라스가 물러나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각기 세 명의 병사가 할렌과 아드리안의 뒤에 섰다. 그 중 한 명은 기다란 채찍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각기 맞아야 할 횟수가 50회였기에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채찍을 잡아야 했다.
"시작하라."
"옛."
물에 젖은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쫙쫙 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등판에 선명한 붉은색 선이 그어졌다. 두 사람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결코 입이 열리거나, 비명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촤악!
열 대. 스무 대. 서른 대.
핏발 선 눈에 핏기가 점점 더해져 가는 가운데, 채찍을 맞는 당사자들보다 더 표정을 찡그린 구경꾼들이 점점 처절하게 변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