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군터가 파헨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파헨델의 현황 파악이었다.
2황자와의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파헨델의 상주 병력은 1만 4천 가량이었다. 그랬던 것이 전쟁이 발발하며 반절 이하로 줄어버렸다. 충원이 될지, 된다면 언제 될지에 기약도 없는 상황에서 군터는 파헨델에 주둔한 군대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고작 육천이 조금 넘는 병력이 있는 요새에 천부장은 열 명이 넘게 있다. 지휘 병력이 고작해야 수십이거나, 그마저도 없는 천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천부장들 중에는 군터 휘하의 살라스나 할렌도 포함이었다.
"…그런 연유로, 부대를 재편해야 할 것 같네."
군터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 없이 서로 눈치만 보았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다시 말해 휘하 병력을 온존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유일하게 눈치를 보지 않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뭐, 전쟁통에 병력의 반 이상이 갈려나갔으니 재편이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만……."
아드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새로운 지휘관을 만난 병사들이 제대로 통제가 될지 의문입니다. 특히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자들을 쉬이 상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는…….."
"말을 꽤나 재미있게 하는군."
"음?"
"그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자라 함은, 나 같은 자를 말하는 건가?"
"글쎄.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다만, 왜? 본인 이야기 같은가?"
할렌이 이를 드러냈다. 군터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성질을 못 이기고 일을 벌여도 크게 벌였으리라.
"무슨 생각이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발을 하지 않았나."
군터가 지그시 바라보니 아드리안도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거나, 했던 말을 도로 주워담지도 않았다.
"도발이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발이 아니라면 뭐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설명해라. 들어는 보겠다. 허나 설득력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뭐, 그러시지요. 적포 장군께서 벌을 하시겠다면 소관 같은 것이야 달게 받아야지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목소리만 가라앉았다 뿐이지 내용은 여전히 비꼼과 조소가 가득했다. 이제는 군터도 슬슬 화가 나려던 순간, 아드리안이 다시 입을 떼었다. 그는 군터와 살라스, 할렌 등을 번갈아 쭉 돌아보며 말했다.
"듣자 하니 장군과 장군의 수하들은 제레이스 가문의 객으로 있으셨다지요? 그 전에는 저 북쪽 반군 진영에 몸 담고 계셨고 말입니다. 그랬다가 이번 전쟁에서…아, 정확히는 셀마 성에서 치른 전투에서 공을 세워 지금의 자리에 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소관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
"얼마나 대단한 전투를 치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대단했겠지요. 그 룬차이가 상대였고, 수만의 병력이 부딪치는 대전투였으니까 말입니다. 거기서 대단한 활약을 하셨다지요? 가론드…인가 하는 적장의 목도 베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
아드리안의 입매가 비틀렸다. 얼핏 슬쩍 웃음기가 감도는 정도였으나 날카로운 그의 인상에 그런 표정이 더해지니 사뭇 사나워 보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배가 아프다 이겁니다."
"……."
"백전(百戰)을 치르고도 백부장에 머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곳에도 몇 있고, 소관의 휘하에도 몇 있지요. 그런데 망명자 무리가, 그것도 이전에는 아국의 적이었던 자들이 전투 한 번 치르고 백 번을 싸워 이겨도 오르기 힘든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앉았으니 어찌 배가 아프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런 자들을 어찌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한 번 활약을 했다지만 세상에는 요행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아마도 화가 나는 게 정상일 것이다. 할렌은 말할 것도 없고, 살라스나 다른 수하들을 보아도 다들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불편한 기색 정도는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군터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듣기 전, 아드리안이 가볍게 비아냥거렸을 때가 더 화가 났었다. 그래서 군터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는 자신이 이상한 것인가 싶어 화가 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 아니 추측은 자신이 내심 아드리안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아드리안의 입장이었더라면, 어쩌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아드리안이 한 말 중에 사감이 섞인 것은 있을지언정 틀린 것은 없었다. 군터와 그의 수하들이 아무런 관직도 없는, 일종의 용병과 같은 신분에서 전투 한 번 치르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배 아픈 벼락출세처럼 보일 수도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요인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내 명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군터는 아드리안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 넘겼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건 아닙니다만."
아마도 이런 군터의 반응은 아드리안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것인 듯했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고저 없는 군터의 말에 당황한 듯,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됐군. 혹시 더 투정할 것이 남았나?"
"…투정?"
"없다면 여기까지 하지. 부대 개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다."
회의가 파하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아드리안이 가장 먼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나머지가 그 뒤를 이어 나가고, 회의실에는 몇 안 되는 이들만이 남았다.
"그 자리에서 아드리안을 책하지 않으신 것은 정말 현명하신 판단이었습니다."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던 라몬이 군터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나 할렌은 라몬과 생각이 달랐던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장군. 어째서 그 시건방진 놈을 벌하지 않으셨습니까? 놈은 공개적으로 장군께 대들었습니다. 어째서 그 놈을 그냥 두셨습니까?"
군터는 상반된 두 사람의 말에 담담히 대꾸했다.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투는 조금 거슬렸지만, 말 자체에는 틀린 말이 없으니 그것을 가지고 속 좁게 굴고 싶지 않았다."
"대범하십니다. 만일 장군께서 조금 전 아드리안을 벌하셨다면 동요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드리안이 토로한 불만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를 할 때 은근히 동조의 눈빛을 보내던 이들이 몇 있었다. 불만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더라도, 그런 불만을 크든 작든 가슴 속에 가지고는 있다는 뜻이다.
"녀석을 비롯해서, 여럿과 척을 질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능력으로 보여라. 녀석의 말이 헛소리였다는 것을, 요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면 될 일이다."
군터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그를 따르던 살라스, 할렌 등의 대장이었으나 이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파헨델의 사령관이자, 파헨델에 있는 육천 병사들의 대장이었다. 그리고 대장은 결코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총애하는 수하는 있을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백 명이 아니라 육천 명을 바라보고 신경 써야 했다.
그렇기에 군터는 할렌을 비롯한 수하들이 불만을 가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능력을 보이라 했지만, 살라스와 할렌을 비롯한 이들에게 그럴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부대를 개편하면서 그들은 각기 500명의 병사를 휘하에 두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병사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해야 정해진 근무를 하거나 훈련을 하는 것 정도였다. 그런 소소한, 일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서 무슨 능력을 증명한단 말인가?
"거기! 대열을 맞추란 말이다!"
할렌이 고함을 질렀으나 그의 눈길을 받은 병사들은 미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에 성이 난 할렌이 씩씩대며 다가갔음에도 그들은 늘어진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귀가 막히기라도 했나?"
"아닙니다만."
병사들은 할렌의 거친 기세에 잠깐 움츠러들었으나 숫자를 믿었는지 곧 다시 어깨를 펴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안 그래도 붉어져 있던 할렌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의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으나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다.
"상관에 대한 태도가…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할렌과 마주선 병사들은 아마도 그런 할렌의 모습을 용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건들거리는 한 마디는, 이미 한계에 닿아 있던 할렌의 인내심을 다시 한 번 크게 자극하고 말았다.
"잘 모르겠다? 그래. 그럼 알게 해줘야지."
진작에 불끈 쥐여 있던 할렌의 주먹이 그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병사의 콧잔등을 후려쳤다. 뭔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벌러덩 뒤로 넘어가자 그 동료 병사들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덤벼들었다.
"이 야만인 새끼가!"
상스러운 욕설은 덤이었다. 결코 상관을 상대로 뱉을 말은 아니었지만, 할렌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수하 병사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데만 전념했다.
일곱 명의 병사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다. 가장 적게 다친 병사도 최소 한 달 간은 정양을 해야 할 정도였다.
"어이."
그 일이 있은 날 저녁이었다.
할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왔구만."
"올 줄 알고 있었나?"
"보통은 개를 패면, 개 주인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네놈이 두들겨 팬 녀석 중에, 이제 빵 대신 스프만 먹어야 하는 녀석이 셋이다."
낮게 가라앉은 아드리안의 말에 할렌은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 안됐군."
"날뛰더라도 정도는 지켰어야지."
"그 말은 네 개들에게 먼저 했어야지."
"개가 아니다. 내 개는 더더욱 아니지. 그 녀석들 모두, 이제는 네 수하였다."
"네놈이 그런 말을 하다니, 꽤나 놀랍군. 가증스럽기 그지없고 말이야."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빈 말을 지껄이는 솜씨가 수준급인데? 애초에 그럴 생각도 아니었잖나."
아드리안이 허리춤의 검을 검집 채 옆으로 집어 던졌다.
"목이라도 베어버렸다가는 네 주인께서 슬퍼하실 테니까, 적당히 해주마."
그에 할렌 역시 차고 있던 검을 저 멀리 던졌다.
"자꾸 내가 할 소리를 하면 먼저 해대면 어떻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