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오는군."
더크만이 멀찍이 보이는 붉은 깃발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떠날 때와 다르지 않은 적기(赤旗)이건만 주인만이 달라졌군."
"오. 시의 한 구절 같은데 그래. 듣기 좋으니 계속 해보지 그러나."
"아드리안.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나?"
더크만이 눈을 흘기자 아드리안이라 불린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안 들기는. 단지 난 저 척박한 초원에서 태어난 야만인이 적포를 두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네."
"전하께서 직접 그의 어깨에 둘러주셨다더군.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께서는 직접 후임으로 지목하셨다고도 하고."
"글쎄. 전자야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겠지만, 후자는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모르겠군. 급박한 전시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더크만과 아드리안의 대화에 조금씩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 사내가 끼어들었다.
"그쯤 하지."
그가 끼어들자 이를 드러내던 두 사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다만 더크만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 반면, 아드리안은 곧바로 사내를 보며 이죽거렸다.
"오…그래야지. 티브리악 공께서 그만하라시는데."
티브리악이라 불린 사내는 아드리안의 이죽거림에도 전혀 불쾌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깃발과 그 밑의 무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좋든 싫든 우리의 새로운 상관이자, 파헨델의 사령관이다. 테리브란에 계신 전하를 거스르려는 게 아니라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티브리악 나리."
아드리안이 다시금 이죽거리자 그제야 사내의 서늘한 눈길이 아드리안을 향했다. 그러나 이미 아드리안은 사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는 무리를 보았다.
"그래. 어떤 인간인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깃발이 가까워졌다. 그 밑의 무리도 서서히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점점 줄어들수록, 성문 밖으로 마중을 나온 인사들의 얼굴에 점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특히 가장 앞에 나선 세 사람은, 깃발 아래 선두로 나와 있는 한 사내를 보며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대단하신 분인 것 같은데. 하긴, 그 가론드의 목을 베었다고 했으니."
"……."
놀리는 투인 더크만의 말에도 아드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꾸를 하려고 해도 할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직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심상치 않은 기세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긁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터 장군이십니까."
티브리악이라 불렸던 사내가 대표로 나섰다.
"그렇다. 귀관은?"
"모레인 티브리악이라 합니다."
"티브리악이라."
아무리 그런 쪽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 제레이스에 버금가는 명문 귀족가의 이름이었으니.
"방계입니다. 제 자식 세대는 물려받지도 못할 이름이니 그냥 모레인이라 불러주십시오."
"음. 그러지."
군터가 모레인의 뒤편에 있던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자 두 사람이 군례를 취했다
"더크만입니다."
"아드리안…입니다."
긴장한 기색이 묻어나는 딱딱한 표정과 목소리에,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파헨델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
"알아야 할 것이라…어차피 대략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장군께서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소관에게 여쭈시는 것은 신경 써야 할 자들에 대한 것이겠지요?"
라몬은 세레온 우슈무르 휘하에 있던 무관으로, 셀마 성에서 함께 전투를 치렀던 사이였다. 당시 군터는 세레온 우슈무르의 부관이었던 그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r가 꽤나 말이 통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새로이 파헨델에 부임하게 되자 누구보다 먼저 그를 찾아 자신을 따를 것을 종용했었다. 어차피 파헨델 소속인 만큼 그곳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는 그의 휘하에 들게 될 테지만, 그런 형식적인 관계보다는 진정으로 그를 따라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라몬은 그런 군터의 권유를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모실 상관이었고, 셀마 성에서 보았던 군터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음……. 장군께서 신경 쓰셔야 할 자들이라면 셋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일찍이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께서 파헨델을 관리하실 때에도 특별히 대하셨던 이들이지요."
아드리안. 더크만. 그리고 모레인 티브리악.
"티브리악?"
7황자 진영 내의 유력 세력들에 대해 들었을 때 함께 들은 이름 중 하나였다. 그 이름을 제레이스와 나란히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분명 아록의 총독 직을 역임하기도 했다는 명문 귀족 가문이었을 것이다.
"예. 그 티브리악이 맞습니다. 다만 방계입니다. 간신히 이름을 쓰는 것을 허락 받았을 정도로 멀다더군요. 거의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본인도 티브리악이라는 이름보다는 그저 모레인이라 불리기를 원하니, 그를 아는 이들은 대부분 그를 모레인이라 부릅니다."
"흠. 어떤 자인가."
"뛰어난 군인입니다. 다만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딱 자기가 할 일만 한다는 느낌이 강하지요. 속을 알 수 없는 자라고 할까요. 하지만 맡은 일만큼은 철저하게 하는 자이기에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께서도 생전에 그를 꽤 중용하셨습니다. 셀마 성으로 떠나시기 전에는 그에게 파헨델의 관리를 명하셨을 만큼 말입니다."
"자네의 말만 들으면,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이는 자 같은데."
"예. 문제 될 자가 아니라 신경 써야 할 자입니다. 장군께서 그리 묻지 않으셨습니까? 말씀 드렸듯 그는 뛰어난 군인이라 터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없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은?"
"더크만이라는 친구는 방금 전에 말씀 드린 모레인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호인이고 수하들에게 베풀기도 잘 베푸는 터라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솜씨가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아니라 어떤 일이든 중간은 하는 친구지요."
"친구라고 하는 것을 보니 자네 역시 그와 교분이 있는 모양이군."
"예. 말씀 드렸듯이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자라, 저와도 나쁘지 않은 사이지요. 그 친구 또한 문제될 친구는 아닙니다. 게다가 그 친구는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을 잘 따랐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우슈무르 가의 공자를 휘하에 들이셨으니, 그 친구는 흔쾌히 장군을 따를 것입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 된 자에게 이를 드러낼 자는 아닙니다만."
"좋아. 마지막이군. 아드리안이라는 자는 어떤가?"
이제까지는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라몬이 살짝 낯을 굳혔다.
"아…그 자는 조금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겁니다."
"무슨 의미지?"
"아드리안은 거친 자입니다. 본인의 무공이라든지, 병사들을 부리는 솜씨는 파헨델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그 거친 성정은 상당히 많은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라,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께서도 그 자 때문에 상당히 골치를 앓으셨지요. 특별히 중벌을 받을 만큼 큰 죄를 짓거나 한 적은 없지만, 자잘하게 사고를 쳐대니까 말입니다. 크게 벌을 주려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러자니 그 자의 재주가 아까워 그러지 못하셨지요."
군터가 보았던 세레온 우슈무르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그런 그가 말썽을 피우는 부하 하나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고 하니 그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거칠면서도 자신의 수하들에게는 그렇게 잘해준다는 거지요. 때문에 그의 휘하 병사들은 아드리안의 명이라면 불길에 뛰어들라 해도 뛰어들 정도로 충성심이 강합니다."
그러면서 아드리안의 부대가 파헨델에서 가장 강한 부대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쓸만하다면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은 어째서 아드리안과 그의 병사들을 셀마 성에 데려가지 않았던 건가."
"장군께서는 북쪽의 반군들을 우려하셨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놈들이 쳐들어올 리 없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파헨델은 내륙을 지키는 성벽이지요. 쳐들어올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적이 눈앞에 있다면 방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셨습니다. 하여 아드리안을 남기셨고 모레인을 남기셨지요. 다만 그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들을 중재하기 위한 역할로써 더크만까지 함께 남기셨습니다."
셋 다 나름대로 개성이 강한 자들인 것 같기는 하지만, 신경 써서 봐야 할 자는 아드리안이라는 자뿐인 것 같았다. 라몬의 말에 따르면 말이다.
'직접 봐야 알게 되겠지만.'
라몬을 신뢰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가 사람인 이상 진실만을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 해도 말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감이 곁들어지기 때문이다. 조금 전만 봐도 더크만을 이야기할 때와 아드리안을 이야기 할 때의 분위기라든지, 목소리의 고저에서부터 차이가 났지 않나.
"……."
잠시 며칠 전의 기억을 더듬었던 군터는 길을 여는 세 명의 무관 사이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파헨델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성문 너머와 성벽 위에는 새로운 사령관을 맞이하기 위해 늘어선 병사들이 가득했다.
"현재 파헨델에 있는 총 병력이 얼마인가?"
"육천입니다."
모레인이 답했다. 사령관이 부재중인 때에 임시 사령관으로서 파헨델을 관리했던 것이 그였다. 때문에 그는 지금 군터의 옆에 그의 부관처럼 붙어 군터의 물음에 답해주고 있었다.
"내가 알아야 할 특이사항이 있나?"
"소관이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간의 모든 결재 사항에 대해서는 사령부의 집무실에 정리해 놓았습니다."
모레인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에 군터는 라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가 모레인에 대해 했던 평가 중 한 두 가지 정도는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환영 인사는 이 정도면 됐네. 병사들을 쉬게 하게."
"예."
군터는 모레인의 안내를 받아 사령부의 집무실로 향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투박한 나무 의자와 책상. 그리고 그 앞에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이었다.
"자네도 이만 나가서 일을 보도록. 혹여 따로 필요한 게 있다면 부르도록 하지."
"예."
모레인까지 보내고, 수하들 몇과 남은 군터는 집무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집무실에는 아직 전 주인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