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잠깐 시간 좀 괜찮으십니까 군터 장군."
"놀리려는 게 아니거든 흰소리는 그만두고 잔이나 주시오."
빌리치 아조프. 비스칼 구르얏트. 요 근래 무명을 날리는 두 장군들이 군터의 곁에 다가와 함께 잔을 기울였다. 적포를 수여 받은 군터가 무위장인 그들보다 지위가 높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격의 없게 어울렸다. 처음 군터가 코누다이안의 사신 자격으로 테리브란에 왔을 때처럼.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의 아들을 휘하로 들였다던데. 참으로 절묘한 계책이 아닌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지?"
군터는 작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빌리치 아조프도 딱히 캐물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나저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비스칼 구르얏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파헨델이라니. 반군 놈들의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시간만 죽이게 될 것 아니냐는 말이네."
"그렇다 한들 별 수 없는 일이지."
당사자인 군터는 덤덤한 반면, 빌리치 아조프는 인상까지 구겨가며 투덜거렸다.
"제레이스가 심술을 부리는 것이야. 순순히 놓아주지는 못하겠다 이거지. 전하께서도 그들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실 수는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신 것일 테고. 허나 군터. 너무 심려치 말게나. 자네에 대한 전하의 총애는 틀림 없으니, 전하께서 머지 않아 무슨 구실을 드셔서라도 자네를 다시 불러들이실 게야. 판이 만들어진다면 나 역시 한팔 거들겠네."
"나 역시."
"말이라도 고맙군. 하지만 지금은 그런 먼 이야기보다는 이 자리를 즐기고 싶은데."
"하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을까."
군터뿐 아니라 그들 둘 역시 연회가 끝이 나면 그들의 새로운 임지로 떠나야 했다. 그렇게 되면 언제 다시 지금처럼 다 모여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어떤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오랜만에 한 번 겨루어보지 않겠나?"
"오. 냐아 좋지만, 괜찮겠나? 저번처럼 또 혼자 울상이 되면 꼴불견인데 말이야."
"울상? 내가? 자네 설마 벌써 취한 겐가?"
더 이상 제레이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군터는 연회장에서 그가 원하는 이들과 어울렸다. 어쩌면 친우라고도 할 수 있을 이들. 그들은 서로의 위치와 입장에 대한 것은 접어두고, 순수하게 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호승심을 불태웠고, 그렇게 한바탕 어울린 후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을 느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만나면 즐거운 것이 전부. 그렇기에 그들은 무수한 이들이 모인 이 연회장에서도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 수 있었다. 남들이 그들을 어찌 바라보는지는 일절 신경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거 아군의 젊고 유능한 장군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계셨구려."
그들 세 명이 모인 자리에 한 사내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를 본 빌리치 아조프가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그대의 형님께서는 그대가 우리와 말을 섞는 것을 그리 좋아하시지 않을 거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뭐 어떻소. 조금 혼나면 그만이지."
조금은 날이 서 있는 말에도 사이주 제레이스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비스칼 구르얏트가 혀를 차며 웃었다.
"허! 어쩌다 보니 이 자리에 가문에서 내놓은 문제아들이 죄 모였구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려. 그러나 문제아라고 하기에는 이제 우리 모두 너무 나이를 먹지 않았소이까?"
제레이스 가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조프 가문과 구르얏트 가문 역시 명문 가였다. 그런 만큼 그들은 일찍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교류도 있었던 듯했다. 물론 교류라고 해도 형식적인 것이었을 테지만.
"공도 알겠지만, 우리는 제레이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소. 여기 이 친구도 마찬가지일 테고."
비스칼 구르얏트가 군터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사이주 제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허나 여러분들도 모두 이름 뒤에 붙은 성은 내려놓고 어울리는 것이 아니오? 나 역시 그러고 싶을 뿐이니, 제레이스라는 이름은 내 앞에서 거론할 필요가 없소.
"그렇다면야…더 툴툴대는 것도 사내로서 못할 짓이지."
그리 말하며 비스칼 구르얏트는 빌리치 아조프에게 눈길을 주었다. 빌리치 아조프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스칼 구르얏트는 이번엔 군터에게 눈을 돌렸다.
"사이주 공은 내 은인과 같은 분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존중할만한 호인이지. 나 역시 자네들과 마찬가지로 제레이스 가문에 딱히 좋은 감정은 없지만, 사이주 공에 대해서는 좋은 마음뿐이네."
"그렇다면 결정이군."
비스칼 구르얏트가 자신이 들고 있던 잔을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건넸다.
"우선은 한 잔 쭉 들이키시오. 완전히 따라오지는 못하더라도 보조는 맞춰야 할 게 아닌가."
"흐음. 앞서갈지도 모르오. 내가 비록 그대들처럼 몸이 강하지는 않지만, 술만큼은 어디 가서 약한 소리 한 적이 없소이다."
싱긋 웃은 사이주 제레이스가 단번에 잔을 비웠다. 비스칼 구르얏트가 오! 하고 탄성을 질렀고, 빌리치 아조프도 피식 웃었다.
그날 밤. 군터와 그들 셋은 따로 자리를 가지고 회포를 풀었다. 연무장에서 서로 겨루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기도 하는 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 자리는 새벽 새가 울기 시작할 즈음에야 끝이 났다. 자리가 파할 무렵 즈음에는 빌리치 아조프가 먼저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농담을 걸 만큼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다 모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누구든지 간간이 기회가 되면 보도록 하세."
"나야 테리브란에 박혀 있다시피 할 테니, 자네들 중에 누구라도 테리브란에 오게 되면 내 찾아가겠네."
"하하! 어쨌거나 즐거웠네."
"그래. 승부를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말이야."
저번에도 그랬듯, 비스칼 구르얏트와 빌리치 아조프는 서로 승부를 내지 못했다. 사실 그들과 같은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더 강해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당사자인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군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봐주는 것 같던데,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겠지?"
"나 역시 느꼈네. 거기서 더 강해지다니.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군터는 그들과 종종 만나 몸을 풀고 있었다. 원체 타고난 무인들이다 보니 입보다는 몸으로 하는 대화를 더 선호하는 탓이다. 그런 만큼 그들 역시 군터에 대해서는 이제 슬슬 머리로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 가론드의 목을 베었다더니, 이제는 정말 손도 닿기 힘들 정도로 높이 올라간 것 같군."
군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차마 그들에게 '나는 자네들과 다르다'라거나 '난 사실 완전한 인간이 아닐세' 같은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다른 이들과 무공을 겨루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 건가.'
문득,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이 들었다.
*
군터는 그의 수하들과, 황자가 붙여준 수행 병력 200을 이끌고 테리브란을 떠났다.
"예전 생각이 나는군."
"예전 언제 말씀이십니까?"
할렌의 말을 토어릭이 받았다.
"코누다이안을 탈출해서 테리브란으로 향했을 때 말이다. 그때도 파헨델을 들르지 않았더냐."
"정확히 말하면 들렸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간 것에 가까웠지요. 그때는 도망자 신세가 아니었습니까"
"그게 그거지. 하여간 네 녀석은 점점 혓바닥 굴리는 것만 느는 것 같다."
"에헤이.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십니까. 그나저나, 두 아드님은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꽤나 실망한 것 같은 얼굴들이던데요."
아마도 근사한 갑옷을 입고, 멋진 말을 탄 채로 선두 즈음에 섞이길 원했을 터인 두 청년들은 지금 죽을상을 하고서 후미에 섞여 있었다. 그야말로 말단 병졸 신세가 된 것이다.
"흥! 공 하나 세운 적 없는 놈들이 따로 대접이라도 받길 바랐던 건가. 꿈도 야무지군."
아들들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건 말건, 아비인 할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어댔다.
"병사들이야 할렌님의 그런 엄격함과 공정함을 칭송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부인께서 이걸 알게 되시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군중의 일이다. 안 사람이 뭐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말은 그리 했지만 뭔가 켕기기는 하는지 할렌의 목소리가 조금 힘을 잃었다. 그에 토어릭은 혀를 끌끌 찼다.
'제 성질에 못 이겨서……. 그렇다고 해도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저지르면 어쩌누.'
할렌의 두 아들이 조금 과하게 기고만장하기는 했다. 토어릭조차도 한 번 버릇을 고쳐주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할렌의 말처럼 제대로 공 한 번 세운 적 없는, 아니 군문에 종사해 본 경험조차도 없는 애송이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 꼴은 누구라도 혀를 찰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할렌이 직접 나서서 두 아들에게 면박을 주고 병졸로서 복무케 한 것은 다른 이들이 나설 것을 우려한 것일 수도 있다. 남들에게 한 소리를 듣는 것과 아비에게 한 소리를 듣는 것은 모양새가 많이 다르니까 말이다.
'씨가 어떻든 상관 없어. 자식 농사라는 것은 결국 짓기 마련이란 말이지.'
토어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리의 허리쯤 되는 위치. 커다란 말에 타 있는 큰 덩치의 사내. 몸집은 거한에 가까우나 얼굴은 앳된 청년이다.
'우리 공자님께서는 어떠시려나.'
듣자 하니 할렌의 두 싹수 노란 아들들과 어울린다던데, 그렇다면 그 역시 저 둘과 비슷할까? 그렇다면 조금 피곤해질지도 모른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어차피 최소한 넉 달은 보게 될 터. 적어도 겉모습은 부친을 쏙 빼 닮은 소공자가 어떤 인물일지는 알기 싫어도 저절로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