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58화 (458/1,064)

458화

"아버지!"

보리스가 반쯤 뛰듯이 들어왔다. 니클라스가 그 뒤를 따랐는데, 보아하니 제지하려다가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는 군터를 보고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보리스는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것을 감추려는 마음도 없어 보였다.

"우슈무르 가문의 차남을 데려가신다 들었습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느냐."

자밀 우슈무르를 만나고 온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벌써 보리스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딱히 숨기려고 한 적은 없었고, 입 단속을 시킨 적도 없었지만 보리스의 귀가 꽤나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가 제 또래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파헨델에 가고 싶습니다."

군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다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더냐?"

"저는 더 이상 철부지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널더러 철부지 어린 아이라 한 적 없다. 네 눈에는 가족들을 지키는 일이 하찮아 보이더냐?"

"이 테리브란에서 누가 우리 가족들을 해친단 말입니까?"

"누구라도 가능하지. 위글로우에서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느냐."

"하지……."

"내 이미 결정을 내렸다!"

군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갈무리하던 기세가 사납게 넘실거렸다. 그 기세를 정면에서 맞닥뜨린 보리스가 삽시간에 창백하게 변해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보다 못한 니클라스가 앞으로 나섰다.

"장군. 공자는 그저 장군을 따라 군문의 일을 보고픈 의욕이 앞섰을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 고정하십시오."

니클라스가 슬쩍 보리스의 앞을 가로막자 군터의 사나운 시선이 이번에는 그에게 향했다.

"내가 너를 이 녀석에게 붙인 것은 이 녀석이 네 그 신중함을 닮길 바랐기 때문이지, 오냐오냐 하는 보모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다."

군터의 싸늘한 말에 니클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나름대로 보리스를 옹호한다고 나선 그였지만 군터의 노기를 가라앉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송구합니다."

"물러가라. 테리브란을 떠나기 전까지 이 녀석의 얼굴은 보지 않겠다."

그렇게 보리스를 돌려보낸 후. 군터는 다시 자리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가 아들에게 제대로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다 싶어 화를 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망설임과 걱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도 보리스를 불러 달리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장군."

살라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지켜보고 있었던 그였다.

"어린 사내의 치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공자의 나이 때에 피가 뜨겁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못했다 말하는 것이냐?"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공자는 자밀 우슈무르의 일을 듣고 억누르고 있던 불만이 터진 것일 겁니다. 아마도 또래에 대한 경쟁심 같은 것이 작용한 것이겠지요. 그는 되는데 왜 자신은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었을 테고 말입니다."

"파헨델에 가는 것보다 이곳에 남아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 더 중한 일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한둘이겠습니까. 하물며 한창 피가 끓는 젊은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후우……."

살라스의 말을 듣고 난 군터는 대꾸하지 못하고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백 명의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았다. 창칼이 아닌 말과 마음으로써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항상 어렵지만,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식이다 보니 더 골치가 아팠다.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냥 윽박지른다고 될 일도 아니고, 무시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공명심인가."

군터가 작게 중얼거리자 살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공명심보다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식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난 단 한 번도 녀석을 인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인정은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자식도 없는 녀석이 잘도 지껄이는구나."

군터가 가볍게 쏘아붙이자 살라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허나 소관이 아비가 되었던 경험은 있어도 자식이었던 경험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건 네 경험에 비춘 이야기더냐?"

"예. 비단 소관뿐 아니라, 아마 대다수의 자식들이 겪게 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다수라. 그렇다면 아마 군터 자신은 그 대다수에 끼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아비를 가져본 경험이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힘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

"보리스."

"좀 쉬고 싶습니다 어머니."

벨리사는 힘 빠진 얼굴을 한 아들이 휙 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송구합니다 부인. 제 아들 녀석들이 가볍게 입을 놀린 탓에……."

"아니야. 그게 어찌 아이들의 잘못이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시의 두 아들이 옆에서 어느 정도는 바람을 집어넣었으리라는 것을 벨리사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래 봐야 변하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이와 이야기가 잘 안 된 모양이야.'

보리스도 고집이 세지만, 그런 기질은 그의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한 번 결정한 것을 바꾸는 일이 드물었다. 아마도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후우."

상심한 아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벨리사는 결국 루시를 돌려보내고 아들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 갔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도 다 알고 계시겠지요."

"대충은 들어 알고 있다."

보리스는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한숨 섞인 목소리에 그간 쌓아두었던 서운함이 섞여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제가 10살배기 어린 아이로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무얼 하려 해도 절대 허락해주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있겠니. 이렇게 건장한 청년을 보고 어린아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어째서 제게도 생각이 있다는 걸 헤아려주시지 않을까요. 저도 이제는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 나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제게 기회를 허락해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좋은 말로 아들을 달래보려던 벨리사는 아들의 그 한 마디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이 아이의 말이 틀리지 않지.'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렇게 자랐단 말인가. 여느 건장한 사내들보다도 더 크게 자란 그녀의 아들은 누가 보더라도 한 사람의 당당한 사내였다. 제 앞가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그것을 알아차리니 문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보자기에 싸여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그 갓난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났다. 우렁차게 울어대며 그녀의 품을 갈구하던 아이가 말이다.

"어머니."

"…응?"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말씀 드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주시잖습니까."

"……."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상심한 아들을 달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저렇게 간절한 눈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들에게, 어찌 안 된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 알겠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벨리사의 마지못한 한 마디에 보리스가 언제 울적해 했냐는 듯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그리고 그날 밤.

벨리사는 조심스럽게 군터에게 다가갔다.

"오늘 있었던 일.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들었어요."

"…설마 보리스 녀석이 당신에게 하소연이라도 했소?"

"아뇨. 하지만 내 아들이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시무룩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어미라도 관심을 가지게 될 거에요."

"음."

"보리스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어딜 가더라도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성인이죠. 언제까지 그 아이의 모든 걸 당신의 뜻대로 다룰 수는 없어요."

군터의 언성이 슬쩍 올라갔다. 거기에는 노기 외에 답답함도 배어 있었다.

"내 뜻대로 다룬 게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그렇게 생각했었죠. 하지만 오늘 보리스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알았어요."

"뭘 말이오."

"가족은 서로를 지켜줘야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짐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걸요."

"그게 무슨 말이오. 짐이라니?"

"예전에는 내 품을 필요로 했던 아이가, 이제는 내 품을 답답해한다는 것을 알았죠. 내 품에만 안고 있기에는, 가둬두기에는 아이가 너무 커버렸다는 걸 몰랐던 거에요."

"……."

"당신에게는 믿을만한 수하들이 많이 있지 않나요? 이곳에 남아 우리 가족을 지키는 일은 보리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지금 보리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에요."

군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어쩌면 당신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군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살짝 굳어 있던 벨리사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렸다. 이렇게 직접 군터의 뜻에 반해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도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보리스 녀석과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그러세요."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군터가 이마를 짚으며 침상에 누웠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리사는 문득 침상 옆에 있던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 속에는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가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름. 윤기를 잃어가는 머리카락 등.

"……."

그 여인에게 눈길을 주던 벨리사가 다시 군터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험상궂고, 사나움과 차가움이 느껴지는 얼굴.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따뜻해 보이는 그 얼굴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예전 처음 만났던 그때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마치 세월이 그를 빗겨간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