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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57화 (457/1,064)

457화

"경하 드립니다."

"경하 드립니다!"

군터의 자택으로 그의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장교들부터 병졸들에 이르기까지, 베이고르에서부터 그를 따랐던 모든 수하들이 한 데 모여 그의 영전(榮轉), 아니 임관을 축하했다. 군터는 그들 모두의 잔을 일일이 채워주었다.

한때 천 명에 달했던 그의 병사들은 이제 백 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토록 싸우고 죽어가면서 지금까지 그의 곁에 남은 이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역전의 용사들이며, 충성스러운 수하들이었다.

"드디어 장군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수하들의 말에 군터는 작게 웃었다.

"서광이라."

수하들이 이렇게 들뜨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이 거대한 제국에는 무수한 무관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위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들은 그야말로 한 줌도 되지 않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비록 황도에서 황제로부터 직접 서임을 받은 것은 아니라 하나, 그렇다 해도 군터는 적포를 수여 받았다. 적어도 7황자의 진영 내에서는 위장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허나 자리의 높고 낮음과 상관 없이, 군터는 꽤나 덤덤한 편이었다. 물론 그도 황자로부터 적포를 하사 받을 때는 들뜨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런 감정도 곧 가라앉았다. 특별히 마음을 다잡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너무들 들뜨지는 마라. 높이 오르는 것보다 다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때 그는 한 세력에서 2인자의 자리까지 올랐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지금과 비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까지 올랐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어떠했는가.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었다.

기쁜 자리에서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가 싶을 수도 있지만, 군터는 그 점을 짚고 싶었다. 이것은 들떠있는 수하들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총명하십니다. 빠르게 달릴 때일수록 발 밑을 살펴야 하는 법이지요."

분위기가 무거워지려던 차에 야스메티가 군터의 말을 거들었다.

"장군께서 영전하셨다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앞으로 쉽지 않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뭐가 되었든, 장군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소관이 깔끔하게 치워버리겠습니다."

할렌은 치워버리겠다고 말을 했지만, 기세 등등한 얼굴을 보아하니 여차하면 베어버릴 기세였다. 단순하고 과격하지만 그것이 할렌다웠기에 군터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야스메티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할렌을 보며 웃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아주 믿음직스럽습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적이라면 할렌님께서 그리 해주시시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은 적이 아닐 겁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장군께서 부임하시게 될 임지는 파헨델입니다. 그곳은 일찍이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이 주둔하시던 곳이지요."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 장군과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은 그 치열했던 전장에서 진심 어린 교분을 쌓지 않았나."

어쩌면 진심 어린 교분이라는 말도 부족할 것이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의 뒤를 이어 군대를 지휘할 인물로 군터를 지목했었다. 오래 전부터 그를 따른 수하 무관들이 아니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군터를 선택한 것이다. 진정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군터가 세레온 우슈무르의 적포를 이어받아 파헨델로 부임하게 된 것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할렌이 그리 생각했고,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도 그리 생각했다.

"그것이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이 우리 장군님을 신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파헨델의 군심은 그것과는 별개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니, 아마 그럴 확률이 높으리라 봅니다."

"어째서?"

"파한델의 군대는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의 사병집단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특히 그곳의 지휘관들은 거의 모두가 중도파 무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은 그들의 대표였을 뿐, 주인은 아니었기에 그들의 태도는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과 다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세레온 우슈무르는 죽고 없다. 죽은 자의 마음이 어떻든 누가 알아주겠는가.

"다만 긍정적인 것은 장군께서 제레이스 가문과 거리를 두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과, 황자 전하께서 장군에 대한 우슈무르 가문의 지지를 이끌어내셨다는 점입니다."

거래였다. 우슈무르 가문에게 어느 정도의 대우를 해주는 대가로 군터에 대한 그들 가문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아내는, 군터를 위한 황자의 배려였다.

"장군. 인선은 정하셨습니까?"

논공행상이 끝난 다음에는 열흘 동안 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임지로의 부임은 그 후가 될 것이니, 그 전까지 파헨델로 갈 인원과 테리브란에 남겨둘 인원을 정해야 했다. 그의 가족들이 테리브란에 남아야 하니 그들을 수행할 인원을 남겨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테리브란과의 끈을 남겨둬야 하니 얼마의 인원은 남아있을 필요가 있다.

"아직 생각 중이다."

생각 중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테리브란에 남아있어야 할 이들 몇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야스메티와 같은 이들 말이다. 눈치가 있고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이 이곳에 남아야 그의 눈과 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리라.

"장군. 소인이 자그마한 조언 한 가지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에게 아들이 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몰랐다."

세레온 우슈무르와 교분을 쌓은 것은 전장에서였다. 한가로이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아들이 둘인지 딸이 둘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듣자 하니 장남은 모친을 닮아 젊은 나이에도 건강이 좋지 않다더군요. 몸 쓰는 일에도 소질이 없어, 칼 대신 책을 들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차남은 부친을 닮아 어린 나이지만 벌써부터 갑옷을 입고 군문에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헌데?"

"그 차남이 지금 테리브란 교외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적포 장군의 아들이니 어느 정도는 빠른 길을 밟을 법도 한데, 부친의 엄명 때문에 밑바닥부터 군 생활을 시작한 모양이더군요."

세레온 우슈무르의 강직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자기 자식에게조차 그리 공정하고 엄격하니 휘하 장졸들이 그를 굳게 믿고 따를 수 있었으리라.

"음. 그래서?"

"황자 전하께서는 우슈무르 가문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그들과 약조를 하셨을 겁니다. 그들이 다시금 일어나는데 도움을 주시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다시 일어선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이겠습니까?"

"……."

"작고한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의 뒤를 이어 군부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현재 우슈무르 가문에서 그 적임자는 딱 한 사람뿐입니다. 하급 장교로 복무하고 있는 차남 말입니다."

"돌리지 말고 분명하게 말하라. 그래서 뭘 어찌 하자는 말인가."

야스메티가 눈을 빛냈다.

"황자 전하를 찾아 뵈어 말씀 드리십시오. 그 어린 무관을 휘하로 내어달라고 말입니다. 장군께서 우슈무르 가문의 후계자를 곁에 두고 쓰시는 겁니다. 그리 되면 두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황자 전하께서 우슈무르 가문과 한 약조를 장군께서 대신 이뤄주시는 셈이니, 우슈무르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표면적인 것이 아닌, 진실로 깊은 관계를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파헨델에 장군의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지세력이라."

"파헨델의 무관들이 각자 그 색이 다르다지만, 그들 중에는 분명히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만을 따르던 수하들이 있을 겁니다. 장군께서 우슈무르 가문의 진실된 협조를 얻고, 나아가 그 후계자까지 휘하에 두고 계신다면 그들의 마음을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어린 무관 하나를 끌어들임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크다면 그리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따지고 보면 난 그에게 빚을 지지 않았던가.'

군터는 개인적으로 세레온 우슈무르라는 사내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세레온 우슈무르는 당시 정식 관직도 없었던 그를 후임으로 지목했었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그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의 빚이라면 빚인 셈이다. 그의 아들 하나 맡아서 키워주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좋다. 그리하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 만나보겠다.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지?"

*

밤새 초소를 지킨 그와 그의 병사들은 굳은 몸을 풀며 절로 튀어나오려 하는 하품을 도로 삼켰다.

"어우. 죽겠습니다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 놈의 엄살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는군."

"대장님은 젊으셔서 그런 겁니다. 서른만 넘어보십쇼. 밤바람을 맞을 때마다 칼날에 베이는 것처럼 아주 몸이 시큰시큰 하다니깝쇼."

"칼날에 베인 적은 있나?"

"어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래 봬도 소싯적에는 말입니다……."

얼굴만 보면 사십 줄도 훌쩍 넘긴 것 같은 나이 많은 병사와 그의 반도 채 살지 않았을 것 같은 젊은 장교가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 받았다. 다만 그렇게 격의 없는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병사들은 상관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어이 자밀! 수고가 많군."

"별 말씀을."

잠시 후. 얼굴은 앳되지만 체구만큼은 당당한 젊은 장교는 가까이 다가온 교대 조의 십부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조금 늦었나?"

"아닙니다. 딱 맞게 오셨습니다."

"그래. 밤새 수고했네. 그런데 자네 말이야. 지금 곧바로 지휘초소에 가봐야 할 것 같네."

"예?"

"높으신 분께서 자네를 찾아오실 모양이야. 어쩌면 이미 와 계실 수도 있어."

"…그렇습니까?"

자밀이라 불린 젊은 장교는 곧바로 지휘초소로 향했다. 다섯 개 십인 대가 상시 주둔하는 자그마한 초소는 평소와 달리 적막함에 감싸여 있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멀리서부터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낯선 병사들이 초소 밖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에게 신분을 밝혔다.

"십부장 자밀이오. 부름을 받고 왔소만."

"그대가 자밀?"

병사인지 장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험상궂은 사내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꽤나 불쾌했지만 자밀은 꾹 참았다. 상대의 신분도 모르는 상태에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안에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높으신 분'도 계실 테니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이제는 아버지도 안 계시니까.'

이전에도 딱히 부친을 의지한 적은 없었지만, 그나마 믿을 구석조차 없어진 마당이니 전보다 더 행실을 조심해야 했다.

"들어가시오."

병사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자밀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군례를 취하며 신분을 밝히려 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순간, 목이 조여오는 것 같은 느낌에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자밀 우슈무르?"

"…그, 그렇습니다."

거대한 산이 몸을 일으키는 듯했다. 남다른 체구보다도, 그가 발하는 기세가 산과 같이 웅장하고 거대했기 때문이다.

"군터라고 한다. 자네의 선친과는 한 전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싸웠었지."

군터는 보리스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정신이 살짝 빠져나간 것 같은 젊은 장교를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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