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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56화 (456/1,064)

456화

거무튀튀한 창이었다. 멋을 부린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전체적인 길이와 창 날이 조금 더 긴.

그가 예전에 사용했던 칸젤과 비슷했다. 외형도 외형이지만 창 한 자루에서 풍기는 불길함과 음산함이 특히.

열 사람이 이 창을 본다면 아홉은 귀물이라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 말할 테지.

"마음에 드나?"

혹시 하는 짐작은 황자의 물음으로 굳어졌다. 이 창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군터는 서늘한 창대를 쓸어 만졌다.

"범상한 물건은 아닌 듯합니다만."

"요철이라는 것을 아나?"

"처음 듣습니다."

"요수(妖獸), 요마(妖魔). 그 밖에도 부르는 말들이 여럿 있지만 모두 같은 말이지. 아무튼 요철이란 그런 괴물의 뼈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탄성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뛰어나. 여기까지만 해도 귀물이지만, 이 요철이라는 놈의 진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황자의 말에 따르면 요마라는 것은 괴물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마물이었다. 적대하는 대상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리며, 오랜 세월 수행한 술사들이 간신히 낼 법한 힘을 자연스럽게 휘두르는.

"그런 놈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기질이 이 요철에 깃들어 있다. 각인이라든지, 각종 술수를 부리기에 용이하지. 때문에 법보나 법구의 재료로는 이 요철을 최상으로 친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지만, 그에 걸맞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국이 한창 팽창하던 시기에 요마란 요마는 모조리 싹을 뽑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의 영내에 아직도 요마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한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할 터였다. 적어도 사람에게 발견된 요마는 황실의 토벌대가 즉각 출동하여 박멸해왔다. 지난 수백 년 간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자연스레 제국에서 요철을 구하기란 지난한 일이 되고 말았다. 구하려면 제국 밖에서 들여와야 하는데, 요철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반출 불가의 보물 취급을 받는지라 밖에서 구해오기도 어려웠다.

"이런 물건을 소관이 받아도 되겠습니까."

요철이 어떤 물건인지를 듣고 나니 군터는 창을 받기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물론 창이야 마음에 들었지만 이런 귀물을 대가 없이 그냥 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은 그가 열 살도 되기 전부터 깨쳤던 이치였다.

"본래 황제가 위계를 내릴 때는 그에 걸맞은 포(布)에 하사품을 함께 수여하는 것이 관례였다. 비록 아직 내가 황제는 아니라지만, 관례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지."

"……?"

"모르는 체를 하는 것이냐? 세레온 우슈무르가 죽고 이제껏 그의 자리가 비었다. 너도 짐작이든 기대든 하고 있었을 것이 아니더냐."

정곡을 찔렸다. 짐작도 기대도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짐작했고 기대했던 것이라도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닥치게 되면 태연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위장이라.'

사위장(四位將) 중 말단이라 하나, 그렇다 해도 위장은 위장이다. 한때나마 제국군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던 군터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군터는 습관적으로 담담해지려다가 황자의 말을 떠올리고 감정을 삼키지 않았다. 조금은 들뜨고, 조금은 아련해지는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다.

그를 본 황자는 픽 웃으며 말했다.

"기뻐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무엇입니까."

"네 임지는 파헨델이다."

"파헨델이라면……."

"알고 있겠지. 가본 적도 있을 테고."

베이고르에 몸 담고 있던 시절에 사절단에 포함되어 가본 적이 있었다. 가봤다기보다는 잠시 들렀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아무튼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었다. 북방의 요충지이며, 세레온 우슈무르의 임지였다는 것 역시도.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은 없다."

"……?"

"네가 그곳에 가서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난 적어도 몇 년 간은 바크렌을 점거한 반군들을 상대로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

"허면."

"짐작하는 것이 맞을 거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파헨델에 머물며 시간을 죽여야 할 것이야. 적포를 두르는 대가라고 생각해라."

"……."

군터도 7황자의 세력 구도와 정치 파벌들, 그리고 최근의 동향이나 분위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코누다이안에서 한 차례 실수를 범했던 야스메티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연일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덕분이었다.

'거래라.'

야스메티는 군터가 세레온 우슈무르의 빈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반반이라 보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세레온 우슈무르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된다면 그것은 황자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여러 세력들의 거래로 인한 결과물일 것이라 확언했었다. 그것을 떠올려보면, 지금 황자가 말하고 있는 파헨델이라느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죽여야 할 것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그 '거래'의 내용일 터였다.

"조만간이다. 외조부의 장례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논공행상이 시작될 것이다."

군터는 말없이 검은 창을 쥐었다.

"휘하들은 얼마든지 데리고 가도 좋다. 아마 그곳의 장교들이나 병사들이 너를 그리 반가이 맞아주지는 않을 테니까. 허나 네 처와 자식들은 이곳에 남겨야 한다."

말하자면 볼모이나, 이 정도는 괜찮았다. 흔한 일이었으니까.

군터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언제까지 밥만 축내야 합니까."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다."

"바로 조금 전에 소관에게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나는 그리 말했다."

"헌데 어찌하여."

"나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네 뜻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 난 네게 그곳에서 밥만 축내라 명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하지. 하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만들고 세우기 나름이다."

말장난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했던 말을 끝으로 군터는 궁을 나섰다. 자택으로 돌아가는 그의 손에는 두꺼운 비단에 둘둘 싸인 기다란 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

카니에 제레이스의 장례가 열렸다.

성대하지만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7황자 진영 내의 모든 권력자들이 자리했다. 그런 이들이 수십, 수백이 넘어가는지라 널찍하게 마련한 궁 앞의 공간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원신의 발 아래 나고 자란 삶이 지금 그분의 머리맡으로 돌아가니……."

시신을 가린 꽃과 나무더미 앞에서 황자가 천천히 추도사를 읊었다. 본래는 신관이 할 일을 다른 이가 대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자는 예외였다. 지금은 승하한, 생전의 황제가 원신의 사도로서 교황의 권위를 지녔던 만큼 그의 피를 이은 황자 역시 대주교에 버금가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엄숙하고 장엄한 광경이었으나 군터는 그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신을 혐오하는 황자가 수백, 수천 명의 앞에서 신을 운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만물의 아버지를 만나 뵈어……."

사기를 다루는 군터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저 꽃과 나무 너머에 있을 온기 잃은 시신에 영혼 따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약물을 들이 부어 부패를 늦춘, 냄새 나는 고기덩어리뿐.

화르륵!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들고 있던 횃불을 기름에 젖은 꽃과 나무에 가져다 대니 한 순간에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활활 타는 불이 태워야 할 것을 모두 태울 때까지, 황자를 비롯한 장내의 인사들은 붉은 불꽃과 검은 연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장례가 끝나고 이틀 뒤. 모두가 기다렸던 논공행상이 시작됐다.

사실 꽤나 늦은 편이었다. 본래대로였다면 보다 일찍 이루어졌겠으나, 카니에 제레이스의 죽음이라는 예상 밖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춰진 것이었다.

아직 잔당이라 할 만한 적들과 병합하지 못한 땅들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진 지 오래였고, 포상에 목마른 신하들은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논공행상은 닷새가 넘게 이어졌다. 군터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황자의 총애를 받니 뭐니 해도 관직도 없는 일개 객장 신분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논공행상이 나흘 째 진행되던 날. 군터는 그를 찾는 근위대 병사들과 함께 논공행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끼이이-쿵!

금빛의 거대한 문이 좌우로 열렸다. 몇 번이고 들었고, 단 한 번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그 소리가 지금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문이 열리고 몇 발 자국 안 간 곳부터 좌우로 신료들이 늘어서 있었다. 문이 열린 그 순간부터 그들 모두의 시선은 군터에게 쏠려 있었다.

"……."

군터는 그들 사이를 걸었다. 아니, 멀리서 익숙한 자세로 앉아 그를 응시하는 황자를 보며 걸었다.

카자쿠가 가로막고 선 곳까지 걸어간 군터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황자가 주변을 좌우로 훑어보며 입을 떼었다.

"내 비록 제국의 수백 년 역사를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긴 역사를 다 뒤진다 해도 손에 꼽을 만큼 파격적인 출세일 것이다. 관직 없는 객장이 단번에 위장에 오르다니."

황자가 소리 내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뭐 어떤가. 공에 따른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대공을 세운 공신에게는 그에 걸맞은 큰 포상이 있어야 할 터이다. 더군다나 우슈무르 가문의 뜻 또한 있었으니, 나는 그들의 뜻 또한 존중하고자 한다."

내관 두 명이 나란히 서서 기다란 상자를 들고 왔다. 화려하게 치장이 된 상자만 보아도 그 안에 든 것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카자쿠의 앞까지 다가온 내관들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적색 전포(戰袍)가 곱게 개어져 들어 있었다.

"군터. 자네는 이전에도 나를 위해, 나의 깃발 아래서 싸웠지. 허니 쓸모 없이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황자가 옥좌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와 상자 안의 적포를 쥐었다.

"지금. 자네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있지. 앞으로도 흔들림 없는 충성을 기대해도 되겠나?"

"예."

"좋아. 그렇다면 이 붉은 전포는 이제부터 자네의 것이다."

황자가 직접 다가와 몸을 낮추고 적포를 둘러주었다.

그 순간, 군터는 이 깃털처럼 가벼운 전포가 쇳덩이보다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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