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그 말을 하는 황자의 기색이 어두워, 군터는 더 묻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것으로 보아 더 묻는다고 한들 답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전에도 말했었지만, 술사의 활용은 전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 그렇기에 전투를 치르기 전에 아군과 적군에 존재하는 술사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아군에 있는 술사들과 적군에 있는 술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파악해야만 전술을 펼침에 있어 실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황자가 술사들에 대해 중요하다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 짤막하게 훑고 지나가는 식이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나오니 군터는 그가 품고 있었던 의문을 이야기했다.
"이제껏 소관이 봐온 술사들은 그리 대단치 못한 자들뿐이었습니다만."
실제로 군터는 지금까지 여러 술사들을 봐 왔었다. 전장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몇 번이고 경험했다. 그런 그의 감상은, 술사라고 하는 자들이 신비로운 것만큼 대단치는 않다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그가 술사들이 쓸만하다 여겼던 것은 일전에 셀마 성에서 룬차이 군에 맞서 싸웠을 때였다. 그들은 이따금씩 성벽이 뚫릴 것 같을 때 등장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그 구멍을 메우곤 했었다. 불의 벽을 만든다거나, 성벽을 무너뜨려 적들을 추락시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대접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고려해보면 그런 활약들조차도 그리 대단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했던 일은 병사들을 투입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술사라고 하는 자들은 전술 그 자체다. 큰 효용성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한 제약도 있지."
상승(常勝)의 전술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최선의 전술은 시기와 장소,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술사들의 활용 역시 그러하다. 땅의 힘을 사용하는 술사들을 데리고 강가에서 싸운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제약될 수밖에 없다.
"세력이 엇비슷한 양측의 군대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황자는 과거에 있었던 사례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한쪽에서 강을 건너려 하면 다른 쪽에서 화살 비를 퍼부어댔기에 강을 건너 적을 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강을 우회하자니 그 사이에 적이 도하를 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지."
황자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당시 전장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군터 역시 그런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적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묶었었다.
"닷새가 넘도록 지지부진한 대치가 이어졌지.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닷새가 지났다. 어찌 되었을 것 같나?"
"……."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닷새 동안이나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있지 않은가. 거기서 닷새가 더 흐른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하지만 그런 뻔한 답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황자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물었겠는가.
군터가 생각에 잠겨 답을 망설이자 황자는 혀를 찼다.
"신중한 건 좋은데 눈치가 없군. 전투는 끝이 났다. 한 쪽은 승리했고, 한 쪽은 패하여 군대가 갈기갈기 찢겨졌지.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짐작이 가느냐?"
"술사들의 힘이 빛을 발했겠지요."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운 밤에 강의 상류로 은밀히 술사들을 보내어 물줄기를 막았다. 그리하여 강의 수심이 얕아졌을 때 곧바로 도하해서 적을 급습했지. 이 모든 것이 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대응하고 말고 할 틈도 없이 말이야."
강의 물줄기를 막는 것. 이 역시 병사들을 부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차이는 그 은밀함과 신속함에 있다. 훨씬 적은 인원으로, 훨씬 빠르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 전장에서 그 차이는 절대적이다.
"술사들이 전장에 제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해 보아라. 술사라고 하는 이들은 병졸 백 명에 맞먹는 고급인력인데 그런 자들이 괜히 전장에 나섰다가 눈 먼 화살에 맞고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큰 손해가 아니겠느냐. 그런 위험이 있는데다가 그것을 감수하고 전장에 투입한다 해도 그리 쓸만한 효율을 낼 수 없었다."
말하자면 술사들의 활용법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전장에 투입하기에는 너무 고급자원이었던 데다, 어떻게든 투입을 한다 해도 딱히 활약을 하지도 못했으니 굳이 술사들을 전장에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술사들은 전장이 아닌 다른 분야에 투입되거나, 법구 같은 것을 만드는 반 장인(匠人) 취급을 받아왔다. 술사들의 활용법에 대한 전술적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많은 지휘관들이 전장에서 술사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서툰 편이다. 아니, 소극적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전투는 창칼을 든 전사들의 것이라는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멍청이들이 이 나라에 넘쳐난다. 그런 면에서는 저 남쪽의 아바시스 놈들이 더 낫지. 적어도 놈들은 변화와 발전에 인색하게 굴지는 않으니까."
냉소를 지은 황자가 군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명심해라. 변화에 발 맞추지 못하고 도태 된다면 어제의 명장도 오늘의 졸장이 될 수 있는 법. 그러니 장수의 사고는 유연하면 유연할수록, 더 넓게 열려있을수록 좋다."
*
"전하. 제레이스 가주가 알현을 청합니다."
"들라 해라."
아직 카니에 제레이스의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으나, 제레이스의 가주 직은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이어 받았다. 카니에 제레이스가 역임하고 있던 총독의 지위는 장례가 끝나는 대로 승계가 될 예정이었지만, 그것도 며칠 뒤의 일이니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제레이스 가주'일 뿐이었다.
"전하."
"어서오시오 외숙. 한창 바쁠 터인데 어인 일이시오."
"긴히 전하께 아뢸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장례의 일이야 아랫것들을 시켜 진행시킨다 하지만, 물밑에서 이뤄지는 여러 논의와 거래로 정신이 없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지, 황자는 잠깐 생각해보았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신임 제레이스 가주가 찾아온 이유는 어차피 뻔했으니까.
"실속 없는 말로 꾸미지 않겠습니다. 소신, 전하께 올릴 청이 있어 왔습니다."
'그렇지.'
마음이 편해졌다. 외척이니 기반이니 해도 결국 본질은 이것이다. 주고 받는 거래. 이 얼마나 진솔하고 담백한가.
"흠. 말해보시오."
"케프룩의 사성(四城)에 대한 인사권을 원합니다."
꾸미는 말 없이 이야기하겠다더니, 정말 단도직입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으니 숨기는 것 또한 없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꽤나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말이 인사권이지, 결국 성 네 개를 달라는 말이지 않은가. 물론 케프룩이 물류와 교통의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제레이스 가문이 보인 성의를 고려한다면 내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외숙과 제레이스 가문이 이번 전쟁에서 보인 충의를 내 알고 있소. 허나 사성을 모두 쥐겠다는 것은 과한 욕심이 아니오? 분명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것인데."
"예. 그렇겠지요. 하여 전하께 청을 올리는 것입니다. 물론 소신과 소신의 가문 역시 최대한 잡음이 나지 않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거기에 전하께서 힘을 실어주신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 물론 외숙을 비롯한 나의 혈족들을 믿고 의지하고 있소만, 그렇다고 해서 편애를 보일 수는 없소. 내가 한 주의 총독이 아니라 제국의 황좌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외숙도 이해해주리라 믿소."
"물론이옵니다. 소신이 어찌 그것을 모르오리까. 소신은 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전하의 지지를 청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허면?"
"전하께서 소신을 지지해주실 명분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사옵니까."
"명분이라."
옥좌에 비스듬하게 기댄 황자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나 그 웃음기는,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담담히 뱉은 한 마디에 흐려졌다.
"소신의 가문에 있는 객장을 전하께서 어찌 쓰시던 개의치 않겠나이다."
"……."
황자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꺾였다.
"무장 하나와 성 네 개를 바꾼다? 외숙의 수완이 범상치 않음은 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싶소만."
"세상에서 가장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흠."
계속해보라는 듯, 황자는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응시했다.
"전하께오서 장차 그 자를 중히 쓰실 계획이심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의 적포를 그에게 물려주실 요량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그때, 소신과 소신의 가문이 지지하겠습니다."
"글쎄. 외숙과 제레이스의 지지가 그때 가서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려. 외숙의 말마따나, 군터는 제레이스의 객장이었소. 그러니 제레이스가 지지를 표명한다고 해봐야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소?"
"전하께오서는 그의 임지로 어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임지?"
"소신의 생각으로는, 파헨델이 제격일 듯 하온데, 어찌 생각하시는지."
"…파헨델?"
심드렁한 기색이었던 황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만큼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한 마디는 그의 예상 범주를 꽤나 벗어나는 것이었다.
파헨델은 북방의 요충지다. 바크렌(베이고르)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무엇보다 세레온 우슈무르의 임지이기도 했던 요새였다.
그러나 2황자와의 전쟁을 끝낸 지금에 와서는 파헨델의 중요성은 상당히 떨어졌다. 2황자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확장하게 되면서 국경도 덩달아 확장이 된 데다, 베이고르가 몇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세가 꺾인 탓에 파헨델은 비교적 한가해졌다. 벌써부터 파헨델의 상주 병력을 줄이자는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런 곳에 군터를 보내자 하고 있다.
"재미있군."
드러난 것만 놓고 보면 이것은 그리 좋은 제안이 못 된다. 기껏 적포까지 내어주고서 할 일 없는 벽지에 처박아놓자는 뜻이니 말이다.
게다가, 파헨델은 세레온 우슈무르의 임지였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군부 중도파의 거두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의 임지였던 파헨델 역시 중도파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군터를 보내자 함은, 어떻게 보아도 그리 현명한 결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거래가 될 수 있다.
"그간 잠잠했던 것은 이것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오?"
"노렸다기보다는,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셈이지요."
공식적으로 군터는 제레이스 가문에 속한 객장이었다. 그러나 황자는 수 차례 독단적으로 군터를 입궁시키며 그를 향한 총애를 보였다. 제레이스 가문은 완전히 배제한 채로 말이다.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당사자인 군터조차도 제레이스 가문과 은근히 거리를 두는 것 같은 행동을 여러 차례 보였다는 점이었다. 말인즉, 제레이스 가문이 꽤나 체면을 구겼다는 것이다.
'나쁘지는 않군.'
제레이스 가문에 케프룩의 사성을 내어주고 군터를 받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거래는 이것이 전부. 허나 머지 않아 군터에게 적포를 내리게 될 때 제레이스 가문이 찬동을 해주며, 동시에 파헨델로의 부임을 건의한다. 이는 적포의 수여를 막을 수는 없지만, 동시에 요직에 앉을 수도 없게 좌천시키겠다는 공격으로 비칠 것이다.
'파헨델이라.'
다만 문제는 임지가 파헨델이라는 것이다. 기껏 쥔 칼을 쓰지도 않을 칼집에 재워버려서는 곤란하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는 베이고르에 빚이 있지요."
"……."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까지 저 반군 놈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실 요량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은근히 부추기는 듯한 목소리에 황자는 슬쩍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