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군터. 오늘도 입궁했었나."
"예."
늦은 밤. 자택으로 돌아가려던 군터는 내궁의 입구에서 카니에 제레이스와 맞닥뜨렸다.
"전하께서 자네를 정말 크게 총애하시는군."승전연 때 그랬던 것처럼 매일 부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도 열흘에 사나흘 정도는 입궁하고 있었다. 테리브란에서 그만큼 자주 황자를 만나는 이는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으니, 군터가 황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군터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공께서는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내궁을 찾으셨는지."
"전하께 긴히 아뢸 일이 있어서 말이네."
"그렇습니까. 허면 소관은 이만."
"음. 자네도 준비하고 있도록 하게."
"……?"
"새벽에서 내일 아침 사이에 가문의 자택으로 찾아올 일이 있을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신지."
"부친께서 고통을 끝내시려는 모양이야."
"……."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제레이스 가문의 가주인 카니에 제레이스가 병환을 얻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일선에서 물러나서 모든 일들을 장자에게 위임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건강이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물러나 힘겹게 삶의 끈을 부여잡고 있던 그가, 마침내 끝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군터는 딱 한 번 보았던 초췌한 얼굴의 노인을 떠올렸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때 보도록 하지."
군터는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말에서 그가 이미 부친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이전에도 몇 번 카니에 제레이스가 위독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아 황자가 직접 행차하기도 했다던가. 결과적으로는 헛걸음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을 말하는 아들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평온했다.
"대단하군요."
궁을 빠져나와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살라스가 말했다. 그 역시 군터와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한 것을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하지 않습니까. 그 비정함이 섬뜩할 정도입니다."
"오래 앓았지 않느냐. 여러 준비를 다 한 것이겠지."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
군터는 답하지 않았고, 살라스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택에 도착한 군터는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던 벨리사에게 오늘은 잠을 자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어째서요?"
"오는 길에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만났소. 그가 말하더군. 내일 새벽에서 즈음에 제레이스 가문의 저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게 무슨."
"와병 중이던 가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아……."
"당신 먼저 자도록 하시오. 아이들은?"
"보리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실비아는 자고 있어요."
"음."
보리스는 할렌의 두 아들과 수행하는 병사 몇 명을 이끌고서 바로 어제 사냥을 나갔다. 군터가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보니 자연히 보리스도 맡게 되는 일이 없어 요즘 들어서는 바깥으로 도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인 만큼 군터는 아들의 외유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소. 어차피 정말로 제레이스 가주에게 일이 생긴다면, 며칠 후에 정식으로 장례가 치러질 테니까. 당신과 아이들은 그때 함께 가면 될 거요."
그렇게 벨리사를 침실로 들여보낸 군터는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지금까지 하루 종일 깨어 있었지만 피로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하루 이틀 쯤 잠을 자지 않는다 해도 피곤하지 않게 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편리한 몸이지.'
이제는 그도 나이가 적지 않다. 중년에 접어드는 이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전장에서 험하게 구른 군인들 같은 경우는 특히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나이를 크게 체감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군터는 오히려 혈기왕성하던 스무 살 때보다 더 생기가 넘쳤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를 거라던 황자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후우."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다. 격렬하게 검을 휘두던 것을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겼다.
"장군."
장군의 지위에서 내려온 지가 꽤 되었음에도 그의 수하들은 여전히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그의 수하들 뿐 아니라 밖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다른 이들도 그를 장군이라 칭했다. 과거에 그랬기 때문인지, 아니면 머지않아 그리 될 것이라 여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레이스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할렌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검을 연무장 바닥에 꽂았다.
"카니에 제레이스가 죽었다는군요."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곧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어차피 얼굴만 비출 테지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가 되도록 빨리 오기를 바랄 터였다. 그렇기에 미리 언질을 준 것이겠고.
"가자."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군터는 벗어두었던 옷 대신 미리 준비해두었던 옷을 입고서 제레이스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
어둠이 진하게 깔린 시각이었음에도 제레이스 저택은 사람으로 붐볐다. 찾아온 이들이 모두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했음에도 그러했다. 그만큼 잠을 내팽개치고서 달려온 이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왔군."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이주 제레이스가 군터를 맞았다. 군터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형님께서는 안에 계시네. 가서 인사드리도록 하게."
"예."
사이주 제레이스는 평소와 다르게 굳은 표정이었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친을 떠나보낸 아들의 얼굴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왔나."
반면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조금 전 내궁 앞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감입니다."
"글쎄. 어차피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지. 요 몇 년간 선친께서는 병마에 시달리셨지. 오늘에야 비로소 그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해방되셨으니, 난 오늘의 일을 그리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
"자리를 마련해두었으니 가보게."
"예."
미리 준비를 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그런데도 군터보다 먼저 온 이들이 꽤 있었다. 군터는 그 중 교분을 나눈 적이 있는 이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 그에게 마련된 자리로 향했다.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살라스가 조용히 말하자 야스메티가 그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제레이스 가문의 주인이 바뀔 테니까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나겠지요."
군터는 병사 몇 명을 제외하면 살라스와 야스메티만을 대동했다. 이런 자리에서 필요한 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레이스 가문은 그간 가주의 병환으로 인해 외부의 일에 다소 소극적이었습니다. 물론 다이시리 공이 가주 대리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고삐가 풀렸으니, 다이시리 공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허면 정쟁이라도 벌일 거라는……"
"작은 다툼이야 지금까지도 있어왔지요. 이제 곧 크게 다툴 일이 생길 겁니다. 이번에 합병한 영토 말입니다. 전쟁에 힘을 쏟은 유력 세력들이 각자 지분을 주장하겠지요. 제레이스 가문도 당연히 나서게 될 것인데, 시기 좋게 그간 그들을 누르던 제약까지 풀려버렸으니……. 아마도 조만간에 크고 사나운 바람이 한바탕 몰아칠 것입니다."
이곳에 온 이들. 그리고 올 이들은 모두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분위기가 살라스의 말처럼 '무거운' 것이겠고.
군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 크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면 듣지도 못할 소리였지만 군터의 귀에는 그것이 또렷하게 들렸다.
"전하."
몸을 일으켰다. 의아해하는 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군터는 들어온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이 늦은 시간에 찾아주시다니, 선친께서도……."
"그런 입에 발린 말은 마시오 외숙."
7황자의 손이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황자는 흔히 보기 힘든 장신인데다, 비슷한 연배임에도 고작해야 스물 중반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황자가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니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들은 황자와 시선이 마주칠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죄다 고개나 허리를 숙였다.
"흠."
황자는 고개를 조아리는 이들을 지나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시야가 다 가릴 정도로 연기가 풀풀 풍기는 곳의 중앙에는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차갑게 식은 채 누워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셔도 될 터인데 이렇게 떠나십니까."
뻗은 손끝이 주름진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만나실 수 있거든, 어머니에게 안부나 전해주십시오."
영원히 잠든 이를 바라보는 황자의 시선은 따스했고, 쓸쓸했다.
*
제레이스 가문의 가주, 카니에 제레이스가 죽었다. 그의 장례는 사흘 뒤로 예정되었으며, 식이 치러질 장소는 황자의 뜻을 따라 궁 바로 앞으로 정해졌다.
제레이스의 가주이자, 황자의 외조부다. 그의 장례 절차로 조정이 시끌시끌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황자와 군터의 대담은 계속 됐다. 제레이스 가문으로 향했던 그 바로 다음 날. 군터는 또 다시 부름을 받고 입궁했다.
"바쁘실 줄 알았습니다만."
"각자에게 주어진 일이 있는 법이다."
한 마디로 일을 하는 것은 아랫것들이라는 뜻이다. 군터는 묘하게 평소보다 가라앉은 것 같은 황자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그러자 황자가 툭 하고 한 마디를 뱉었다.
"감정을 숨기지 마라."
"어인 말씀이신지."
"숨기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잊게 된다. 감정을 잊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도 잊고, 잃기 시작하지. 괴물이 되어가는 거다."
"……."
"나는 슬퍼하며, 쓸쓸해하고 있다. 작고하신 외조부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었거든."
"…전하께서도 의지할 곳이 필요하셨습니까?"
숨기지 말라했기에 군터는 속에서 떠오른 말을 곧바로 입 밖에 냈다.
"그래. 지금도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나는 약했다. 특히 황궁에 머물던 시절에는 더욱."
과거를 회상하는지, 황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 세상 그 어떤 곳보다도 끔찍했던 곳이지.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