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승전연이 한창이던 와중. 주인공인 황자와 주인공은 아니라 해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주목을 받던 군터가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군터가 황자의 부름을 받고 내궁으로 향한 직후부터였다.
황자를 호위하는 근위대나, 내관들을 통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려는 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 자연히 이런저런 소문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무려 사흘 동안 황자와 군터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흘 만에 황자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군터가 그의 자택으로 돌아갔을 때 사흘 동안 의구심을 키웠던 이들이 시체에 날아드는 까마귀들처럼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감히 황자에게 그 동안 무엇을 했느냐 추궁하듯 물을 수 있는 이는 없었으며, 군터 또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금 황자에게 불려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독대였다. 황자는 마치 '이 녀석에게는 내가 용무가 있으니, 귀찮게 굴 생각 마라'는 듯이 군터를 거의 하루 종일 그의 곁에 두었다.
"나와 너를 두고 말들이 많다."
"……."
군터는 나흘 전 사투를 벌였던 대전의 바닥에 앉아 있었다. 황자는 그의 맞은편, 변함없이 번쩍이는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특유의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서.
"어떤 놈들은 내가 여색에 탐닉하는 것조차 질려 사내놈에게 눈을 돌렸다고까지 의심하는 모양이더군."
군터는 혼자 이야기하고 혼자 클클 거리는 황자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기분은 좀 어떤가?"
"별로 좋지는 않소만."
존대는 멀찍이 집어 던져버린 짤막한 말이었으나 군터도, 황자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흘 간 그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 갇혀 있었지. 무엇을 보았나?"
"……."
그 물음에, 군터는 떠올렸다.
아마도 꿈속이었을 터인, 적막한 시체투성이 들판에서 보았던, 불쾌하지만 친숙하게 느껴졌던 괴물을.
"무엇을 보았나? 아마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을 테지?"
그 말에 이제껏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던 군터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반응했다.
"무엇을 아시오?"
"글쎄. 알 만큼은 알지."
피식 웃은 황자가 곧바로 표정을 지웠다. 그는 건조한 눈으로 군터를 응시했다.
"그게 너다. 네가 보았던 그것이 너의 본질이다. 네 스스로 거부하여 밀어낸."
"……."
"뭐, 굳이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당신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느냐."
군터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요 며칠 동안의 일들이 모두 시험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화가 풀리는 것 또한 아니었다.
"넌 네 스스로 네가 아직 인간임을 증명했다."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소만."
시험을 원한 적도 없고, 증명하고자 한 적도 없다. 요 며칠 간의 불쾌하기 짝이 없던 시간들은 모두 강제된 것들이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황자에 의해.
"그렇겠지. 허나 내가 원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오만하군."
"누구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말이다."
"……."
"제국의 황자라는 지위. 무수한 백성들이 내 땅에 살아가고 있고, 내가 명을 내리면 20만이 넘는 대군이 움직인다. 내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들이 수천이며, 온 제국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힘과 확신이 있었다.
"내가 오만하다고 했나? 아니지. 아니야. 그건 당연한 것이다. 수십, 수백만을 움직이는 목소리가 어찌 범부의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느냐. 나의 언행은 분명 고압적이고 거침이 없지. 그러나 그건 오만한 것이 아니다. 고지의 바람이 낮은 곳에 부는 바람보다 찬 거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것일 뿐."
쏘아붙이듯 말한 그가 화살을 군터에게 돌렸다.
"반면에 네 녀석은 어떠하냐. 너는 어찌 내 앞에서 당당하지?"
"무슨 소리요."
"넌 내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그저 기개가 있다거나, 담력이 센 정도로는 불가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일개 망명자 주제에 내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지. 놀라운 일이 아닌가?"
"……."
"비단 내 앞에서만이 아니겠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네 녀석은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마치 그 어떤 것도 너를 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순간 군터는 말문이 막혔다. 황자의 말은 이제껏 그가 이따금씩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그냥 넘겼던,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던 무심함을 정확히 찔렀다.
"놀란 것 같군. 그건 괴물이 되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변화다.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지. 정확히 말하면 인간으로서의, 유한한 생명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초연해진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그렇게 인간을 버리고 나면, 인간으로서 자연히 가졌던 것들도 자연스럽게 잃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감정들. 두려움도 그 중 하나지."
황자가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터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들이 이제껏 군터가 마음 속에 은연중 품어왔던 의문과 불안들을 정확하게 찌르기 때문이었다.
"괴물이 되고 싶으냐?"
"……."
순간, 군터는 어둠 속에서 보았던 환상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끔찍한 괴물을.
"원치 않소."
답은 간결하고 뚜렷했다.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진중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항시 경계해라.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끝없이 상기해라."
"……."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니, 괴로운 일일 것이다. 창칼에 몸을 베이고 찔리는 것보다도 더."
그의 분위기, 목소리에 담긴 무게를 통해 군터는 황자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조언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아했다.
"내게 무엇을 바라시오."
"두 가지다."
황자가 굳은 표정을 풀고 슬며시 웃었다.
"세상에 재앙이 하나 더 늘지 않기를 바라며, 동시에 내가 쓸만한 팔 하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지."
"내가 당신에게 충성하기를 바라나?"
"그것이 본래 네 바람이 아니었던가? 설마하니, 조금 거칠게 다뤘다고 해서 삐치기라도 한 건가?"
죽다 살아난 것을 고작 거칠게 다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군터는 그것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했다. 감정의 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황자의 일방적인 '시험'이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고 애써 이해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서 그가 황자의 제안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표면적으로 지금 황자는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실상 그것은 권유이면서 압박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충성한다면, 당신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소?"
"목숨으로는 부족한가?"
"한 팔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가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 아니오."
군터가 담담히 대꾸하니 황자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더 진해졌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럴만한 능력은 있나?"
"내가 쓸만하다고 여겼기에 한 팔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오?"
"글쎄. 무용(武勇)은 인정하지. 허나 그것만으로 장군의 자리는 내줄 수 없다."
"허면?"
"시험을 해보겠다."
'시험'이라는 말에 군터는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았다. 다만 그럼에도 완전히 표정 관리가 되지는 않았던 것인지, 황자가 그를 보며 키득거렸다.
"걱정 마라. 이전 번처럼 험하지는 않을 것이니. 어차피 시간은 많다. 진득하니 앉아 이야기나 나눠보도록 하지."
황자는 그가 말한 그대로 행했다. 그는 매일 군터를 불러 독대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는 군터와의 독대에 그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이라는 말도 부족한 행사였지만, 그렇게 종일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여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긴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들은 거의 전부가 쓸 데 없다고 생각되는 잡담들뿐이었다.
군터는 황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두 가지에 놀랐다.
그는 이렇게까지 쓸모 없는 주제로도 대화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보다도 젊어 보이는 모습의 황자의 나이가 50이 넘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황자의 나이가 보이는 것처럼 젊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나 나이가 많을 줄은 몰랐다.
"놀랐나?"
"그렇소."
"익숙해져야 할 거다. 아니,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야. 너 또한 경계에 발을 디뎠으니 인간의 시간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터."
"무슨 소리요."
"불노불사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에 가까울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갈 것이라는 뜻이다."
"……."
"누군가에게는 축복이겠으나, 누군가에게는 저주이겠지."
며칠 동안 이어진 독대에서 나눈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잡스러운 것들이었지만, 아주 조금은 의미 있는 것들도 있었다.
"주어진 병력은 1만. 전장은 산지. 1만 5천의 적은 강 너머에 주둔해 있다. 군대를 어찌 움직일 테냐."
큼지막한 석판 위에 나무로 된 조형물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산을 의미했고, 강을 나타냈으며, 병사를 형상화했다.
"……."
황자는 간단한 문제라는 듯이 툭 물었지만 군터는 답을 하기 위해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그는 숱한 전장을 누볐지만, 그 전장들에서 승리를 거뒀던 거의 전부가 일신의 무용을 앞세운 돌파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정석적인, 군재만을 활용한 전투는 거의 경험한 바가 없었다.
"……."
고심을 거듭한 군터가 어렵게 답을 내면, 황자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상대의 병력이 반 배가 더 많다. 고지를 끼고 있다 해도 두 진영 사이에 강이 흐르는데, 어찌 신속하게 적진을 급습할 수 있을 것이며 혹 적이 일부 병력을 돌려 후방에서 치고 온다면 어찌 진영을 사수할 생각이냐?"
"그건……."
제대로 배운 적 없고,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군터의 얕은 군사 지식은 황자의 몇 마디에 바로 바닥을 드러냈다.
"미숙하기 짝이 없군."
황자의 신랄한 한 마디에 군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장군이 되기를 원한다면 장재를 갖춰라."
"어찌 해야 하오."
"모르면 배워야지."
뭐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황자가 퉁명스레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