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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52화 (452/1,064)

452화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아닙니다."

"궁금하더냐? 내가 왜 그랬는지?"

"……."

카자쿠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습니까? 놈은 전하를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랬지."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조하는 기색에 용기를 얻었는지, 카자쿠가 조금 더 힘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굳이 그렇게 심하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근위대 병사들이 스물 일곱이나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래서 말하지 않았더냐.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명하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이다."

"전하."

"놈이 날 섬기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였을 뿐이다. 필요에 의한 섬김은 필요에 의해 거둬질 수 있는 법. 적당히 써먹을 정도라면 상관없지만, 중용 할 재목이라면 그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따라 말이 많군."

"……."

"녀석과 교분이라도 쌓았더냐? 괜찮다. 죽지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이었지만, 그렇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

황자는 모피에 몸을 묻었다. 술잔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크게 상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의 몸 안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법보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낸 대가다. 신혈(神血)을 물려받았다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육의 반은 신이나, 반은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불완전하고, 약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런 연약함이 좋았다. 강한 반쪽보다도 더.

이런 떨림과 감정의 동요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느냐? 신이라는 것은 두려움이 빚은 허상이요 괴물이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비틀릴 대로 비틀린 왜곡에 지나지 않아."

"어인 말씀이십니까."

"나는 내 스스로 인간임을 자부하기에, 그런 거짓 따위는 용납할 수가 없다. 그릇된 역사는 400년이면 족하지 않은가."

카자쿠는 그의 주군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이는, 노여움을 비롯한 감정의 동요가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지금은 입을 열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 들었던 것이다.

"녀석이 인간이라면 나는 중히 쓸 것이다. 하지만 신이라면……."

흐리는 말끝이 잘 벼린 칼날처럼 서늘했다.

*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답답함이었다.

손발을 꽁꽁 묶은 쇠사슬도,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도 모두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있어야 하는가.

그 다음에는 노기가 치밀었다.

그저 7황자에게 임관하여 자리를 찾고자 했을 뿐인데, 어째서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가.

그 뒤로는 여러 가지 뜨겁고 차가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마음을 진탕시켰다.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잊었고, 시간의 흐름마저도 잊었다.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텅 비고 나니, 다른 것이 고개를 들었다.

아주 단순한 감각. 혹은 본성.

'답답하다.'

모든 것들이 거슬렸다.

화가 난다.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손발에 힘을 주니 사슬이 철컹거렸고, 그 소리가 또 그를 화나게 했다.

"으아아아아아-!"

짐승 같은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폭풍이 불건,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뒤에 오는 것은 무거운 적막뿐이었다.

"……."

그렇게 있는 대로 성을 내고 발광을 했으나,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시들해졌다. 이제 그는 다시 또 조금씩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육신을 옭아맨 모든 것들, 어디선가 불어온 가느다란 바람을 느끼는 정신까지도.

[…….]

그는 눈을 떴다.

빛 한 점 들지 않던 세상은 어느새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래봐야 한밤중이 늦은 저녁이 된 정도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이제 그는 비로소 볼 수 있었다.

[…….]

들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나무는 보이지 않았고, 대체 얼마나 먼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먼 곳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초원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것인지 모를 풀들만큼이나, 무수한 시체들이 풀들 위에 겹겹이 누워 있었다. 종류는 다양했다. 온갖 짐승의 시체들이 있었고, 인간의 시체도 있었다. 멀쩡한 것들도 있었으며, 반쯤 썩은 것도 있었고, 아예 다 사라지고 뼈만 남은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을 보며 그는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을 풍경으로 나타낸다면 딱 이런 광경이 될 것 같았다.

수북하게 쌓인 시신들은 강을 이루고 산을 이뤘다. 그 산들 중 가장 높은 산 위에, 거대한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 풍경의 일부였으나, 동시에 이질적인 중심이었다.

[…….]

그것이 그를 보았다. 그도 그것을 보았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낯설기도 했다.

낯설다? 정말로 낯선가?

'그것'에는 얼굴이 없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는 살점 같기도 하고 가죽 같기도 한 평평한 무언가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의심하기 시작하자, 그 평평했던 것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꾸어갔다.

[나다.]

나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바뀐 형태는 그를 조금 닮아 있었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확신할 수 없어, 그는 그것의 눈을들여다 보았다.

[…….]

그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했으나, 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불쾌함에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역겹군.]

그가 팔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창 한 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꺼져라.]

창이 '그것'의 얼굴을 찔렀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창끝이 살을 파고 들었을 때, 얼굴을 닮았던 것은 어느새 역겨운 살점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

"……."

"기분이 좀 어떤가?"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왔다고? 누가?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자신과 마주한다는 건, 그 누구라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야."

"…희롱을 하러 온 건가."

"아니. 사과를 하러 왔다."

"……?"

"네 말이 맞았다. 넌 인간이로군.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야."

"알아듣지도…못할 소리는 집어치워라. 헛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꽤나 괴로운 일이니까."

"그래.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지. 하지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아. 그러니 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몸을 좀 추스른 후에."

끼익-!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군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껏 그를 스쳐간 실바람이 아닌, 굵은 바람이 머리를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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