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신(神)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예로부터 인간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거나, 항거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어디선가는 덩치 큰 곰을 신이라 했고, 어디에서는 이따금씩 일어나는 돌풍을 보며 신이라 했다.
그러다가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무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그 많던 신들도 크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신은 존재했다. 인간이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이치를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인간들은 미지를, 두려움을 신이라 칭했다.
그 막연한 개념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잡혀가기 시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구도자(求道者)라고 불리는 이들은 미지를 탐구했으며 죽음을 비롯한 온갖 두려움을 개척했다. 그들의 그러한 도전은 무수한 실패를 낳았지만, 동시에 일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기(氣)의 존재를 밝혀낸 것 역시 그들의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기의 존재를 규명함으로써 인간은 이제껏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두려워했던 여러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렇게 기의 존재를 규명하고, 그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술사(術士)들이 등장하면서 미지에 대한 인간의 탐구는 다시 한 번 큰 진전을 이뤘다. 이제 인간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필연인 죽음마저도 두려움이 아닌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를 이용하여 죽음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들은 기를 이용해 불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바람을 불러올 수 있었다. 수백 년 전의 사람들이 그들을 보았다면 신이라 여길 만큼 신비하고 파괴적인 힘을 다룰 수 있었다. 사실 동세대의 사람들조차도 그리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기를 알지 못하고 술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에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행하는 술사들이 신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그들 역시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신'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도전자라고 여겼다.
그런 그들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뿐이었으며, 높은 경지에 이르는 이들은 거기서 또 한줌 밖에 안 되는 극소수였다. 그렇기에 불가피한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제껏 그들이 돌파해 온 모든 신비들처럼, 죽음 역시도 그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고, 오만이었다. 모든 생명의 종말은 그야말로 운명과도 같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온갖 수를 동원하여 아주 조금 삶을 연명할 수는 있었지만, 완전한 죽음의 극복은 요원했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도전했다. 죽지 않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불가능에 대한 도전욕구가 그들을 계속 도전케 했다.
무수한 도전과 좌절. 그 끝없는 열망의 끝에 그들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껏 그들이 해왔던 방식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단순히 기를 다루는 것으로는 안 된다. 보다 본질적이며,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필요했다.
그들은 생명이라는 개념을 분리했다.
신(身)과 영(靈).
눈에 보이며 만져지는 육체와 그 안에 깃든,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혼.
육신은 그릇이요, 혼은 그릇을 채우는 내용물이다. 두 가지가 합쳐져 생명이 된다면, 생명이 계속 존재하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까닭은 생명을 이루는 그 두 가지가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그러졌다고 한다면, 그 어그러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어그러짐인가.
이 의문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답은 결핍이었다. 정확히는 혼의, 영의 결핍.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간단했다. 인가보다 육신이 강한 존재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같았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강하다고 해서 인간보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령의 존재가 그들의 이런 가설에 힘을 실었다.
정령은 육신이 없다. 때문에 보지 못하며, 평범한 이들은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아주 예전에는 그들을 신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다. 정령은 그 정도로 신비로운 존재였으나, 그들은 완전하지 않다. 육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이며 기이다. 불안정하게 흘러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이 아직까지다 파헤치지 못한 미지의 한 가지였으나, 그들의 존재 자체를 통해 알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영 하나만으로도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 육신이 없어도, 비록 불안정하다 할지라도 존재할 있다는 것.
"영이 육체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가 시드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물과 나무의 관계와 같지. 물을 먹지 못한 나무가 시들어 가듯이, 영이 육체를 채우지 못하기에 육체가 사멸한다는 거다. 그 논리가 과연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논리 위에서 초월자들이 탄생했지. 선황(先皇)과 군주 같은 자들이."
짧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군터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들이 자신과 관련 없지 않기 때문이었다. 모페이브가 다 채워주지 못했던 의문들을 7황자의 이야기가 상당수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7황자가 무슨 말을 꺼내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떠버리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답은 간단하지. 영의 크기를 키우면 된다. 육신을 채우고,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문제가 있으니, 인간의 영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라 더 크게 키울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육신은 단련을 통해서 더 강하게 만들 수가 있지만, 영은 그것마저도 불가하지. 결국, 구도자들의 도전은 다시 한 번 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온갖 것들을 궁리하고 시도하며 답을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한 가지 답을 내놓았다.
"인간의 영 그 자체를 키울 수 없다면,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너 역시 경험했겠지?"
영을 물에 비유한다. 그러니 가지고 있는 물이 부족하다면 다른 곳에서 물을 길어 오면 되는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모로.
갖가지 방법들을 다 시도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영과 영을 뒤섞는 방법이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은 역시 인간의 영을 섞는 것이었는데, 이는 상당히 비극적인 결과만을 남기고 실패했다.
합쳐지는 영은 단순해야 했다. 되도록 의지를 가지지 않은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영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래야만 합일(合一)의 과정이 끝났을 때 온전한 영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인간의 영이 제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이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 먼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정령이었으나, 그것 역시 실패했다. 정령은 마치 아주 가느다란 모래와 같아서, 그들이 쥐려 해도 쥐어지지가 않았다. 다룰 수 없으니 당연히 제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다시 한 번 눈을 돌렸고, 어떠한 존재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이따금씩 대지의 정기(精氣)가 한 데 뭉치면 탄생하지."
그것은 어쩌면 정령과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정령은 자연의 기가 조금 뭉쳐 탄생한 흐름의 일부라면, 그것은 한 데 뭉치고 고여 나타난 일종의 현상이다. 거대한 힘이 자그마한 념(念)을 품고 태어난 것이랄까. 말하자면 그것은 대지의 화신이요, 땅의 의지 그 자체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신이라 불렀다. 그것은 육신이, 형체가 존재했기에 옛적부터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제물로서 더 없이 매력적인 조건이지. 품은 힘은 막대한데, 정신은 백치와도 같아. 아무튼 그때부터 때 아닌 문헌 탐구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고 하더군. 각 지방의 전설을 탐구하고, 설화를 캐기 시작했어.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지."
그렇게 찾아낸 신들이 제물로 쓰였다. 역시 적지 않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이번에는 끝이 달랐다. 합일의 과정을 버텨낸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게 군주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 초월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저 인간을 벗어났을 뿐이야. 껍데기만 인간일 뿐, 그 속에 담긴 것은 전혀 다르지. 헌데…난 지금 너에게서 그들과 같은 것을 느낀다. 벽지의 일개 무관 따위가 어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에 우연이 빚은 결과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황자의 몸에서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존재감이 갑작스레 거대해졌다. 그의 기세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의도적인 압박. 당장 무릎을 꿇으라는 것 같았으나 군터는 몸을 낮추지 않았다. 처음과 다름없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자를 의심했다.
군터가 그의 압박에 아랑곳 않고 버티자 황자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은 사뭇 서늘했다.
"난 군주라는 자들을 안다. 그렇기에 그들을 좋아하지 않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자가 없어. 어딘가 한 구석이 망가져 있거나, 뒤틀려 있지. 그리고 그들과 같은 너 역시 그러하겠지."
"저는 인간입니다."
군터는 담담히 답했다. 그러나 황자의 입에 걸린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합일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머지않았다. 결국 너 역시 그들과 같아질 것이다. 망가지고, 뒤틀리겠지. 선황은 그것을 우려했기에 그들의 목에 목줄을 채웠다."
황자는 조소했다.
"나는 너를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자를 어찌 쓸 수 있을까."
"허면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네 목."
"……?"
"내가 만들 세상은 인간의 세상. 그 세상에 인간이 아닌 자는 필요치 않다. 아니,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긴 옷깃에 가린 황자의 팔목에서 검은 줄기들이 뻗어 나왔다. 그 가느다란 줄기들은 넝쿨이 서로 얽히듯 얽혀,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가시 같기도 하고, 칼 같기도 한.
"죽어라.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그뿐이다."
"……."
군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