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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49화 (449/1,064)

449화

빌리치 아조프와 이야기를 나눈 후 연회장으로 돌아온 군터는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에게 둘러싸여야 했다. 그들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때마침 찾아온 또 다른 손님 때문에 입을 열려다 말고 다시 침묵해야 했다.

"군터 공.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근위대의 병사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전하'라는 말에 주변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알겠네."

"따라오십시오."

근위병은 군터를 내궁으로 데리고 갔다. 연회장을 지나는 내내 군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들을 느꼈다. 그 시선들은 군터에게 향했다가, 그의 앞에 걸어가는 근위병을 향했다가, 다시 군터에게로 향했다. 군터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 그가 7황자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 챘으리라.

"왔군."

내궁으로 향하는 대문은 카자쿠가 근위병들과 함께 지키고 있었다. 그는 군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근위병 두 명이 다가와 군터의 몸수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색을 한 병사들이 아무런 무기도 없다는 것을 알리자 카자쿠가 뒤편의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쿠구구구-

두꺼운 문이 열렸다. 겉은 화려한 황금색이었지만 실제로는 철문이었다. 진짜 금보다 더 화려하게 도금이 되어 있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들어가라."

카자쿠는 그리 말했다. 그와 병사들 모두, 따라 들어가려는 기색은 없었다.

'독대인가.'

군터는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문을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뒤쪽에서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걸음을 옮기는 내내 가장 눈에 띈 것은 벽마다 빼곡하게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그림은 어떤 전투를 표현한 것 같았다. 그림이 표현하는 전투는 장엄했으며, 또한 치열했다. 그림 자체는 현실적이지 않고 다소 추상적이었으나,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을 만큼 생생했다. 전장의 풍경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전장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군터조차도 절로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림을 보며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림 속에서 뭔지 모를 거대한 짐승과 군대가 격돌하던 즈음, 군터는 앞쪽에서 맹수의 낮음 울음소리와 인기척을 느꼈다.

일정한 거리마다 늘어서 있던 기둥이 모습을 감춘 곳. 탁 트인 공간. 단순히 권력자의 자리를 위해 마련했다고 보기에는 꽤나 어색한, 흡사 제단 같은 그곳에 그가 있었다. 덩그러니 세운 황금빛 옥좌에 앉은 그의 양 옆에는 두 마리의 대호가 엎드리고 있었다.

"전하."

"왔군. 편히 있어라. 서 있어도 좋고, 앉아도 좋다."

군터는 선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자와 눈을 마주쳤다.

옅은 푸른색. 맑게 갠 하늘과 닮은 눈. 하지만 군터는 그 안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하늘을 보았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군터는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이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널 불렀는지 아느냐?"

이곳에 오기 전. 카자쿠가 7황자의 부름이 있을 것이라 언지를 주고 간 후에 제레이스 가문에서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것은 당부였으며, 조언이었다. 황자의 앞에서 갖춰야 할 예절. 그가 어떤 말을 했을 때 해야 하는 답 등. 그 중에서는 지금 그가 던진 것 같은 물음에 대한 답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군터는 그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잊었다. 그렇게 외우다시피 한 답을 내밀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는 복잡한 생각 없이, 하고 싶은 답을 했다.

"제게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기 때문입니까."

군터의 무뚝뚝한 답이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황자가 슬쩍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용건이 있으니 불렀겠지. 허면 다시 묻지. 내가 뭘 원할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궁금했다. 셀마에서의 전투가 말이야. 보고로 전해 듣기는 했지만 부족해. 전장에 있었던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기마를 이끌고 성벽을 내려가 가론드의 목을 베었다지?"

황자가 옥좌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휙 하고 던졌다.

콰악!

그러나 가볍게 날아온 검은 군터가 선 자리 바로 앞에 묵직하게 박혀 들어갔다. 거의 군터의 키만 한 대검이었다. 군터에게는 익숙한 검이기도 했다. 다름 아닌 가론드가 휘두르던 참마검이었으니까.

거대한 검은 여전히 상당한 무게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터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기도 했다. 군데군데 칼날에 이가 나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론드가 쥐고 휘두를 당시에 느꼈던,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군터의 의문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황자가 말을 이었다.

"가론드의 검은 황실의 명장(名匠)이 만들고, 궁정 술사가 직접 힘을 불어넣은 법구다. 그 힘의 근원은 가론드의 심장과 이어져 있지. 가론드가 죽으면서 검에 깃들어 있던 힘도 다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주인과 법구의 생명이 이어져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군터는 예전 그의 창을 떠올리고 납득했다.

"말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겪은 모든 것들을."

"……."

황자의 눈은 짙은 흥미를 담고 빛났다. 그의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고, 군터는 난데없이 이야기꾼이 되어 서투른 말솜씨로 그가 전장에서 겪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처음 셀마 성에 당도했을 때부터, 첫 전투에서 세레온 우슈무르가 쓰러졌던 일. 그 후에 벌어졌던 일들과 마지막 전투에서 성벽에 걸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가론드의 목을 벤 것까지.

황자는 한 번도 군터의 말을 중간에서 끊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호오"라든가 "음"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군터의 느릿하고 투박한 말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 후에 전하께서 내리신 귀환령을 받고 테리브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군. 재미있었다. 말솜씨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투박했지만,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야 그림이 그려진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선이 허공을 향하고, 손은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얼핏 보기에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무언가를 짚듯이, 가리키듯이, 그려내듯이.

"룬차이의 군대는 강했지. 아군의 사기는 처음부터 이미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지휘관에서부터 병졸들까지. 이미 마음에서부터 패배해 있었기에 과감한 시도는 꿈도 꾸지 못한 것이야. 성은 룬차이의 의도대로 고립 되었고, 그 자는 일부러 원병을 성 안에 들어가도록 했다. 가둬둘 자신이 있었던 것이겠지. 시간을 두고 고립시켜서 무너뜨릴 작정이었던 거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시간을 끌면서 승리까지 취할 수 있으니 그 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도였겠지. 어리석은 형제 놈은 속이 타들어갔겠지만."

그 대목에서 황자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의 눈은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군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황자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싸움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수용 가능한 수를 훌쩍 넘어선 병사들이 성 내의 군량을 빠르게 소비했겠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았겠지.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그렇다면할 수 있을 때 뭐라도 해보겠다. 용감했지만, 뻔히 읽힐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 이전에 같은 시도를 했었던 결사대도 처참하게 실패했었지. 그럼에도 나섰다."

흐렸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뒤로 넘어갔던 고개가 다시 내려왔다. 황자의 시선이 군터를 향했다.

"어째서냐."

공기가 급변했다. 군터는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니 노려보는 황자와 눈을 마주쳤다.

"어쩔 수 없는 발악이었나?"

"……."

군터는 침묵했다. 어찌 보면 황자의 말을 무시한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길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황자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아닙니다."

긴 침묵 끝에, 군터는 답했다. 나직이 한 답에도 황자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군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답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군터는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인가?"

"아닙니다."

"허면?"

"적진에 룬차이가 없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

황자가 앞으로 살짝 나와 있던 몸을 옥좌의 등받이로 가져갔다. 동시에 그의 눈빛이 변했다. 노려보는 대신 흥미가 담겼다.

"전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을 보았습니다."

"천안(天眼)."

"언젠가부터 성을 감시하던 그 눈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설픈 눈속임이었군. 아마도 그 자는 네가 자신의 부재를 알아챌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움직였던 것은 그만한 연유가 있어서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착이었군."

황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턱을 괴고서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

"무엇을 더 보았느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황자에게, 군터는 그가 보았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굉음을 내며 솟아난 탑. 전의가 하늘에 닿은 채 공격을 가해오던 적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무너진 탑과, 가론드가 보였던 반응들까지.

그것을 다 들었을 때. 황자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군터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군. 역시 늙은 여우가 죽음을 맞은 것이로군."

죽음을 맞이해?

군터가 그 말에 미미하게 반응을 보이자, 황자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하잘(판니른의 주도)에서 난데없는 선풍이 일었다 하더군. 커다란 첨탑을 통째로 휘감고서 하늘까지 솟구쳤다고 들었다."

"……."

"신이 사멸할 때, 하늘과 땅에 기이한 조화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들은 바 없습니다."

"거창한 죽음이지. 네 목이 잘릴 때도 그런 기사(奇事)가 일어날 것이다. 뭐, 죽고 난 뒤이니 네가 알 방도는 없겠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와 모른 척을 하는 건가?"

피식 웃은 황자가 몸을 일으켰다. 옥좌의 양 옆에 엎드려 있던 두 마리 대호가 덩달아 고개를 들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너무 희미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번에 너를 보았을 때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영(靈)이 신(身)을 채우지 못한다면 이면(異面)을 볼 수 없다."

"……."

"내가 널 알아보았듯, 너 또한 날 알아보았겠지. 그러니 통하지 않을 거짓을 말하는 대신 다 털어놓은 것일 테고. 그렇지 않느냐?"

군터는 또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자의 눈을 들여다보아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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