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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48화 (448/1,064)

448화

전장에 나가 있던 7황자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귀환했다.

온 도시가 떠들썩해졌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 나갔고, '만세'를 외치며 7황자를 칭송하고 그의 병사들을 환영했다.

"전하."

시민들뿐 아니라 신료들도 모두 성문 앞까지 몰려 나갔다. 군터도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과 섞여 환영 행렬에 동참했다.

"승전을 감축 드립니다!"

"승전을 축하하기에는 이르지.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7황자가 피식 웃으며 사뭇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자칫 말문이 막힐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신료들도 7황자의 성미에는 익숙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당황함 없이 마주 웃었다.

"끝나지 않았으나,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요."

"안일하군."

"전하를 믿고 있을 뿐입니다. 전황이 안정되지 않았더라면 전하께서 돌아오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뱀의 혀로다. 듣기에 싫지는 않지만, 적당히 하도록."

"옛."

7황자는 그를 마중 나온 무리를 거느리고 천천히 도시의 대로를 이동했다. 뻥 뚫린 대로의 좌우에는 몰려나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군터는 새까맣게 가득 찬 군중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 위글로우에서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여러 번 봤었다. 비슷한 광경이지만, 차이라고 한다면 역시 규모였다. 테리브란은 위글로우와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큰 도시. 당연히 시민들의 수 또한 위글로우와 비할 바가 못 됐다. 대로 양 옆으로 우글거리는 시민들의 수가 얼핏 보기에도 족히 수만은 되어 보였다.

"군터."

"음?"

낯익은 사내가 그를 불렀다.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검은 피부. 일전에 군터와 겨룬 적도 있었던 사내. 7황자의 호위대장 카자쿠였다.

"전하께서 찾으신다. 승전연이 끝나고 나면 내궁(內宮)에 들도록 하게."

"…그러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네 어쩌네 했지만, 아무래도 승전연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조만간 논공행상도 치러질 거라는 뜻인데,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라면 그때 해도 될 터. 그런데도 굳이 따로 내궁으로 찾아오라는 것은 다른 볼 일이 있다는 것이다.

'룬차이를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느냐는 건가.'

테리브란에 돌아온 뒤로 매일 같이 시달린 질문이다. 그때마다 군터는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반복해야 했다.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마지막 전투를 치렀던 그날, 적군에 룬차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마 7황자의 흥미, 내지는 궁금증도 그것일 터였다. 제국인들은 룬차이를 전투로 이길 수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해낸 당사자에게 궁금한 점이 많은 것이겠고.

"전하께서 자네를 크게 쓰시려는 모양이군."

카자쿠가 돌아간 후. 사이주 제레이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내궁에 부르셨다함은 전하께서 독대. 내지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네와 긴히 말씀을 나누고자 하신다는 것이야. 이는 굉장히 드문 일이네. 전하께서는 쓸모없는 자에게 시간을 들이시는 법이 없거든."

"……."

"전하께서 자네를 중히 쓰시기로 마음먹으셨다는 뜻이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돼. 전하께서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쓰시는 분이 아니거든."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가르침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조언 정도로 해두지."

사이주 제레이스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실 때 단 두 가지를 보신다네. 하나는 능력이고, 하나는 충성심이지. 전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전하께 자네의 충심을 증명해야 할 것이야."

*

승전연은 성대하게 열렸다. 군터가 이제껏 봤던 그 어떤 연회보다도 더 큰 규모였다. 도시 전체가 축제였고, 내성과 안쪽의 궁궐에서는 연일 음악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밤을 잊은 나날이 열흘이 넘도록 이어졌다.

군터는 매일 연회에 참석했다.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군터는 그들과 함께하며 모르는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쪽은 군터 장군이오."

언젠가부터 그의 이름 뒤에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사실 그는 현재 아무런 관직도 없는, 제레이스 가문의 객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군터 장군. 그대의 활약이 멀리서도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더군."

승전연 내내 불편한 만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는 얼굴이 짓궂은 말을 하며 다가왔을 때, 군터는 오랜 친구를 본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다.

"귀를 열고 있으니 소리가 들렸던 것이겠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전장에서 전투에 집중하지 않은 모양이군."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왔지 않은가."

군터는 그와 가볍게 포옹까지 나눴다. 뺨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는 빌리치 아조프였다. 군터가 일찍이 위글로우의 기사였을 때 처음 만나 교분을 나눴던 사이로, 비록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같은 무인으로서 서로 마음을 나누었었다. 그냥 봐도 반가운 마음이 들 텐데, 달갑지 않은 시간만 이어지던 차에 그를 만났으니 군터의 입가에도ㅓ 절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들었네. 가론드의 목을 베었다지? 정말이지 놀랍군. 내 자네가 보통 내기는 아니라는 것을 아고 있었지만……."

"비스칼 공은?"

비스칼 구르얏트. 그 역시 빌리치 아조프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군터와 교분이 있던 무관이었다. 7황자의 진영에서 무공이 뛰어나기로 이름 높은 사내이기도 했다.

"그는 전장에 남았네. 자처해서 남았지. 자네도 알겠지만,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음."

빌리치 아조프와 비스칼 구르얏트. 둘 다 훌륭한 무인들이지만 다소 소탈한 면이 있는 빌리치 아조프에 비해서 비스칼 구르얏트는 야심이 있는 사내였다. 일전에 군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도 그는 군인으로서 명예와 공을 쌓아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구를 종종 드러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뭐하지만, 그 친구가 자네의 소식을 듣고 꽤나 자극을 받은 모양이더군."

전장에 남아 전공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대분의 무관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하다. 전장은 위험한 곳이지만,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명예와 출세를 원하는 군인들이라면 어떻게든 남으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쉬운 기색 하나 없어 보이는 빌리치 아조프가 오히려 특이한 경우였다.

"괜찮은가?"

"무엇이? 공을 세울 기회를 날려버린 것에 대해?"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빌리치 아조프는 작게 코웃음 쳤다.

"대수롭지 않네. 앞서 이야기가 나왔지만, 다 끝난 전쟁이지. 나는 직접 사냥을 하는 맹수가 되고 싶지,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나 들개가 되고픈 마음은 없거든. 게다가…자네와 비하면 부족할지 모르지만, 나도 나름대로 공을 세웠다네. 체면치레는 한 셈이지."

"그런가."

"그래. 그나저나…꽤나 힘들어 보이는데."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올라갔던 입 꼬리를 도로 내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에 빌리치 아조프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픽 웃었다.

"재미없지. 안 그런가? 여기저기 팔리는 물건이 된 것 같고 말이야."

"그래. 솔직히…별로 즐겁지는 않군."

"본래 제레이스 같은 위세 떨기 좋아하는 작자들이 다 그렇지. 자네가 망명해 온 후로 그들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안타깝군. 그때 내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됐을 것인데."

"……."

"뭐,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나. 자네를 탓하고픈 마음은 없어. 자네도 어쩔 수 없었겠지. 그리고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이야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사이주 제레이스는 그 중에서 제법 괜찮은 편이야."

"다 알고 있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자네는 지금 테리브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라네. 그 룬차이를 상대로 해서 승리하지 않았나."

"운이 좋았을 뿐."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든 싫든, 당분간은 단단히 유명세를 치러야 할 걸세. 지금도 자네에게 말을 붙이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 수두룩해. 다만 제레이스의 인사들이 자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을 뿐."

그 말 대로였다. 여기저기서 흘깃거리는 눈길은 사방에 가득했으나, 정작 다가오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먼저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자네는 괜찮은 건가?"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볼 것 같은가? 눈치를 본다면 자네가 봐야겠지. 그들은 자네가 나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야."

이번에는 군터가 피식 웃었다."그걸 알면서 왜 내게 말을 걸었나?"

"자네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틀렸나?"

"아니. 정확해."

"흐흐. 그럴 줄 알았지.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떤가?"

"그러지."

빌리치 아조프가 다가오면서 살짝 표정이 굳어있던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이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군터는 그들에게 간단히 양해의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양해를 구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과 다르지 않아, 자리를 옮길 것을 권한 빌리치 아조프가 오히려 조금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을 정도였다.

"괜찮겠나?"

"시달릴 만큼은 시달렸네."

제레이스 가문이 원하는 대로 실컷 얼굴을 팔았다. 그들의 신세를 진 것은 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레이스 가문의 가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하자는 대로 무조건 다 맞춰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좀 조용하군."

혼잡함을 피해 자리를 옮긴 그들은 한적한 테라스로 나왔다. 뻥 뚫린 기둥 사이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답답했던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자네가 제레이스의 손을 잡았으니, 자네도 이 지저분한 싸움터에 몸을 담군 셈이 되었네. 때문에 이제부터는 자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네를 어떻게 해보려는 음습한 수작들이 여럿 있을 것이야."

그렇게 답답하던 속이 좀 풀리려고 하던 차에 다시 반갑지 않은 주제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군터는 표정 없는 빌리치 아조프를 보며 나직이 반문했다.

"그게 자네가 될 수도 있나?"

"아니. 난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재주도 없고. 그런 것을 잘 하는 자들이 있지.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

"난 그 지저분한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데."

"그렇겠지. 하지만 말했지 않나. 자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그리 될 것이네. 그리고 자네가 끼기 싫다고 해도 제레이스는 어떻게든 자네를 끼어들게 만들 것이야."

"내가 거부한다면?"

"…그리 되면 제레이스가 자네를 묻어버리려 들겠지. 만일 그런 생각이라면 나는 말리고 싶군."

"어째서지?"

"자네는 이미 선택을 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야. 이 판은 그렇다네. 무리에 끼지 못하면 사냥당하지. 겉으로는 사람 좋게 웃어대면서도 등 뒤로는 칼을 숨기고 있어. 조심하게 군터. 이 판의 치열함과 음습함은 자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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