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2황자가 죽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군터는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2황자는 단순히 군벌 세력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 독자적인 군세를 부릴 수 있는 명분을 쥔 당사자였다. 그가 있었기에 2황자의 세력은 황좌를 두고 다투는 전쟁에 뛰어들 수 있었다. 2황자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2황자의 죽음은 단지 우두머리의 상실일 뿐 아니라 명분의 상실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은 동력을 잃기 마련이고, 심지어 전세마저도 좋지 않다. 그들이 당장 백기를 내걸어도 이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군터가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적들은 백기를 걸기는커녕,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죽음을 부추기는 일 아니겠는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다고 생각한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자포자기 해버린 것일 수도, 그래서 더 악에 받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뭐가 됐든 그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좀 더 지속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셀마 성에 머무는 시간 정도였다.
"부상병 이천을 후방으로 이송했습니다."
"수고했소."
군터와 셀마 성에 내려온 명령은 전선의 유지였다. 이는 적이 먼저 도발을 해오지 않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룬차이의 군대가 패퇴한 이후로 서남부의 전선은 고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 전선은 7황자가 있는 동부전선으로, 그곳에서는 지금도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들었다. 하루 건너 하루 꼴로 승전보가 날아드는 것을 보면 7황자와 그의 군대가 아주 맹활약을 하고 있는 듯했다.
'시간문제일 뿐인가.'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갑자기 눈 먼 화살에 7황자가 전사라도 당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요즈음 군터는 기병을 이끌고 성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간단한 보고 몇 가지만 받으면 되니, 실상 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그의 전쟁은 이미 끝났다. 그리고 먼 곳에서의 전쟁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군터는 저물기 시작하는 해를 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
세레온 우슈무르가 죽었다.
부상에 더해 약 기운을 빌어 무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또 다시 중한 상처를 입은 그는 보름이 넘도록 앓아 누웠고,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소식은 곧바로 전선에 나가 있는 7황자에게 전해졌고, 답신 또한 빠르게 당도했다.
7황자의 명에 따라, 세리온 우슈무르의 시신은 마차에 실려 테리브란으로 옮겨졌다. 병사 백 명이 그의 시신을 호송했다. 테리 브란에 시신이 당도하면 성대한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괜찮은 사내였습니다.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할렌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군터는 그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훌륭한 군인이었지."
되도록 장례식에 자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세레온 우슈무르가 죽으면서, 임시였던 그의 지위가 정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이 끝나고 나면 거두어질 지위기는 하지만, 임시와 정식의 차이는 컸다.
"장군. 켈지스의 적이 움직임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장군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출진하기라도 했나."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흩어져?"
"예. 깃발도 내려갔다고 하더군요. 아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휘관을 죽이고 도주라도 한 건가."
"아니면 지휘관이 직접 주도했을 수도 있지요. 아무튼, 그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명분 없는 싸움. 더 버텨봐야 돌아올 것은 죽음뿐이다. 병사들은 바보가 아니며, 장교들 역시 그러하다. 충성을 바치거나 따라야 할 대상도 잃어버린 그들이 더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있겠는가.
"진군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닌가."
"하지만 명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
그렇다. 그에게 내려진 명은 셀마 성에 주둔하며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었지, 남진하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의문이었다. 이미 서쪽에서는 연일 승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적들의 기세는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동남의 군대까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양 쪽에서 적을 압박해 들어갈 수 있을 터. 그런데 어째서 출진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것인가.
사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아직 7황자의 신뢰를 사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승계 받은 군대를 가지고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 정도는 맡길 수 있지만, 직접 군대를 몰고 전투를 치르게 할 정도는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군터는 본래 객장이었으며, 그마저도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얼결에 성의 지휘관 자리를 맡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얼결에 그리 된 것일 뿐이다. 그마저도 세레온 우슈무르가 직접 그를 지목하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군터는 7황자에게 충성 맹세를 한 적도 없었고, 직접 얼굴을 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7황자가 그에게 군대를 맡기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것을 이해할지라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성벽 위에 올라 매일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 외에, 말을 타고 성 밖을 달리는 것 외에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7황자에게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셀마 성의 지휘권을 새로운 지휘관에게 인계 하고 테리브란으로 돌아오라.'
*
군터는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테리브란으로 향했다. 올 때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규모였으나, 돌아가는 병사들의 표정은 밝았다. 비록 많은 동료들을 묻었지만, 자신들은 승리하고 살아서 돌아가게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섭섭지 않은 포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허니 기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병사들과는 달리, 군터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 내려진 명이 단순한 복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서신에는 그냥 돌아오라는 말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테리브란에서 보자'고 쓰여 있었다. 이 말인즉, 7황자 또한 테리브란에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대충 다 정리가 되었다는 건가.'
2황자의 목을 쳤고, 저항하는 적의 세력 또한 몇 차례 패퇴시켰다. 이제 나머지는 휘하의 장수들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일 거다. 이제는 군무가 아닌 정무를 살펴야 한다고 본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어찌 되었든, 테리브란에 돌아가게 되면 7황자를 보게 될 터였다. 그를 만나는 것이 특별히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으나, 이제 곧 그의 처지가 완전히 결정 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7황자는 상벌을 명확히 한다고 들었다. 물론 사이주 제레이스에게서 들은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큰 전공을 세웠으니 섭섭하지 않게 상을 내려주기는 할 것이다.
'이제 비로소 자리를 잡은 건가.'
마음이 싱숭생숭한 이유다. 드디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 군터는 성취감과 더불어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군터 장군."
군터는 테리브란에 당도하기 전에 그를 마중 나온 무리와 조우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꽤나 고위직에 있음이 분명한 사내가 백 명에 가까운 무리를 이끌고 그를 맞이했다.
"장군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음. 고맙소."
군터는 그를 따라 테리브란에 입성했다.
"전하께서 수일 내로 당도하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여독을 풀고 편히 쉬고 계십시오."
"그리 하겠소."
그와 헤어진 군터는 가장 먼저 제레이스 가문의 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가주인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전장에 나가 있어 부재중이었고, 사이주 제레이스가 테리브란에 남아 있었기에 그와 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들었지.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냈어."
사이주 제레이스는 그새 꽤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간 테리브란에 있으면서 격무에 시달린 모양이었다.
"놀랐네. 정말 놀랐어. 룬차이를 패퇴시키고 그 가론드의 수급까지 취하다니."
세간에 룬차이를 패퇴시킨 것은 세레온 우슈무르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그가 군을 이끈 지휘관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는 죽었다. 칭송을 받을 대상이 없으니, 그 칭송의 일부는 당시 전투에서 활약한 군터에게 돌아왔다.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을 잃은 것은 우리에게도 큰 손해야. 하지만 잃기만 한 것은 아니지. 자네, 군터라는 장군을 발굴했으니까 말이야."
"낯이 간지럽습니다."
"겸양할 필요 없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번 전쟁에서 자네와 같은 대공을 세운 이는 없네. 전하께서도 자네의 공적을 인정하고 계시고. 하여 우리는 이번에 자네를 전력으로 밀어주기로 했다네."
"밀어준다 하심은?"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이 죽었으니, 한 자리가 비지 않았나. 또한 우리가 승리를 했으니, 오젠을 비롯한 5주 또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 터. 그리 되면 자리가 늘고, 사람이 필요하게 되지."
"……."
사이주 제레이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래 위장의 자리는 황제 폐하만이 임명하실 수 있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지 않은가. 게다가 전하께서는 황좌에 오르실 분인데, 그분께서 당신의 권리를 조금 일찍 사용하신다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나."
"허면……."
"이번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제 우리 전하께서 황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셨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걸세."
"……."
"이는 다른 쪽에 있는 자들에게 하는 선포이기도 하네. 이제 온 제국이 이 북방을 주목하게 될 것이야."
사이주 제레이스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열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