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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46화 (446/1,064)

446화

전투가 끝난 후.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쓰러지기 전에 자신의 부관과 근처에 있던 여러 장교들에게 자신이 쓰러지면 군터가 임시로 그의 일을 대신할 것이라 일러두었다. 덕분에 군터는 별다른 잡음 없이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잘 부탁하오."

그간 쌓은 공적에 더해 가론드의 수급까지 취한 군터였다. 거기에 세레온 우슈무르의 공식적인 선언도 있었던 만큼, 감히 그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속으로야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적의 군량을 어느 정도 탈취한 덕에 일단 한시름 놓았습니다."

적을 격퇴한 직후에 곧바로 한 것은 적의 진지에 있을 군량의 확보였다. 세레온 우슈무르가 승리를 확신한 후에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이기도 했다. 군터는 남은 기병과 기운이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곧장 그 명령을 수행했고, 덕분에 셀마 성은 당분간 굶어 죽을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파발을 띄우고, 병사들을 쉬게 합시다."

군터는 세레온 우슈무르가 당부했던 것을 유념하여 지친 군대를 쉬게 하는 한편 인근 성들과 후방에 파발을 띄워 끊어지다시피 했던 공조 체계를 다시금 다졌다. 물론 7황자가 이끌고 있는 본군 쪽에도 전령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간 룬차이가 셀마 성을 완벽히 고립시켰기에 기본적인 보고 체계조차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7황자는 이미 셀마 성이 함락 당했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병사들이 숨을 돌렸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한 번 치고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휘관 회의를 마친 후. 할렌이 은근하게 출진을 권했다. 성 안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 꽤나 사무친 모양이었다. 룬차이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서남 방면에 있는 2황자의 군세는 머리를 잃은 꼴이 되었다. 반면 셀마 성에 있는 1만 6천 가량의 병사들은 기세가 올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상이라든지 성의 수비를 위해 남겨야 할 병력을 고려한다면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봐야 5천이 조금 넘는 정도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적에게 확실하게 한 방을 먹여줄 수 있으리라.

"어찌 생각하느냐."

군터는 살라스의 의견을 물었다.

사실 그는 할렌과 같은 마음이었다. 적은 패했고, 대장을 잃었다. 그럼에도 지리멸렬하지 않고서 신속히 퇴각을 한 것은 인정해줄만하나, 사기가 떨어진 적들은 큰 위협이라 할 수 없다. 시기를 놓친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출진하여 남하한다면 적들을 쉽게 몰아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관은 출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첫째로, 숨을 돌렸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의 피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출진을 감행한다면 병사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둘째. 당장 남진을 한다 해도 가용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데, 적군은 더 많은 수의 병력으로 성을 끼고 버틸 것입니다. 야전에서 맞붙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출진을 한다 해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출진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단적으로 군을 움직이신다면 추후의 문제도 문제거니와, 당장 이곳의 다른 지휘관들도 반대할 가능성이 큽니다."

살라스의 말이 끝나자, 할렌이 즉시 반박했다.

"전장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고, 그때마다 먼 곳에다 허락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임시라고는 하지만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이 이미 대장님께 지휘권을 맡기셨습니다. 상관이 명령을 하면 따르는 게 군인 아닙니까."

"당장 상황이 이렇게 되어 대장님의 말에 따르고는 있지만, 그들 모두가 제국의 고위 장수들임을 잊으면 안 되네. 그들 중에는 7황자 진영에서 단단한 기반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야. 그에 반해 대장님께서는 제레이스 가문의 후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객장 신분이시지.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깝게 보일 수도 있어."

"대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이곳에서 모두 뼈를 묻었어야 할 작자들입니다."

"글쎄. 그들이 그리 생각할지는 의문이군. 어찌 되었든, 그들과 척을 져서 좋을 것은 없네."

군터는 출진을 주장하거나 강행한다고 해서 그들과 척까지 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설령 그리 된다고 해도, 그 정도로 척을 지게 될 자들이라면 거들떠 볼 생각도 없었고.

다만 살라스가 한 말 중에서 남진을 한다 해도 크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할 거라는 것과, 병사들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게다가, 아직 룬차이의 군사들이 남아있지.'

패하여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제때 추격을 하지 못한 탓에 크게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잘 수습을 했다면 당장 남진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애당초 우리의 목표는 셀마 성을 사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이미 목표를 달성한 상태에서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네 말이 옳다."

할렌은 조금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군터는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공은 넘치도록 세웠다. 살라스의 말마따나, 굳이 더 욕심을 낼 필요는 없으리라.

*

"호오."

"의외로군요. 어떻게든 버텨주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봤습니다만."

그 말대로다. 그 룬차이가 상대였다. 솔직히 버티라고는 했지만,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최대한 버텨주기를 바랐을 뿐.

헌데 승전이라? 보고에 따르면 단순히 승전한 것만이 아니라 가론드의 수급까지 취했다고 한다.

가론드의 이름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녹포장군이며 룬차이의 심복이다. 그런 자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세레온 우슈무르가 거둔 승리가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믿기지가 않았다. 룬차이가 패했다? 그 룬차이가?

황자로서, 군주라는 이들에 대해 세인들보다는 잘 안다고 자부했다. 특히 룬차이에 대해서는 더욱.

'차라리 먼저 발을 빼면 뺐지, 패전을 할 자는 아니다.'

세인들이 룬차이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는, 그가 쇠처럼 강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두 그의 전설적인 무명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사실 룬차이는 사자보다는 여우에 가까운 자였다. 전장의 판세를 읽는 그의 감각은 동물적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세가 불리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군사를 물리며,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굶주린 들개처럼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7황자는 세레온 우슈무르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택하여 보낸 장수다. 그의 능력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택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충분히 괜찮은 장수이지만, 룬차이를 대적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냥 부족한 게 아니라 턱 없이 부족하다.

'어떻게?'

패하라고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기적 같은 결과를 기대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 '기적'과 같은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기적'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중태라고?"

"예. 그러하옵니다."

전투 중에 크게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폴라릭 앤버까지 전사하면서 군대의 지휘를 맡을 이가 없어졌고, 때문에 세레온 우슈무르가 마지막에 지목한 군터가 그를 대리하고 있다고.

'이름을 꽤나 자주 듣게 되는군.'

제레이스 가문의 객장으로 들어갔다 했던가.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자주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제레이스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직접 군터를 지목했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물론 보고에 따르면 가론드의 목을 벤 것이 군터라고 하니 대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지만…….

"현장 지휘관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내가 더할 말은 없다. 세레온 우슈무르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하거나, 전역(戰役)이 끝날 때까지 그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허한다."

"옛. 하옵고 전하.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어차피 남진을 개시할 여력은 없을 것이 아닌가. 전선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라."

그렇게 명을 내린 후. 7황자는 그의 막사를 나섰다. 고지에 위치한 그의 막사에서는 멀찍이 자리한 적진이 훤히 보였다. 끝도 없이 늘어선 적군은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으나, 그는 저 대군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 군대가 어찌 보이느냐?"

그는 그의 뒤에 서 있던 호위대장 카자쿠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자쿠는 짤막하게 답했다.

"허수아비로 보입니다."

"허수아비라? 정병 7만이다. 내게 아첨하기 위해 아무 소리나 뱉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허면 어째서냐?"

"몸뚱어리가 맹수라도 대가리가 양이라면 소용이 있겠습니까? 양은 발톱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물어뜯지도 못합니다. 저보다 한참 작은 개새끼를 보고서도 놀라 도망치겠지요."

그 말에 비로소 7황자는 웃었다.

"바로 그렇다. 내 생각 역시 너와 같다. 내일 날이 밝으면 나는 단번에 저 허수아비를 치워버릴 것이다. 그리고 못난 형제의 얼굴을 내려다볼 것이야."

"그리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는 직접 중장기병 오천을 이끌고 2황자의 진영을 급습했다. 2황자의 군대가 당황하면서도 대항했으나, 뒤따라 온 7황자군의 5만 병사들이 연달아 공세를 가하니 7만의 2황자군은 기세를 되찾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 망나니 놈이……!"

7황자는 원독에 찬 눈을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갑옷이 영 안 어울리는군. 안 하던 짓을 하면 이렇게 피곤해지는 거다."

"설마 내가 네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될 줄이야."

"세상사 어찌 흘러갈지 누군들 알겠나.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네놈 역시 내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유언치고는 꽤나 구질구질하군."

2황자, 바란무르 엘 트라소프는 바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마지막까지 사납게 응시했다.

서걱!

잘린 머리가 땅을 뒹굴었다. 7황자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몸을 돌렸다.

"태워라. 운이 좋다면 부황의 곁에 갈 수도 있겠지."

그렇게 제국의 황좌를 노렸던 한 사내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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