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거의 메다꽂다시피 했음에도 가론드는 곧바로 몸을 튕겼다. 군터는 그것을 제지하는 대신 팔뚝에 꽂은 창에 힘을 주었다.
콰직!
팔뚝을 감싼 갑옷을 뚫고 박힌 창이 다시 한 번 부러졌다. 창날이 더욱 깊숙하게 팔뚝을 파고들었다. 뼈를 긁고 지나가는 감촉이 손에 확연히 느껴졌다.
퍼억!
가론드의 발이 가슴을 강타했다. 군터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주변에 떨어져 있는 칼 한 자루를 걷어차 띄우고 낚아챘다.
평범한 칼이었다. 들어도 들은 것 같지 않은 가벼운 무게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부웅!
팔 하나를 묶어놓다시피 했건만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어째서.'
분명히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더 우위를 점했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는 것인가. 한 팔을 잃은 상대의 움직임에 어째서 더욱 자신감이 엿보이는 것인가.
쿵!
착각이 아니었다. 가론드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빠르고, 위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창날이 박혀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팔도 아무렇지 않게 검 자루를 잡고 있었고 말이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채챙!
또 다시 칼이 부러졌다. 벌써 세 자루 째. 주위에 널려있는 것이 칼이고 창이라지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무기가 부러질 때마다 위태롭게 바닥을 굴러야 했으니까 말이다.
"죽어가는군."
"괜한 걱정이다. 내가 죽는다 해도 네놈보다는 늦게 죽을 테니까."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갈수록 강해지는 힘.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군터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가론드에게서 느껴지는 생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물이 새듯 줄줄이 새어나가는 생기는 아침햇살을 맞이한 새벽안개처럼 희미하게 흩어져갔다.
검던 머리카락이 점점 색이 바래어갔다. 투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에도 없던 주름이 생긴 듯했다.
그것을 눈치 챘을 때, 군터는 가론드에게서 빠져나오는 생기가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도 알 수 있었다.
탑.
멀찍이 보이는 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탑은 생기를 거두어갔고, 다른 알 수 없는 기운을 불어넣었다. 가론드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이었다. 가론드와 그의 병사들은 그 흐름 속에 몸담고 있었다. 아니, 그들 자체가 그런 흐름의 일부였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죽음에 익숙하며, 심지어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 군터조차도 한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수백, 수천의 인간에게서 생기를 갈취하고 있는 탑이 이제는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콰앙!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 싶었는데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반응할 수는 있었으나 뒤편에 있던 병사의 존재를 간과한 탓에 뒤로 물러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때문에 칼을 들어 막을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나 변변찮은 칼은 일격에 박살이 났다. 부러진 칼 조각들이 날아들었다. 머리 쪽으로 튄 것은 고개를 틀어 비할 수 있었으나, 갑옷에 틀어박히는 것들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인가? 슬슬 반응이 둔해지는군."
"……."
조롱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수준을 재는 것 같은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어쩌면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속으로 읊은 것이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중얼거리는 말이 상당히 불쾌했다는 것이다.
휙!
군터는 그의 등 뒤를 노리던 적병의 목을 가볍게 비틀고 들고 있던 창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허공에 휘둘렀다. 창날에 묻은 핏물이 튀었으나, 군터가 날려 보낸 것은 창에 묻은 피가 아니었다.
사기. 생기의 대척점에 있는 힘. 군터의 창끝에 맺혀 쏘아진 그 힘은 가론드를 향해 빠르게 뻗어갔다. 그러나.
"……!"
가론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을 돌파했다. 그에게 날아간 사기는 그의 근처에서 튕겨 나오며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것을 본 군터의 눈매가 슬쩍 꿈틀거렸다.
'역시 그런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라는 것은 의지를 통해 다룰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성질이 물과 비슷하다. 사람이라는 그릇 안에 들어 있으나, 의지대로 그것을 밀어내거나 하여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군터가 기를 쏘아 보낸 것 또한 그런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릇 안에 있던 일부를 덜어 날린 것에 불과하다. 상대의 그릇에 담긴 기가 웅덩이를 채울 정도로 크다면 한 줌에 불과한 기로는 흔들 수조차 없다. 방금 가론드가 사기를 아무렇지 않게 돌파한 것도 그와 같다.
즉, 그가 날려 보낸 기보다 가론드가 발산한 기가 더 강했다.
부웅!
이제 더 이상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군터는 자신이 조금은 안일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채앵!
가론드는 목숨을 걸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고자 이미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생명을 끝없이 희생하며 힘을 탐하고 있는 것이겠지.
쾅!
그에 반해서, 군터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아무것도 잃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분명 성벽에서 말을 달려 내려올 때는 그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오만했던가?'
머리로는 위기이며,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한다고 계속 되뇌었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은 머리와 따로 놀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괴리감에 군터는 이를 악 물었다.
*
"살라스님! 더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버텨라!"
살라스는 휘하 장교의 말에 짤막하게 대꾸했다. 더는 무리일 것 같다는 말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굳이 피에 젖은 몰골을 보지 않더라도, 힘 빠지고 다급한 목소리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적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고, 말들은 이미 기운이 다해 짧게 치고나가는 것조차 버거워 했다. 당장 쓰러지지 않고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
살라스는 황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적병이 찌른 창이 허공을 찔렀다. 즉각 검을 뻗어 목에 바람구멍을 내주었으나 그 후에도 뻗어오는 창칼들이 적지 않았다.
'전열은 무너졌다.'
무너져도 이미 한참 전에 무너졌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 중에서도 말을 잃고 땅을 구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아직인가.'
적 대장의 목을 베기 위함이었다. 룬차이가 아니라 가론드라는 녹포장군이 그 대상이었다. 성벽을 내려오기 전, 군터는 그들에게 가론드의 목을 노릴 것이라 했다. 그리고 룬차이가 전장에 없다는 말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믿고 따랐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가 내 무덤이로군.'
시간이 너무 끌렸다. 지금 당장 가론드의 목을 벤다 해도 몰려오는 적들이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군터가 합세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헉…헉……!"
할렌이 숨을 헐떡이며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니, 다가온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옆으로 왔다는 말이 맞으리라. 할렌은 그의 창끝에 목을 찔린 시신을 거칠게 걷어찼다. 그 또한 전투의 와중에 타고 있던 말을 잃은 듯했다.
"대장님께서는 아직이십니까?"
"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렇게 답한 후. 살라스는 곧바로 입을 열어 말을 덧붙여야 했다.
"아니. 이제 끝났군."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거구의 사내. 무릎 꿇은 그의 목을 군터가 단칼에 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끝났습니까?!"
할렌의 언성이 높아지려 할 때.
와아아아아-!
그의 목소리를 묻어버리는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
고생한 것에 비해서는 싱거운 마무리였다. 목을 베는 순간까지도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허탈함이 더 컸을 정도로.
"어째서……?!"
가론드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 한 마디였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은 군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서 무너져 내리는 탑과, 그 너머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군터는 가론드의 목을 베고 그의 수급을 취했다. 그러나 적장의 목을 베었다고 크게 외치기도 전에 이미 전세는 뒤바뀌어 있었다. 세레온 우슈무르가 이끄는 병력이 성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것이었다.
유일한 이점인 성벽을 포기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세레온 우슈무르가 직접 선봉에 서서 성문을 열고 뛰쳐나오니, 그와 그의 병사들은 막아서는 적들을 거침없이 밀어냈다.
그들이 결사의 각오를 다진, 말 그대로 결사대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적들이 갑자기 기세가 크게 꺾여버린 탓이 컸다. 그들은 대장의 목이 베였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그들에게 힘을 내어주던 '탑'이 무너져버린 탓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어쩌면 군터를, 죽은 가론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기적적인 승리를 일궈낸 셀마 군은 적이 갑작스레 무너진 것이 용맹한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과, 적장의 목을 벤 군터 덕분이라고 여겼다.
"룬차이는 아니지만, 큰 놈을 잡았군."
목이 잘린 가론드의 시신을 앞에 두고, 세레온 우슈무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예. 룬차이는 보이지 않더군요."
애초부터 룬차이는 노리지도 않았지만, 군터는 그렇게 대충 둘러댔다. 어차피 세레온 우슈무르도 그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적을 몰아냈지만…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야. 주변의 성들에 파발을 보낼 걸세. 그리고 군사들을 추슬러야겠지."
"예."
"자네가 하게."
"어인 말씀이신지."
"내가 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군."
힘 없이 중얼거리는 세레온 우슈무르.
사실 군터는 그를 다시 보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안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은 이미 거의 다 사그라진 상태였다. 이제 그가 쓰러지면, 아무리 독한 약을 쓴다 해도 다시 일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자네가 세운 공적은 눈이 부실 정도야. 폴라릭 앤버 장군도 전사했네. 내가 자네를 임시로나마 지목한다 해서 불만을 가질 이들은 없을 것이야."
"……."
"뒷일을 부탁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