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노림수가 제대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채앵!
한 손으로 휘두른 검은 그리 위력적이지 않았다. 힘을 주어 밀어내니 어렵지 않게 밀어낼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그 터무니없는 상황이 재현되는 일은 없었다.
"흐읍!"
힘에서 밀린 가론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왼 팔의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 이질감을 다 떨쳐내지 못한 듯했다.
'괜찮군.'
그 모습을 보며 군터는 한 번 시도해 본 '잔수작'이 생각보다 효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한 일은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창을 휘둘러 사기를 쏘아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몸 밖으로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끌어올렸던 기운이 소진되고, 그것이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다시 한 번 소진이 되기에 들이는 수고에 비해 별로 위력적이지는 않다. 특히 살상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나 살상력이 없다 해서 쓸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군터는 사기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진 이후로 꾸준히 그 활용법에 대해 생각했었다. 특히 직접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최대한 은밀하게 그 힘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 고안을 해왔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사기의 성질을 고려한 수법이었다.
사기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생명과 죽음은 완벽하게 상반되는 성질이며,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이다.
그렇기에 사기는 백지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잉크가 크게 번지듯, 적은 양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사람의 몸속에 흘러들어간 사기는 몸을 죽인다. 다만 그 힘이 미약하여 아주 잠깐 동안, 일부만을 죽일 뿐이다. 보다 강대한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대일수록 효과는 더욱 미미해진다.
가론드와 같이 강한 무인이 상대라면, 전력으로 사기를 쏘아 보낸다 해도 아주 잠깐 동안 감각을 죽이는 정도가 한계다.
감각의 상실.
마비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그 차이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체감하는 당사자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차이 때문에 가론드가 지금도 왼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아주 미세하게 동작이 늦는다거나 하는 정도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하다.
경지에 이른 무인들끼리 대결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한 약점이 된다. 즉, 써먹을 수 있다는 소리다.
퍼억!
창대 끝이 가론드의 가슴을 찍었다. 창날은 피했으나 그 뒤의 일격은 피하지 못한 가론드가 신음을 토하며 뒤로 쭉 밀려났다. 군터가 곧바로 그를 쫓았다.
"크으!"
일그러진 가론드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군터는 달려가던 도중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기 무섭게, 참마검이 땅을 내리찍었다.
쿠웅!
땅이 움푹 파였다. 검이 내리찍은 자리 주변으로 얕게 거미줄 같은 균열까지 생겨났다. 땅을 구른 군터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을 좁혔다.
'아래에서 받아낸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군.'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것이나, 좌우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몸을 띄워서 충격을 해소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공격은 그럴 수가 없으니, 온전히 맨몸으로 저 힘을 감당해야 한다. 힘에는 자신이 있는 군터였지만, 저 무식한 일격 앞에서는 자신감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법구인가.'
주술적인 힘이 깃든 물건. 개중에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별로 대단찮은 것들도 수두룩하지만, 제대로 된 것은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전에 사용하던 그의 창, 칸젤이 그랬던 것처럼.
콰앙!
군터는 밀쳐내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띄웠다. 그렇게 크게 밀려나 땅에 발을 딛고서도 몇 걸음을 더 물러서야 했다.
"……."
제대로 힘을 내기 힘든 자세였다. 어정쩡하게 휘두른 검에 이 정도 힘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시 저 커다란 검이 지닌 힘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군터는 뒷걸음질을 끝내자마자 다시 가론드에게 달려들었다. 가론드도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두르며 응수했다.
채앵!
다시 한 번 칼이 부딪쳤다. 이번에는 뒤로 튕겨나가는 일은 없었다.
'검의 힘을 연달아 사용할 수는 없는 모양이군.'
하긴,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하다. 가론드는 자신의 검이 '법구''라고 직접 이야기했다. 물론 군터도 법구라고 해서 다 같은 법구가 아니며, 법구마다 그 힘의 차이가 크게 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법구는 법구다. 법구가 발휘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만일 그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낸다면, 그것은 법구가 아닌 법보라 불렸을 것이다.
콰앙!
'대략 열 셋. 아니, 열 넷인가.'
호흡의 수다. 가론드는 대략 열셋에서 열 네 호흡 정도의 간격을 두고 또 다시 검의 힘을 발휘했다. 시기를 보느라 일부러 뜸을 들였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 정도의 제약도 없이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면, 저 커다란 검은 법구라 부를 수 없는 물건일 테니.
'한 번. 어쩌면 한 순간.'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발휘되는 힘이다. 그 순간을 감지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충돌을 피하면서 틈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저 힘을 쓰는 순간. 그때가 기회다.'
아마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한 순간에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물건을 들 때 몸의 균형이 깨지는 것과 비슷하다.
비정상적인 크기의 검. 이제껏 본 적 없는 거구의 체형. 줄기차게 흘려대는 패도적인 기세.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가론드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선호함이 분명하다. 아마도 지금껏, 그는 그런 방식으로 무수한 승리를 쌓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저런 어설픈 전투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일 거다.
채채챙!
가론드의 무공은 분명히 뛰어났다. 군터가 이제껏 상대해본 적들 중 손에 꼽을 정도였고, 최고를 다툴만했다. 비정상적인 크기의 검을 다루면서도 공수의 균형이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었고, 간간이 발휘하는 기교 역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거구에서 나오는 힘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이렇듯 분명히 가론드는 경지를 넘어선 무인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터는 그를 상대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흡!"
창끝이 가론드의 목옆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지나갔다. 가론드의 검술에 빈틈은 없었다. 군터의 창이 힘으로 밀고 들어가 억지로 틈을 낸 것이었다.
가론드의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졌다. 미세하지만, 군터는 그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론드는 분명히 당황했으며, 조급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힘에서 밀릴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채앵!
힘. 순발력. 모든 신체적인 능력에서 군터는 가론드를 조금씩 앞섰다. 군터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는 가론드를 상대하면서 내내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가론드가 어떻게 움직일지가 훤히 보였고, 어렵지 않게 반응할 수 있었으니 어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렵지 않다고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가론드가 군터를 상대하며 점차 수세에 몰리고는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군터 역시 가론드를 상대로 확실하게 기회를 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부웅!간간이 날아오는 이 섬뜩한 일격 때문에 말이다.
'후우.'
가까스로 피해냈지만, 또 다시 치열하게 싸워 좁혀놨던 다시 거리가 늘어났다. 허탈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가론드의 얼굴에 점점 피로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대로 간다면 분명히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그 전에 병사들이 다 죽게 될 것이다. 군터 자신 역시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려는데, 가론드가 씩씩 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인간이 아니군. 그렇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발뺌해도 소용없다. 난 느낄 수 있으니까. 네게서 그분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니, 그런다 해서 변하는 것은 없었겠지만……. 아무튼 재미있군, 아직까지 남아있는 씨앗이 있었나? 아니면 운 좋게 접신(接神)이라도 한 건가?"
씩씩 거리던 목소리는 점점 웃음기를 머금었다. 영문 모를 불쾌함에 군터는 눈매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가론드가 지껄이는 말에 흥미가 생겼기에, 조금 더 숨을 가다듬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분께서 널 보셨다면 흥미로워 하셨을 터인데, 안타깝게 됐군. 음…아니야. 어쩌면 이미 알고 계셨을 수도."
"실성이라도 했나? 헛소리를 줄줄이 늘어놓는군."
군터가 창을 고쳐 잡고 다시금 달려들었다. 지금 이렇게 노닥거리는 와중에도 병사들의 목숨이 하나둘씩 꺼져가고 있었다.
"실성? 그럴 리가!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뚜렷하다!"
군터와 가론드는 이제까지보다 더 격렬하게 맞붙었다. 지금까지는 군터가 일방적으로 달려들고, 가론드는 수비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시간이 누구의 편인지를 두 사람 모두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론드도 적극적으로 역공에 나섰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으나, 군터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론드가 공격에 치중할수록 그가 노릴 수 있는 틈이 늘기 때문이었다.
퍽!
창이 어깨를 찔렀다. 하지만 얕다.
군터는 창을 회수하는 동시에 허리를 뒤로 꺾었다. 머리 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퍼억!
몸을 튕기며 뻗은 주먹이 가론드의 팔뚝을 후려쳤다. 강한 힘을 담은 주먹이었기에 휘두른 쪽과 막은 쪽 둘 다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인간의 몸놀림이 아니야. 그렇다고 술(術)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지. 틀을 깬 나보다도 위라니. 완전하지는 않아도 역시 신은 신이라는 건가?"
가론드는 조금 전부터 영문 모를 소리를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것이 적잖이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부터 가론드의 힘이 한층 더 강해졌다. 몸놀림 역시 더 기민해져서, 빈틈을 노리는 것이 쉽지 않게 됐다.
너무 극적인 변화였다. 마치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각인인가? 아니면…….'
군터는 흘깃 주변의 상황을 훑어보았다. 그의 수하들이 최선을 다해 분전하고 있었지만, 점점 좁혀 오는 적군에 의해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기병이다. 포위를 돌파하여 빠져나가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보병처럼 자리를 지키며 버티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별 수 없군.'
이제는 정말 위험해졌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감수하는 수밖에.'
가론드의 검이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부터가 다르다. 이것은 흘려야만 하는 공격이다. 하지만.
콰앙!
몸에서, 두 다리에서 우드득! 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조금쯤은 정말로 뒤틀렸을지도 모른다.
군터는 피하지 않았다. 흘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서 달려들어 맞받아쳤다.
가론드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설마 이 힘을 정면에서 받아치리라고는 짐작도 못한 것이다.
콰앙!
군터가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가론드 역시 피하지 않았다.
콰직!
방금 전 흘렸어야 하는 공격을 받아치면서, 군터의 창에는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그랬던 것이 곧바로 가론드의 검과 다시 한 번 부딪히니 창대 중간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군터의 예상 안이었다.
군터는 중간에서 뚝 하고 부러진 창대를 한 손에 쥐고, 그대로 가론드의 목을 향해 찔렀다.
푸욱!
그러나 부러진 창대는 가론드의 목이 아닌 왼 팔뚝에 꽂혔다. 그 짧은 순간에 가론드가 반응하여 막아낸 것이다.
"크아아!"
가론드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검에 힘을 실었다. 군터는 한 손에 쥔 부러진 창으로 그것을 막아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팔뚝에 꽂힌 창대를 놓았다. 그리고 검을 쥔 가론드의 오른 손목을 움켜잡았다.
"……!"
불길함을 느낀 것일까. 가론드가 힘을 주며 버티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의 몸이 반쯤 들린 뒤였다.
쿵!
가론드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