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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43화 (443/1,064)

443화

"곧 떨어질 것 같습니다."

"글쎄."

아직 모른다는 듯이 답하기는 했지만, 가론드 역시 곧 남쪽 성벽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곤이 휘하의 루반다이들을 이끌고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성벽에 보이는 적의 깃발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뒤이어 투입한 병사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을 넘고, 성문까지 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둥! 두웅-! 둥!

"음?"

온갖 소리로 시끌벅적한 전장이었다. 그렇기에 아주 작게 흘러간 몇 번의 북 소리는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론드는 어쩐지 그 자그마한 소리가 거슬렸다. 그렇기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가 바라본 그 방향에서 한 기의 기마가 말을 달려왔다.

"장군! 적의 기병이 성벽을 내려왔습니다!"

"기병?"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눈을 찡그렸다. 무언가 착각을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말을 달려오는 전령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있었다. 헛것을 봤다고 여기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기병? 성벽을 내려와?"

믿기지 않는 그 소리를, 가론드는 다시금 곱씹었다.

*

성문을 열고 나가면 좋겠으나, 적군이 어떻게든 성문을 뚫겠다고 코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굳이 성문이 아니더라도 밖으로 나갈 방도는 있었다.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넘어가면 된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 하겠지만, 군터는 진심이었다. 실제로 일찍이 한 번 해낸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성벽 바로 아래에 시체가 높이 쌓여 있어 발판 역할을 해주었지만, 이번에도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충분히 가능했다.

"우와앗!"

무서울 것 없이 덤벼들던 적병들이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럴 만도 하다. 열심히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는데, 느닷없이 앞에서 기마가 달려들어 오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히히힝!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적들이 성벽에 오르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를 통해 성벽을 내려갔다. 제국 최고라 자부하는 정예 군대답게, 룬차이 군이 사용하는 사다리는 튼튼하기 그지없었다. 말과 사람이 통째로 몇이나 올라타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콰직!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의 머리를 말발굽이 짓밟았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던 병사들은 기마의 돌진에 밀려 우르르 떨어져 나갔다. 창을 들었다면 몰랐겠지만, 기껏해야 방패와 칼 정도만 들고 사다리를 오르던 병사들은 상상도 못한 기병의 돌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거창!"

경황없는 와중에도 적은 어떻게든 대응했다. 사다리 아래에 포진한 적군이 일제히 창을 들었다. 사다리에서 막 내려오는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타악!그러나 상대가 좋지 않았다. 가장 먼저 땅에 내려선 군터는 막 진형을 갖추기 시작한 적군에 파고들어 적의 진열을 와해시켰다. 그가 사방으로 말을 몰며 창을 휘두르자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고, 뒤따라 내려온 군터의 휘하 기병들이 또 다시 달려드니 성벽 아래의 적군은 손도 쓰지 못하고 밀려났다.

"간다!"

혼란에 빠진 적을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군터는 병사들이 다 내려왔음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노리는 것은 병사 수백의 수급 따위가 아니었다.

'대장의 목.'

오직 그것만이 이 불리한 전황을 뒤엎을 수 있다.

"바짝 붙어라! 낙오하는 자는 버리고 간다!"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부터는 뒤가 없다는 것을 병사들도 알고 있다.

'남쪽.'

대장기가 어디서 펄럭이는지는 미리 확인해두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망설임 없이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뿐이다.'

적은 사방에서 성벽을 두드리고 있다. 적의 병력이 분산되어 있는 지금이 대장의 목을 노릴 수 있는 호기다.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을 적 역시 알고 있다는 점.

그렇기에 높게 올린 대장의 깃발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매복이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 병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터. 그렇다면 저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라 봐야 할까.

'가론드.'

저곳에 있는 적장의 얼굴을 떠올리자 놉게 올린 대장기가 납득이 갔다. 지금쯤이면 보고를받았을 터. 그렇다면 어쩌면.

"……."

혹시 하고 생각하자마자 대장기가 움직였다. 대략 삼백에서 사백 정도 되어 보이는 기병이 진열에서 빠져나왔다.

"대장님! 적이……."

"보고 있다."

적의 별동대가 대장의 목을 노리고 온다면, 보통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몸을 피하거나, 아니면 두껍게 벽을 세우고 방비를 단단히 하거나.

그러나 가론드의 대응은 상식 밖이었다. 그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 되지 않는 기병을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어떻게 생각해도 대장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배 이상 되는 적을 상대로 오히려 정면에서 달려든단 말인가.

"넓게 벌린다!"

군터의 명에 길게 늘어져서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앞으로 치고 나와 넓게 늘어졌다.

적의 수는 많이 잡아봐야 사백 가량. 그에 반해 이쪽의 병력은 칠백 정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병력의 우위가 있기에, 단번에 적을 둘러싸 섬멸해버릴 작정이었다.

'우회할 길은 없다.'

셀마 성의 세 성벽 사이는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다. 기본적으로 도시가 아닌 성이기에, 기병 수십이 나란히 늘어서면 옆으로 피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돌파를 노리는 건가.'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가론드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사람만한 거검(巨劍)을 든 그는 웃고 있었다.

두두두!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군터는 가론드를, 가론드는 군터를 보았다.

"흡!"

군터가 높이든 창을 내리쳤다. 반면 가론드는 검을 아래로 내리고 있다가 올려쳤다.

콰앙!

굉음이 터지고, 군터가 그가 탄 말과 함께 허공에 붕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군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말의 비명과, 적과 맞부딪친 수하들을 내려다보며 알아차렸다.

'말도 안 되는 일.'

형편 없이 밀렸다. 그러나 힘에서 밀린 것은 아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상대의 힘이 더 강했다 해도, 상대는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고 자신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게다가, 가론드는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밀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 검.'

충돌직전. 순간적으로 검에서 강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뭔지는 몰라도, 저 거대한 검이 조화를 부린 것이 분명하다.

콰앙!

선봉이었던 군터가 나가떨어지자 그의 병사들은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무엇보다 가론드가 문제였다. 살라스와 할렌이 동시에 양옆에서 달려들었지만 가론드는 여유롭게 둘을 지나쳐 그 뒤의 대열을 파고들었다.

히히히힝!

균형을 잃은 말이 어설프게 땅에 착지해 다리가 꺾였다. 군터는 곧바로 말 등을 박차고 뛰어올라, 근처의 적병을 덮쳤다. 번개처럼 손을 뻗어 목을 꺾어버리고 말을 탈취한 그는 등을 보이며 나가고 있는 가론드를 쫓았다.

"따르라!"

대열이 무너졌다고 하나 크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군터가 나가떨어짐과 동시에 휘하의 장교들이 병사들을 분산시킨 덕이었다.

흩어진 병사들은 군터의 명에 곧바로 집결했다. 그 즈음, 돌파하여 달려 나가던 적들도 반전하여 태세를 가다듬었다.

"네놈일 줄 알았다."

가론드가 한바탕 핏물을 뒤집어 쓴 채 씩 웃었다. 그는 홀로 한참이나 앞서서 달려오는 군터를 보며 검을 고쳐 쥐었다.

'멀쩡하단 말이지.'

한 손으로 휘두르기는 했으나, 전력을 다했다. 그의 검, 참마(斬馬)의 힘까지 빌린 일격이었기에 막았다고 해도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몸이 박살이 나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저 애송이는 멀쩡해 보였다. 힘의 차이를 느꼈을 텐데도 위축된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잔뜩 성이 난 듯 폭풍 같은 살기를 풍기며 달려오고 있었다.

평범한 애송이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다. 적들이 마지막에 던진 패는, 근거 없는 모험이 아니었다.

'얼마만이던가.'

자신을 상대로 저렇게 이를 드러내는 놈은 근 10년 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도전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다. 싫기는커녕,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받아주마!"

피가 끓는다.

장군의 휘장을 하사 받은 후로는 지휘관으로서 전투에 임해왔지만, 그의 본성은 군인보다는 무인에 가까웠다. 자신의 본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제한다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고, 쉬운 일도 아니었다.

콰앙!

참마검(斬馬劍)이 떨어져 내렸다. 말의 무릎 네 개가 단번에 으스러지고, 대적하던 상대는 고깃덩어리가 된 말과 함께 땅에 처박혔다.

콰직!그러나 근사한 광경에 도취될 겨를도 없이, 가론드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탄 말의 앞 다리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히히힝!

말이 쓰러지고, 가론드는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터무니없는 검이군."

"멋진 놈이지. 법구(法具) 중에서도 여태 이놈만한 녀석을 보지 못했다. 반칙이라고 불평할 텐가?"

"그럴 리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상대는 멀쩡했다. 말의 피를 뒤집어써서 몰골이 좀 추레해진 것을 빼면 말이다.

가론드는 그의 검을 어깨에 걸치고서 찬찬히 상대를 살폈다.

겁을 먹지도,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의 검을 살피는 듯했지만, 그 정도야 탐색 정도다.

'여유롭군.'

마음에 들지 않는다. 힘의 차이를 알고 있을 텐데도 저런다는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일 터.

'말이 없으니 할 만하다 이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똑똑히 알려주리라.

부웅!

거검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창이 바람을 갈랐다.

'……?'

의아했던 것은, 상대가 휘두른 창이 너무도 빠르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미처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기도 전에 말이다.

그렇기에 창은 허공을 갈랐다. 가론드는 그것이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인가?'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긴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런 웃기지도 않은…….

"……!"

가론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왼 팔을 들어올렸다.

'멀쩡해?'

그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의문을 담은 시선이었지만, 상대는 별로 답해주고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가 몸을 뒤로 빼는 사이에 상대는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큭!"

가론드는 뒷걸음질 치며 검을 휘둘러 찔러오는 창을 쳐냈다.

채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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