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퍽!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육탄돌격을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상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몸이 뒤로 넘어가는 와중에도 상대는 그의 가슴을 걷어차 밀어냈다.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짓눌러버리려던 세레온 우슈무르는 뒷걸음질을 치며 아쉬움을 삼켰다.
"으아앗!"
엉거주춤 하고 있는 상대를 보며 기회라 여겼던지, 친위대 병사 하나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다른 병사들도 그 뒤를 따라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서걱!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가른다기보다 찢어버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칼 한 자루를 저렇게까지 거칠게 다루는 자를 처음 보았다.
다만 거치다고 해서 투박한 것은 아니다. 마구잡이로 휘드르는 칼이 아니다. 맹렬한 기세에 가려 제대로 알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분명히 저 거친 칼질 속에서 형(形)이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는 것 같아 보여도 적은 냉정하다는 거다.
"크아악!"
팔이 잘린 병사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일부러 목이 아니라 검을 쥐고 있던 팔이 베었음을 단번에 눈치 챘다.
'저놈…….'
저 또 다른 루반다이의 대장은 난전에 익숙하다 못해 경지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방금 전, 팔을 베인 병사가 물러난 탓에 뒤에서 덤벼들던 두 명의 병사가 순간적으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 같지만, 실은 그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계산이 있다.
'내가 상대할 수밖에 없음이야.'
저 루반다이의 대장이 설쳐댄 탓에 성벽 밖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막아내기가 어려워졌다. 더 지체한다면 매우 곤란한 일이 벌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놈!"
일갈하며 땅을 박차고 나서니 루반다이가 안광을 토하며 덤벼들었다. 흐릿하게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세레온 우슈무르는 단박에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주먹에 맞은 투구가 으스러지고, 빠르게 덤벼 든 루반다이는 그 이상으로 빠르게 튕겨 나갔다. 쇠로 된 투구가 으스러졌으니 그 안의 내용물이 어찌 됐을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가 루반다이 하나의 머리를 뭉개는 동안, 그가 바라보던 적 역시 또 한 명의 병사를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계속 뒤에 숨어있지 그랬나."
"분에 넘치는 칼 한 자루 쥐었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그래. 유마의 칼에 찔려 보았으니 이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겠군."
상대가 피에 절은 칼을 슬쩍 들어 올렸다. 벌써 열 명이 훌쩍 넘는 사람을 거칠게 베어 넘겼음에도 칼에서 느껴지는 예리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적포 장군 세레온 우슈무르."
"……?"
"내 이름은 자곤이다."
"목숨이라도 구걸 할 참이냐?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시기가 좋지 않다."
루반다이의 지휘관, 자곤이 칼을 비스듬히 내렸다.
"내 나름대로 무인 대 무인으로서 존중하고자 했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서늘한 목소리에도 세레온 우슈무르는 입가에 건 조소를 지우지 않았다.
"칼질이나 좀 할 줄 아는 얼간이 녀석. 난 군인이지 무인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이해했다."
자곤의 마지막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뭘 중얼거린다 싶은 순간, 이미 시퍼런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카앙!
'빌어먹을!'
기본적인 신체능력도 열세. 무기의 차이야 말할 것도 없다. 몇 번이나 부딪쳤다고 벌써 이가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그의 칼이 나름 장인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명도라 망정이지, 어지간한 칼이었다면 이가 나가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채앵!
무기도, 힘도, 민첩성도 모두 부족하다. 그나마 주변의 병사들이 거들고 있지만, 루반다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콰득!
스쳐지나간 칼날이 갑옷을 찢고, 돌로 변한 피부에 생채기를 냈다. 제대로 걸리면 각인의 힘을 끌어올린 몸조차 반으로 갈려나갈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세레온 우슈무르는 연신 뒤로 밀려나며 이를 악 물었다.
말석이라고는 하나 제국의 위장으로서 온갖 귀물들을 접해온 그였다. 특히 군인이며 무인인 그였기에 무구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차는 것들을 손에 넣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로서도, 이런 병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요철이라 했던가. 쇠붙이 자체가 어지간한 법구 이상 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누가 이런 말을 한들 믿지 않았을 것이다.
"흐으."
일찍이 상대한 적이 없는 강적이다. 몸 상태가 상태인 것도 있으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눈앞의 상대는 먼젓번 상대했던 또 다른 루반다이의 대장보다도 더 강하다. 도무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쿵!
또 한 번 칼이 부딪치고, 세레온 우슈무르는 크게 몸을 굴렀다. 그러고서도 충격이 다 해소되지 않아 잠시 비틀대야 했다.
채앵!
목을 찔러오던 칼이 아슬아슬하게 빗겨갔다. 서늘한 감각이 목을 스쳐가는 순간, 그는 눈을 빛냈다.
덥썩!
칼을 쥔 손목을 붙잡고, 동시에 상대의 품에 어깨를 집어넣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이 뒤로 밀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단 두 발자국에 불과했다. 온 힘을 다해 밀친 힘을 단 두 발자국으로 해소한 것이다.
'이런 괴물 같은!'
한 마디 할 수 있었다면 대번에 욕지거리가 튀어나갔을 것이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아예 땅까지 박차고 몸을 띄웠다. 말 그대로 온 몸을 던진 것이다.
돌 갑옷을 걸친 지금, 그의 몸은 평소보다 족히 반 배 이상은 무거워진 상태였다. 건장한 사내의 몸에 중무장을 하고, 거기에 또 다시 반 배 가량이 무거워진 채로 온 몸을 던지니 두 다리로 버티던 상대도 몸이 기우뚱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큭!"
기어이 상대, 자곤의 입에서 심음이 튀어나오며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자곤과 세레온 우슈무르가 한 데 얽혀 쓰러졌다.
퍼억!
쓰러짐과 동시에 돌주먹이 자곤의 머리를 후려쳤다. 비록 제대로 힘이 실린 것은 아니었으나, 돌로 변한 주먹은 그 자체로 흉기였다. 곧바로 일어서려던 자곤이 다시 몸을 뉘었다.
퍼억!
세레온 우슈무르는 일어서려는 자곤을 팔 다리로 짓누르며 연신 주먹을 날렸다. 힘이 제대로 들어간 주먹은 없었으나, 그의 주먹이 꽂힐 때마다 자곤의 몸은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여기서 끝낸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여기서 끝내지 못하면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레온 우슈무르는 거칠게 몸부림치는 자곤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무겁게 변한 몸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떨어져나갔으리라. 그만큼 몸부림치는 자곤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퍼억!
또 한 번. 머리통만한 주먹이 가면 달린 투구를 후려쳤다. 매끈하던 가면은 어느새 찌그러졌다. 그 안에 있는 내용물도 찌그러졌기를 바라지만, 아직까지도 몸부림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억셌다.
'얌전히 죽어라.'
머리를 후려치고 있는 것은 그였음에도 오히려 힘이 더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투구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머리도 착실히 충격을 받고 있다는 뜻. 제 아무리 힘이 넘치는 괴물이라 해도 머리가 상하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법이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이 힘겨운 사투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퍼억! 퍼억!
한 번. 또 한 번.
아주 조금. 몸부림이 약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퍼억!
한 번.
퍼억!
또 한 번.
'이제 끝이…….'
퍼억!
이것은 투구를 때리며 난 소리가 아니었다. 세레온 우슈무르의 주먹은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 이것은, 등 뒤에서 그를 후려친 무언가로 인해 난 소리였다.
'이런……!'
그것이 창이었다는 것을, 세레온 우슈무르는 몸의 균형을 잃고 앞으로 밀려나면서 알 수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적병이 그 창을 쥐고 서 있었다.
"크아아아!"
그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박살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상처 입은 짐승의 포효가 터지고, 그의 몸이 거칠게 밀려 나가 떨어졌다.
'빌어먹……!'
쓰러진 상태에서 고개를 막 들었을 때, 잔뜩 분노했음에 틀림없는 상대는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막아야…….'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한 발씩 성큼성큼 달려오는 상대가 뚜렷하게 보였으나, 칼을 들어 올리는 그의 팔은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릿하기만 했다.
'막지 못한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깨달았다.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달려드는 상대가 자신의 죽음이며, 자신은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는 칼을 들어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한 칼 정도는 먹여줄 심산이었다.
거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적의 칼날이 움직이고, 세레온 우슈무르는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든 목과 심장만 피해서 맞기 위해서였다.
"……!"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레 거무튀튀한 인형이 앞을 가로막았다.
카앙!
큼직한 철성. 그리고 이어.
푸확!
검은 인형의 몸에 긴 선이 그어지고, 피가 튀었다.
"크아아앗!"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겨를이 없었으나, 세레온 우슈무르는 본능적으로 칼을 뻗었다. 힘껏 내지른 칼은 무너지는 인형의 목옆을 스쳐지나 그 너머를 찔렀다.
푸욱!
제대로 찔렀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확실했다. 그는 있는 힘껏 칼을 밀었다.
서걱!
가슴이 불로 지진 것처럼 후끈했다. 온 신경을 손에 쥔 칼에만 집중하고 있던 터라, 세레온 우슈무르는 자신의 가슴이 갈라졌다는 것을 피가 튀고서야 알아차렸다.
"크륵!"
피가 끓는 소리.
검은 인형이 쓰러지고 시야가 트였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제야 자신의 칼이 어디를 찔렀는지를 볼 수 있었다.
'운이 좋았군.'
심장. 아마도 그 언저리.
무릎을 꿇으며 무너지는 상대를 보며, 그는 왼쪽 가슴 깊숙이 파고든 칼을 뽑았다.
서걱!
이가 나간 칼이라도 사람 목 하나 베기에는 충분했다. 찌그러진 투구와 함께, 잘린 머리가 땅을 뒹굴었다.
"……."
죽어서까지도 가면을 벗지 않는 적을 일별하고, 세레온 우슈무르는 뒤편에 쓰러진 인형을 확인했다.
"……!"
쓰러진 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그는 잠시 이해하지 못해 눈을 두어 번 깜빡여야 했다.
"……."
그러고 보니, 어느새 주변에 못 보던 병사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성벽을 올라오는 적병과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그들은, 쓰러진 자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대가, 날 구했군."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끓고 있었고, 눈은 안개가 낀 듯 흐려져 있었다. 오직 간헐적으로 꿈틀대는 몸만이 아직 그의 숨이 다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리는 증거였다.
"먼저 가시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힘겹게 한 마디를 하자마자, 폴라릭 앤버의 고개가 꺾였다.
핏물 위에 쓰러진 그를 잠깐 동안 씁쓸하게 바라보던 세레온 우슈무르는, 곧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
둥! 두웅-! 둥!
규칙적으로 울리는 자그마한 북 소리.
"신호입니다."
살라스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